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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제행무상 3 (Everything is changing 3)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5. 08:11

 

제행무상(諸行無常)-3

 

 

"중국 불교는 선불교(禪佛敎)이며, 이것은 인도불교가 아니라 철저히 중국적 「격의 불교(格義佛敎)」의 소산이며, 궁극적으로 노자와 장자의 변용이다."라고 일본의 어떤 학자가 말했습니다. "격의불교"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식으로 바뀐 불교를 말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나름의 도가 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인도불교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중국식 불교"로 바꾼 것이 선불교라는 것입니다.

 

 

<2009년 5월 1일 홍도>

 

 

사실 중국의 선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냥 알아서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선을 하려면 확실히 알고 해라. 그러려면 선의 원조인 벽암록을 우선 읽어라."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최근에 석지현스님이 해설한 여러 권으로 된 벽암록이 나왔습니다만, 내가 선의 전문가가 될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고, 책값이 비싸기도 해서, 조오현스님이 "사족"을 붙인 벽암록을 구입했습니다.

 

 

벽암록은 100가지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해설이 있으면 조금 알듯 말듯하고, 해설이 없으면 모르는 이야기들이라고 저의 의견을 말해야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심오한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왼뺨치고, 오른뺨쳐서 어리둥절하게 만든 후 머리에 찬 물 붓는 이야기(좀더 나쁘게 말하면 「사기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9년 5월 1일 홍도>

 

 

벽암록의 몇 가지 예.

제 7칙

혜초가 법안스님에게 물었다.
혜초: "스님께 여쭈오니 무엇이 부처입니까?"
법안스님이 말했다.
법안: "네가 혜초이니라."

 

 

위 대화가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다음을 보시죠.

 

 

제 45칙
어떤 납자(=스님)가 조주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스님: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이에 대해 조주화상의 대답은 이러했다.
조주: "내가 청주(=중국에 있는 도시)에 있을 때 베적삼을 한 벌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네."

 

 

<2009년 5월 1일 홍도>

 

 

이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 천만다행이고, 몰라도 그러려니 여기면 될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네가 혜초이니라"라는 것은 "네가 부처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느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 가면, 하나의 법은 다시 만 가지 법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선(禪)에서는 척하면 알아야지 꼭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담 너머로 소의 뿔이 지나가면, 저기 소가 가는구나라고 알아야지, 가서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가 나면 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꼭 가서 불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009년 5월 1일 홍도>

 

 

제가 불교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어떤 부동산 사장님이 저에게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사 주셨습니다. 중국 사람 오경웅이 짓고 류시화씨가 번역한 책인데, 벽암록보다는 덜 어렵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역시 선은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위대한 선사들이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의 저자는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선의 본질이 "마음을 맑게 함(심재), 마음을 잊음(좌망), 그리고 아침처럼 맑음(조철)"이라는 장자의 말을 이해해야만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여튼 말이라는 것은 한정된 것이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서 화법이 생기고, 시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선에서는 "~는 ~다"라고 확정짓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노자에 나오는 첫 어구인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도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은 상도는 아니다」, 즉 이것이 도(道)다」라고 하면 그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선에 관한 수 많은 예화가 실려있는 이 책(the Golden Age of Zen)에서 한 두 가지 소개합니다.

제자 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조주가 장례행렬에 끼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 가는군."

 

 

도의 수행자들이여. 도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동에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평상시의 일들, 이를테면 옷입고 밥먹고 똥누고 오줌누며 피곤하면 잠자는 그런 일들 속에 불도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말을 듣고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구도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어떤 학파를 세운 사람)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깨달은 경지에 오른 사람)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서 최상의 자유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2009년 5월 1일 홍도>

 

 

결국 나는 중국의 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와 장자를 읽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안동림씨가 번역한 장자를 구입했습니다(사실 이런 책들은 젊었을 때 읽었어야 할 책입니다. 늦었지만 앞으로 중국의 고전을 계속 읽어 볼 생각입니다.) 끊임없는 장자의 이야기 중 공통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듯이 "무위자연(無爲自然 )" 사상입니다. 즉 인위(人爲=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를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고, 자연의 이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와 맹자가 인위적으로 "인, 의, 예"를 강조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생각컨대, 인의(仁義)란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 저 인덕을 갖춘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한가!" 정말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살면 좋을 것을, 수 많은 법칙을 만들어 놓고 따라야 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합니까?

 

 

장자의 양생주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못가의 꿩은 겨우 열 걸음 걸어가서 겨우 한 입 쪼아 먹고, 백 걸음 걸어서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새장 속에서는 먹이가 충분하여 기력은 왕성하겠지만,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장자의 인간세 편에서는 "명예와 재물이란 성인도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재물을 얻으려 하고, 쓰러지면서도 명예를 잡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보게 됩니다. 천승일 세중 나모 회장이 사람들에 밀쳐 넘어지면서 검찰청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도대체 저 노인이 저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부와 권력 명예는 성인군자도 멀리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띠쇠(=허리 띠에 다는 쇠 장식)를 훔친 자는 사형되고, 나라를 훔친자는 제후가 된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옛날에 소위 뜻을 이룬다함은 높은 벼슬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었다.그 이상 즐거움을 더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걱정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2009년 5월 1일 홍도>

 

 

노자의 도덕경도 저는 처음 읽어보는 책입니다. 서점에 가보니 누가 번역했는가에 따라 값이나 부피가 많이 다르더군요. 여기서 도덕은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과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도"는 "도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덕"은 "도의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라"는 내용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중 눈에 띄는 어구 몇 가지를 보면:

 

"가장 훌륭한 군주: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것만을 아는 군주.
두 번째로 훌륭한 군주: 백성들이 친근감을 갖는 군주.
형편없는 군주: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군주.
가장 형편없는 군주: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군주."

 

 


그렇다면 우리 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재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위의 네 분류 중 어디에 해당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큰 도가 없어지니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있게 되고, 인간에게 지혜라는 것이 생기니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사람은 땅의 법칙에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칙에 따르며, 하늘은 도의 법칙을 좇고, 도는 자연의 법칙을 좇는다. 즉, 도는 천지만물 앞서는 존재이다. 사실상 도는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억지로 도라고 이름하였으나, 단지 편의상 붙인 이름이며 일시적인 표현 수단에 불과하다.

 

 

남들은 강한 것, 있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한 것, 없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학문을 하면 날마다 할 일이 더 많아지고, 도를 하면 날마다 할 일이 줄어든다. ---정말 진리인 듯 함!!!---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계곡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강이나 바다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겸손해야 한다는 뜻---

 

 

<2009년 5월 1일 홍도>

 

 


현각스님이 쓰신 "부처를 쏴라"라는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오늘 글을 마칩니다. 숭산 스님의 말씀입니다.

 


"깨달음이란 말을 붙인 것에 불과해.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깨달음'이 존재하게 돼. 그러나 깨달음이 존재하면 깨닫지 못함도 존재하지. 그로 인해 상대적 세계가 만들어져.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 이 전부가 상대적 세계야. 이러한 세계는 순전히 생각일 뿐이야. 그러나 진리는 생각이 일어나거나 상대적 세계가 나타나기 이전의 절대적 세계야. 그렇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면 이를 취하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곧 장애가 돼 버려. 그러나 아무 것도 만들지 않으면 모든 걸 얻게 된다 이 소리야. 이해가 돼?"

 

 

<본 "제행무상"은 제 4부에서 마칩니다.>

 

(2009년 6월 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