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제행무상 2 (Everything is changing)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5. 08:01

<태안군 파도리 해수욕장>

 

제행무상(諸行無常)-2

 

 

이슬람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세계 종교"의 저자인 일본인 유다 유다카의 말에 따르면, "알라"라는 말의 뜻은 "그 신(the God)"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꾸란)은 "읽는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6세 때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단히 불행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가 메카 근처의 동굴 근처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이상한 말을 하고 다녔는데 자신도 그 말이 신의 계시인지를 모르고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도대체 코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약 600 페이지나 되는 한글 코란을 구입했습니다. 김용선씨가 번역한 것인데요, 본인은 해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원문인 아랍어로 읽어야 가슴 뭉클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114장으로 구성된 코란은 각 장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암소의 장, 여인의 장, 식탁의 장, 전리품의 장, 꿀벌의 장, 개미의 장, 요셉의 장, 마리아의 장"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

 

 

제 1장인 개경(開經)의 장에는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비슷하게 시작됩니다.
"참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운신 알라의 이름으로
온 세상의 주인이신 알라를 찬송할 지어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운신 분.
심판일의 주재자
당신을 믿고 당신한테 구원을 청하나니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소서.
당신께서 은총을 내려주신 사람들의 길로.
노여움을 산 사람들이나 길 잃은 사람들이 간 그런 길이 아닌 곳으로."

 

 

 

<안면도 꽃지 해수욕장>

 

 

이슬람도 유일신을 믿기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유일신이라는 점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습니다.

 


알라신을 믿지 않는 자,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로 옷을 만들어 입히며 머리 위에서 펄펄 끓는 물을 쏟아 붓는다. 그러면 그들의 내장이나 피부도 전부 흐물흐물 녹아 버린다. 게다가 철로 만든 갈고리를 먹어야 한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어가기 시작하면 그 때마다 다시 찌른다."

 

 

하지만 알라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알라가 낙원에 보내 주신다. 내려다 보면 냇물은 졸졸 흐르고, 황금 팔찌와 진주로 몸을 장식하고, 옷은 비단으로 만들어 입는다."

 

 

<태안군 파도리 해수욕장>

 

 

처음부터 코란을 읽어나가다가 "왜 이리 재미가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전을 무슨 재미로 읽겠습니까만, 저는 읽다가 졸다가 딴 생각하다가, 건너 뛰며 읽다가 결국은 읽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중에 좀 한가하면 그 때 읽어 보려고 합니다. 매일 노는 놈이 한가한 때를 찾는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 같지만, 사실 저는 항상 대단히 바쁩니다. 그냥 바쁩니다.

 

 

코란에 있는 몇 구절을 보면

"진실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유태교도 기독교 사바인 등 누구든지 알라와 최후의 심판날을 믿고 좋은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을 것이다."<암소의 장>

"너희들이 아내와 이혼할 경우에는 일정한 기한이 지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그 기한을 계산하는 알라를 두려워하라. 너희들은 아내가 눈에 벗어나는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함부로 그녀들을 집에서 내쫓거나 또는 나가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알라의 규정이다. 알라의 규정을 범하는 자는 이미 자신에게 불의를 저지른 자다. 그대는 모르더라도 알라는 나중에 새로운 일을 일으키실지도 모른다. <이혼의 장>
*그 당시에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함부로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에 대한 경고.

 

 

<태안군 파도리 해수욕장>

 

 

다시 불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최초의 불교(근본불교, 원시 불교)는 상좌부 불교와 대중부 불교로 갈라졌다가 다시 18개의 파로 갈라집니다. 이때를 부파불교라고 합니다.  

 

 

(1)한 갈래는 스리랑카로 가서 미얀마 쪽으로 갑니다. 소승불교 또는 남방불교라고 합니다. 소승이라는 말은 "작은 바퀴"라는 뜻인데, 그들이 스스로를 소승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일부가 자신들을 대승이라고 하면서, 수행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소승이라고 한 것이지요. 아마 소승 불교 사람들은 이 말 들어서 기분 좋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2)또 한 분파는 티벳으로 가서 티벳불교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달라이 라마가 티벳불교를 이끕니다. 달라이는 "바다"란 뜻이고, 라마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달라이라마는 14대 달라이 라마입니다. 학교 다닐 때 라마교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바로 이 티벳 불교를 말합니다. 티벳 불교는 반야사상과 밀교가 융합되었다고 합니다.

 

 

석지현씨가 번역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라는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파드마삼바바라는 사람이 써서 사방에 있는 동굴에 깊숙하게 감춰놓은 것을 릭진이라는 사람이 찾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인 듯한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약 500페이지나 되는 데, 해설이 2/3 정도이고 본문이 1/3 정도입니다 서문 정도만 읽고 대충 훑어 보았는데, 이 책에 관한 것은 다음으로 미룹니다. 하루 이틀에 읽어볼 책이 아니라, 독서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책입니다.

 

 

어떻든 에반스 웬츠는 "사자의 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은 죽음에서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앞에 놓고 죽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앞서 그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이제부터 책장을 넘겨 나갈 이 책 역시 우리에게 다름아닌 그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여기 이 책은 결코 어떤 종교적 전통이나 믿음으로부터 탄생한 책이 아니다.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의식을 가진 채 다시금 인간의 육체 속으로 환생한 위대한 영적 스승들의 증언을 근거로 한 것이다."

 

 

(3)세 번째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승불교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대승은 "큰 바퀴"라는 뜻이고 깨닫는데 역점을 둔다고 합니다.   

 

 

내가 불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동국대학교 김종옥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 철학"이라는 비디오입니다.  45분짜리 27강으로 되어 있는 이 비디오는 서양철학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며, 불교 사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idea), 중세의 "신" 중심 세계, 그리고 근대의 "사유,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철학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니체의 "신은 죽었다"와 하이데거의 "실존"으로 끝납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불교의 어떤 사상과 연관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은 한문을 모르면 불경이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저는 한글로 된 경전을 읽어 보았지만, 아무리 한글로 된 경전이라고 해도 한문을 모르면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또 한문을 잘 몰라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한문 공부 좀 하려고 한문 책도 구입했고, 한문 강좌 비디오도 보았지만 알고 있는 한자는 너무 적고, 알아야 할 한자는 너무 많기에 괴로웠습니다.   

 

 

과거에 한문으로 된 경전만 있었을 때는 몇몇 지식인들 이외에는 정말 공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목사님들에 의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만약에 중국을 통해 기독교가 들어왔다면, 아마 목사님들 고생 엄청나게 했을 것입니다. 새카맣게 쓰여진 한문 성경은 정말 상상만해도 눈앞이 캄캄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들어왔어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더구나 성경은 딱 한 손에 들어갈 정도의 양이지만 불교는 8만 대장경을 공부해야하니 우리나라 스님들은 골치깨나 아플 것입니다. 반면 목사님들 운 좋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한자로 된 사도신경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성경 전체가 아래와 같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신도가 있는 종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마리아"는 "馬利亞"가 되고, "아멘"은 "阿門"이 되는군요.

 

 

我信上帝,全能的父,創造天地的主.

我信耶蘇基督,上帝的獨生子,我們的主;因著聖靈成孕,從童女馬利亞所生;在本丟彼拉多手下遇難,被釘在十字架上,死了,葬了; 下到陰間;第三天從死裏復活;後升天,坐在無所不能的父上帝的右 邊;將來要從那裏降臨,審判活人、死人.

我信聖靈;一聖基督敎會,聖徒相通;罪得赦免;肉身復活;並且永生. 阿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태안 파도리 해수욕장>

 

 

불교 사상 중에 반야사상(공사상)과, 유식사상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사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글을 읽을 사람들 중 선생님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은 하고 싶습니다.

 

 

유식 사상 중에 "마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이나, 귀, 코 등으로 외부 인식을 받아들이듯이 외부 사물을 받아들이는 다른 한 종류의 식(識)입니다. 그런데 이 마나식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이 마나식은 "의식을 통일하여 자아의 축이 되는 의식"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기도 하고, "외부 대상에 투영시켜 영원한 존재라고 믿게 하는 의식"이라고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당연히 저도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경험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물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본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가 여기 있을 때, 생물선생님은 탄소동화작용을 하는지 보고, 미술선생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대상으로 적절한지 보고, 저같은 영어 선생은 이것은 영어로 rose라고 하며 철자는 r-o-s-e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나식입니다.

 

 

저는 마나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본래 모든 진리나 배워야 할 핵심은 간단하나, 그것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쉬운 말을 두고 왜 그리 어렵게 설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학교에 계시는 선생님들은 사전에 나와있는 대로 설명하지 말고, 쉬운 말로 아이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을 하도록 많이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동명사, 부정사, 분사"라는 말은 고등학생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를 떠나니 이런 생각이 더 듭니다. 

 

 

 

<태안 학암포>

 

 

어쩌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성철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고, 본 글을 마칠까합니다. 이 설명은 김종옥 교수가 두 시간에 걸쳐서 이야기한 것인데, 단 몇 분만에 제가 알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쳐 놓은 덫에 내가 당하는 격일텐데!

 

  

1)산은 산이다. 장미는 장미다.
2)산은 산이 아니다. 장미는 장미가 아니다.
3)산은 역시 산이다. 장미는 역시 장미다.

1)"산은 산이다"라는 것은 보통 사람의 입장으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즉 저에게 산은 등산의 대상으로 보이고, 미술선생님에게 산은 그림 그리는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2) "산은 산이 아니다." 저 산이 나의 등산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나의 많은 경험에 의해 내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 산을 또는 세상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구별하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저 산은 내가 등산하기 위해 놓여진 산은 아닐 것입니다. (저) 산은 (내가 생각했던 등산용)산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공(空)하다고 합니다. 즉 공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찌든 경험으로 판단했던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산은 역시 산이다." 자 이렇게 분별(판단)하는 마음을 없애고 보니 산은 본래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등산을 위한 산도 아니요, 그림을 그리라고 거기에 있는 산도 아닙니다. 뜰에 피어있는 장미도 잘라다가 시장에 팔라고 거기있는 것도 아니며, 그림을 그리라고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미는 그 자체로 소중한 하나의 생명체로 그리고 경이로운 존재로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이나 장미는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실존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경지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철스님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겸손하게 낮추어 1번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2번이나 3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부처가 되어야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면 세상은 정말 달라 보일 것입니다. 김선생님은 단지 월 200만원 봉급쟁이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하나의 기계의 부품처럼 종만 치면 교실에 들어갔다가 종만 치면 밖으로 나오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자체로 귀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은 결국 먼지에서 우주를 본다는 이야기이고,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인 경지일 것입니다. 자, 이제 세상을 분별(구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한 떨기 장미에서 경이로운 우주를 보시길 바랍니다.

 

(계속)

 

 

(2009년 6월 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