시솽반나, 라오스, 태국 여행기
제6부: 르왕프라방에서의 3박 2일
(루앙프라방 중요도: 대부분의 사찰과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음식점은 위 초록색 타원형 속에 들어 있다. 관광객이 아닌 대부분의 주민은 초록색 타원형 오른쪽 주택가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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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은 게스트 하우스)
3월 20일 오랜만에 푹 잠을 자고 늦게 일어났다. 그런데 안경을 끼려고 하니 안경 다리만 손에 잡히고, 안경은 땅에 뚝 떨어졌다. 10분간 방안을 이 잡듯이 뒤져서 눈에 보일까 말까한 까만 나사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눈에 뵈는 것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프론트에 안경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 지점을 확인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조금 가다보니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시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보여주니 말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순식간에 수리가 되었다. 또 마침 시계의 바테리가 다 닳아서 그것을 교체해야 했다. "battery" 했더니, "ok"라고 말하며 그 또한 순식간에 교체되었다. 2~3천원 주고 휘파람
불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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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왕프라방은 수 많은 사찰이 산재해 있고, 사찰과 사찰 사이에 게스트하우스, 식당, 상점이 들어서 있는 작은 도시다. 유네스코 지정 유산이라고 하는 이 도시 중심 부분에, 전망대로 사용되는 작은 산이 있고, 산의 서쪽에 대부분의 볼 거리가 있으며 바로 그 옆에 메콩강이 흐른다. 전망대 오른쪽은 일반 라오스 사람들이 거주하는 숲이 우거져있는 주택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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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찰이 하도 많아서 어디를 갔다 왔는지 잘 기억도 되지 않지만, 또 그 사찰이 그 사찰이어서 이것저것 구별도 잘 되지 않았다.
처음에 간 사찰은 스님들이 모여서 북을 만들고 있었다. 쇠털도 채 뽑지 않은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있었는데, 바로 내 눈 앞에서 여러 명이 삥 둘러 앉아 쇠가죽을 나무 통에 부착하고 있었다. 바로 그 아래에서는 울타리에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는데, 서양인들이 스님들을 돕고 있었다.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이 보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페인트 칠을 해 본 적이 없기에, 괜히 도와준다고
하다가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구경만 하고 메콩강 가로 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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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하면 자꾸 베트남이 떠오르는 것은, 메콩강은 베트남에 있다고 우리가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솽반나에서 말했듯이, 메콩강은 중국에서 란찬강으로 불리며, 라오스를 지나 베트남으로 흘러가는 거대한 강이다. 강가에서 강을 바라보면 과연 대단한 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온 몸에 알 수 없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는 이상한 나무를 보면서, 강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간다. 나무 그늘 아래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가
죽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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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도 식힐 겸, 노트북 컴퓨터의 작동도 시험해 볼 겸, 경치가 좋은 어떤 식당에 들어갔다. 맥주 한 병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시켜놓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하지만 Wi-fi가 되지 않아 인터넷은 사용할 수 없었다.
라오스의 맥주는 라오 맥주다. 보통 중국의 맥주의 알콜 함량이 2-3도인데 비해, 라오맥주는 5-6도가 된다. 그래서 차게 해서 마시면 톡 쏘는 맛이 아주 강해서 짜릿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시솽반나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한국인이, 틈이 나면 라오스에 와서 라오 맥주를 마시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하여튼 너무 유명해서인지 몰라도, 우리 여행팀의 몇 사람은 이미 라오 맥주 표시가 들어 있는 티셔츠를 사
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오늘따라 날씨가 더워서, 메콩강가에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얼음 맥주 한잔, 그야말로 죽여준다. 카, 이 맛이야. 5.6도의 맛, 바로 이 맛이군. 얼큰하게 취해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4시반 쯤 해가 서산에 가까워 왔을 때, 다시 시내로 나왔다. 해가 질 무렵이니 사진 찍기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빛이었다. 석양에 비친 사찰과 탑, 그리고 서양식 건물이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중심가를 따라 가면서 여기저기 사찰을 들러서 마침내 반도처럼 쭉 뻗은 끝 지점까지 갔다. 메콩강에는 몇 척의 배가 황혼에 물들고 있었다. 약속 시간 때문에 더 이상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다시 우리의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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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걸어 오니 젊은이 5-6명이 기타를 치며 놀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맥주를 마시고 가라고 한다. 한국에서 왔다니 그들도 좋아해서 좀 앉아 있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러지도 못했다. 마침 그들 중 한 명이 중국에서 3년간 살다 온 적이 있어서 그와 몇 분간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거기에서 조금 더 걸으니 오른쪽에 정말로 멋있는 음식점 겸 호텔이 있었다. 너무 멋이 있어서 혹시 다음에 오면 그곳에 하루라도 머물고 싶었다. 그래서 안내를 받아 들어가 숙박비가 하루에 얼마인지 물었다. 나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하루에 40만원이었다. 아무리 좋다한들, 그래 이 루왕프라방에서 40만원을 내라니,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Thank you so much,"하고 약코가 죽어서 밖으로 나왔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한 말씀 드리면,
"약코가 죽었다"는 말은 "양코" 즉 서양인의 코가 내려앉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가 죽었다"는 뜻이다(인터넷을 찾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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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라오스 식으로 먹는다고 하였으나 막상 주문해서 나온 것은 서양 음식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오스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라오스 음식이 아니다. 이미 서양화가 된 라오스 음식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우리가 찾아간 이곳 관광지는 이미 서양인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음식, 생활방식, 심지어는 사고방식도 서양식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실제로 서양인 100 명 중에 동양인은 5명 이하의
비율로 발견되었다.
한 마디로 서양인이 판치고 있는 라오스다. 동양인 중에는 중국인이 가끔 보였고(이것은 아마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한국인이 가뭄에 콩나듯이 보였고, 일본인은 지진의 여파도 있겠지만, 거의 구경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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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이트클럽에 가자고 했다. 전원이 뚝뚝이라는 트럭을 개조하여 사람이 탈 수 있게 만든 차를 타고 시내로 갔다. 운전수가 내려 준 곳은 손님 하나 없이 넓은 홀에 노랗게 칠한 드럼통만이 수 없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타고 다른 나이트 클럽으로 갔다. 클럽 안에는 몇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무대에는 가수로 보이는 사람이 기타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너무 썰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그러니까 10시쯤 되었을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양인도 몇 명 보였지만 대부분은 라오스 젊은이들로 보였다. 그날따라 그곳에 온 사람만 그런지 아니면 대체로 그런지 몰라도, 라오스인에 비하면
우리 한국인들은
거인인 듯이 보였고, 서양사람들의 등치에 뒤지지 않는 풍채였다.
앞 무대에서 송창식이 부르는 노래 비슷한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나가더니, 갑자기 빠른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나라 나이트 클럽은 무대 아래에 넓은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 나가 춤을 춘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공간이 없어서, 모두 자기 좌석에서 일어나 원맨쇼를 하듯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술을 계속 마시고, 한편으로 어디 여자끼리 온 곳이 없나, 스캐너로 문서 스캔하듯이 한 바퀴 훑어 보았다.
그러나 뭐
마땅히 말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그냥 우리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일어나서 또 조금 미친척하다가 다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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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고, 미련이 남은 몇 사람이 다시 처음에 갔었던 노란 드럼통 탁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서도 처음에는 손님이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람이 몰려, 그 넓은 홀을 다 채우고 말았다. 술을 마시다가 춤 추고 싶으면 드럼통 옆에서 흐느적거리는 것이 여기 온 사람들이 할 일이다. 노상 칭다오 약한 맥주만 마시던 우리의 호프 KC는, 호프 맥주보다 독한 5도짜리 라오 맥주 몇 잔 마시고 이미 정신이
갔는지,
두 손으로 드럼통을 잡고 눈을 감은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KC, 그렇게 술 먹을 것 다 먹고, 드럼통만 잡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우능겨? 그렇게 혼자 다 먹지 말고, 소에게도 술을 주란 말이야. 소에게 주는 술, 그게 바로 소주술이야, 간단히 소주라고 하지."
기왕 술먹은 김에 좀 땡겨보려고 했으나, 분위기만 어색하고 춤이 춤이 아니었다. 뭔지도 모를 빨갛고 파란 색깔과 생각이 취함과 맨 정신 사이에 엇갈려서 밀려왔다 밀려갔다. 봄 버들강아지 얼굴 간지리듯, 그렇게 감미로운 음악과, 술 속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제 갑시다."라고 말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당구장 같기도 하고, 영화 촬영장 같기도 하고,
어정쩡하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서 있는데, "형님, 정신 차리셔, 갑시다."라고 말한다. 그래 여기는 라오스 나이트 클럽이야. 다음에 오면 나이트 클럽이 아니라, 바에 가서 한 잔 해야겠어. 이곳이 좋기는 좋지만, 그래도 붉은 등불 아래 춤추는 댄서가 있어야 해. 색스폰도 울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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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탁발 장면을 사진 찍기 위해 기를 쓰고 일찍 일어났다. 맨발인 스님 들 중 맨 앞에 오는 분은 좀 연세가 많은 분이고, 뒤 따라오는 사람들은 어린 스님이었다. 길에 앉은 사람들이 탁발 바구니에 담아 주는 것은 빵이나 밥 또는 과자였다.
스님보다도 사진을 찍으려는 구경꾼이 더 많았다. 필사적으로 사진기를 갖다대는 사람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무가내식 사진사까지 온갖 종류의 사진사들이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촬영전장에 뛰어 들었다. 스님들의 모습은 진지했고, 맨발로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 고통을 통한 수련의 의미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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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하고, 동굴 구경에 나섰다. 빡우 동굴이라고 한다. 길을 걸어가면 길가에 차를 대 놓고, 뚝뚝이 기사들이 "cave, fall"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차 옆면에도 그렇게 써 있다. 아무 차나 타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빡우 동굴은 처음부터 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를 타고 가서 배로 강을 건너서 갈 수도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배를 타고 25키로 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넓은 배를 우리 8명이 전세를 내고 갔다. 바닥은 파리가 낙성할 것 같이 깨끗했다. 선장은 신발을 신어도 좋다고 했지만, 선장 자신이 맨발인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도 신발을 벗었으면 하는 것 같았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라오스는 어디를 가나 신발을 먼저 벗어야 한다. 호텔에 들어갈 때도 신발을 벗어 들고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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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물살이 센 강물을 거세게 헤치고 올라간다. 약 25키로를 간다고 하는데, 중간에 어떤 마을에 잠깐 들러, 쇼핑을 하기도 한다. 쇼핑은 주로 싸구려 수건이나 옷 머플러 등이다. 먼 산을 바라보면서 올라가는 이 여행은, 사람에 따라서는 좀 싱겁다고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기암 절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용돌이 치는 물살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그런 물길을 따라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과 멀리 보이는 그림 같은 산천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간다면 이 또한 묘미 중의 묘미다.
막상 동굴에 도착하면, 도저히 동굴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동굴이 있다. 우리나라는 특히 동굴이 많은 나라인데, 제주도나 충청북도의 동굴을 구경한 사람은 "에게, 이게 뭐가 동굴이야. 그냥 바위 밑이네."라는 말이 나오기 십상이다. 실제로 여기 동굴은 바위 밑에 있는 움푹 파인 곳으로, 수 많은 불상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천장에 붙어 있는 박쥐들인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저것이
박쥐인지 바퀴벌레인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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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동굴>
<아래쪽 동굴의 천장에 있는 박쥐>
거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또 다른 동굴이 나온다. 한 아줌마가 하품을 하면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는 곳이다. 약 10미터 깊이로 들어가는데, 안에는 아무런 불을 켜 놓지 않아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면 동굴 안에 작은 불상이 하나 있기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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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동굴이 좀 허무한 동굴이라면, 오후에 간 꽝시 폭포는 대단한 폭포다. 전에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유명한 곳이고, 과연 이름값을 한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폭포다. 석회석이 녹아서 인지 연푸른 빛을 띠는 이 폭포는, 몇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맨 뒤에 있는 폭포는 폭포의 길이가 상당히 길다. 폭포 근처에 가면 떨어지는 안개비와 같은 물방울로 인해 서늘함을 느낀다.
폭포 위에 있는 나무에 줄을 매달아 몇 번 흔들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묘기를 연출하는 곳도 있다. 주로 서양사람들이 줄을 잡고 타면서 떨어질 때, 낙하하는 동작이 다양하여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바로 위에서는 그냥 목욕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 온몸에 이상한 문신을 하고, 혀와 코에 피어싱을 한 서양인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기도 하다가 별 미친 놈 다 있다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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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문신과 피어싱을 한 사람>
다시 루앙프라방으로 돌아왔다. 루앙프라방의 중심부에 조그만 산 또는 언덕이 있는데 푸시산이라고 한다. 사방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몰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첫날은 너무 늦게 갔다가 어두워서 다시 내려왔고, 다음 날 해질녁에 다시 찾아간 곳이다. 이미 정상 부분은 일몰을 보려는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위치가 좋지 않은 몇 곳만 간신히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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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씨산에서 본 루아프라방 주민들의 거주지. 메콩강이 있는 곳은 관광객이 들끓지만 이곳은 조용한 전원도시임을 말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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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관광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가 서서히 지고 있다. 아쉬워하며 탄성을 지르며 지는 해를 바라본다. 카메라나 비디오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 눈에 3월의 붉은 태양이 타오른다. 애인의 손을 잡고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면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이중에는 무엇인가를 소망하면서 일몰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어떤 일을 잊기 위해 이곳에 찾아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건 적어도
이 시간만은
누구에게 원수질 일을 도모하거나, 사악한 일을 결심하려고 이곳에 온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모두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고자 다짐하는 자리일 것이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 속에 전혀 사진을 찍지 않고, 앉아서 그윽한 눈으로 일몰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정말로 지는 해를 즐기려면 그런 사람처럼 행동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진을 조금 더 잘 찍어 보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찬란하게 지는 저 태양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속물이다. 무엇을 보면 그것을 이용하여 무엇을 해보려는 나의 이러한 생각은 물론 장점과 단점이
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무엇을 이용해 무엇을 이루려는 그런 생각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 그대로 즐기는 그런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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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 멀리 산 너머로 해가 진다.>
<해가 지고 난 후의 메콩강과 산>
해가 지자, 서양사람들이 한국의 포장마차보다도 더욱 포장마차 다운, 정말 단돈 몇 백원 아니면 몇 천원에 먹을 수 있는 선술집에 모여 앉아 있다. 우리처럼 먼 나라에서 왔을 그들이, 허름한 담벼락 아래 바로 이 선술집에서 나누는 대화는 지난 생활의 고달픔과 역경에 대한 한탄일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나름의 희망일 수도 있다. 아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먼 이국 땅에서 사람 냄새를
맡으며, 이국의
정취를 느끼며, 가슴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는 저 모습은 정녕 아름답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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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기 전에 언젠가 루앙프라방을 다시 찾으리라. 밤 하늘에 선명히 떠 있는 저 별을 다시 찾으리라. 그리고 지금 저들이 그렇게 하듯, 아무나 잡고 술 한잔 놓고 밤을 새워 이야기하리라. 메콩강 강바람을 맞으며 라오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오늘을 되새겨 보리라. 그리고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을 미래를 이야기 해 보리라. 오늘 밤이 유난히 사람을 휘어잡는다. 모든 것이 신비롭고 감격스럽다. "아,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아, 잊지
못할 르앙
프라방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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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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