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제행무상 4 (Everything is changing)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5. 08:25

<2009년 5월 3일 청남대>

 

 

제행무상(諸行無常) 4

 

 

저의 형제는 4남매입니다. 누님이 한 분 계시고, 형님이 두 분 계십니다. 많은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철저한 유교 또는 불교적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형의 딸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집안 망할 징조이니, 당장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온갖 협박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큰 형집 식구 전체가 교인이 되었습니다. 곧 작은 형 집 식구는 모두 천주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누님은 불교 신자입니다.  

 

 

우리 작은 집도 물론 철저한 유교적 또는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집 큰 아들(저의 사촌 동생)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큰 아들은, 동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난 끝에 연세가 90에 가까운, 지금까지 불교 사상에 젖어 있던 작은 어머니를 결국 교회에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두 명의 사촌 동생이 언제 교인이 될지, 아니면 끝까지 이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 또한 일년 뒤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을지, 또는 불교 신자가 되어있을지, 아니면 이슬람이 되어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을 지 한 치의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09년 5월 2일 흑산도>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실정인 것 같습니다.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기독교 신자를 갖게 된 것이 한국이라고 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증(xenophobia)를 갖고 있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 특히 천대를 받는 것이 한국입니다. "우리"라는 말로 뭉친 것이 한국이요, "우리 것이 좋은 것여"를 외쳐대는 것이 한국인입니다. 길거리에서 한 두 마디 영어를 하면, "뭘 잘났다고 씨부렁거리나?"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것을 그렇게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쉽게 다른 나라의 종교인 기독교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 두 달 반 동안에 "도올 인도를 만나다"라는 EBS 강좌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45분짜리 28강으로 되어 있는 이 비디오는 제목과는 관계없이 "불교 강좌"입니다. 불교의 기본 교리를 강의하고 끝 부분은 금강경을 강의 합니다. 저는 28강의 강의를 들으면서 역시 많은 것을 배웠고, 도올은 정말 아는 것도 많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올의 말에 따르면, 한국인이 이렇게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샤머니즘(=무당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삼국 시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나라 전 국토에 샤머니즘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가 들어와서 샤머니즘을 덮어 버렸지만, 여전히 저 깊은 내부에는 샤머니즘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그 뒤 조선 시대에 유교 정책을 썼지만, 지구의 내부에 화산이 훨훨 타고 있듯, 우리의 내부에는 여전히 샤머니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3월이나 4월이 되면 산악회는 시산제를 지냅니다. 시산제에 참가해 보면 돼지와 떡을 제단 위에 놓고, 기독교 신자건 불교 신자건 절을 합니다. 학교에서도 건물을 하나 지으면 떡을 해 놓고 절을 합니다. 심지어는 학교의 어떤 부서가 다른 교실로 옮기면 또 떡을 해 놓고 절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새로 산 후, 자동차 앞에 떡을 해다 놓고, 자기의 종에 불과한 자동차에 절을 하기도 합니다. 불교 신자건 기독교 신자건 결혼 때, 사주 팔자를 들먹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대학에 갈 때, 점집에 찾아가는 것도 드문 일도 아닙니다. 불교 신자도 기독교 신자도 이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불교 신자요, 기독교 신자라고 믿고 있지만, 저 밑바닥의 무의식에는 샤머니즘의 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5월 2일 흑산도>

 

무당이 신명이 나서 주술을 외우면서 춤을 추는 것, 우리가 교회 부흥회에서 볼 수 있듯이 땅을 치고 울면서 기도하는 기독교인들, 2002년 월드컵에서 기뻐 울면서 아무나 부등켜 안고 울부짖는 것이 모두 다 이 샤머니즘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위 세 현상에서 "신명나다"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정서에 맞기에 기독교가 빨리 퍼졌다는 것입니다.

 

 

<2009년 5월 2일 목포항>

 

 

지난 번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네 개의 교단에서 나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아마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이렇게 여러 교단에서 나와 자기들 방식의 장례 의식을 갖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이 영결식이 세계로 방송이 되었을 텐데, 이것을 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흔히 한국을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주를 이루지만 시골에 가면 유교를 믿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태원에 가면 이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 앉아 있으면 "도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누군가가 말을 걸어옵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도교도 있고 증산도도 대순진리교도 있습니다. 몰몬교도 있고, 여호아의 증인도 있고 통일교도 있습니다. 말하면 무엇하겠습니까만, 저의 고향인 금산에 가면 석막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워서 그곳을 두 번이나 가보았고 거기 있는 사람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습니다. 한 계곡 전체를 마치 에덴 동산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에 세워진 수 많은 비석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계곡 전체가 성전입니다. 지금은 감옥에 있는 정명석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이비라고 하건 말건, "비록 지금 정명석 목사님은 자유로운 몸이 아니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힘들게 지내시고 계시지만, 오직 주 하나님 사상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원망치 않고 계속 기도하시는 참목자이시다"라고 그곳 신도들은 말합니다.

 

 

제가 미국에 태어났다면, 저는 자연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태어났다면 자연스럽게 일본식 불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에 태어났다면 당연히 이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묻지도 않고 따질 필요도 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불교인이기도 하고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불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우리 집만 보더라도, 제사를 지내되 몇 사람은 절을 하고 어떤 사람은 묵념만 하는, 말은 안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껄끄럽게 여기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아내를 10년 동안 설득하여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한 남편이 있는가 하면, 10년 동안 남편을 설득하여 교회에 나가게 만든 아내도 있습니다. 종교가 달라 이혼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와 말 싸움 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라. 틀림없이 그대의 목적을 이루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말하지만, 자신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자신들의 종교가 이러이러해서 옳은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이러이러해서 옳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수억 명이 불교를 믿고 있고, 수억 명이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수 억 명이 이슬람 신자입니다. 몇 만 명, 몇 십만명은 바보일지 모르지만, 수십 억 명이 엉터리 종교를 믿는 것은 아마 아닐 것입니다.

 

 

<2009년 5월 3일 청남대>

 

 

영어 문법에 변형생성문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능동태인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I love you.)"와 수동태인 "당신은 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You are loved by me)"라는 것은 내면에 있는 구조(deep structure)에서는 같은 하나의 말이었으나, 이것이 밖(surface structure)으로 나오면서 두 가지로 분리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본래 하나였으나 밖으로 표출될 때는 여러 개의 모양을 갖춘 형태, 즉 여러 개의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 저 깊숙한 곳에 용암이 자리잡고 있고, 이들은 무한한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용암의 근본 성질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용암이 표면으로 한 쪽에서 솟구쳐 오른 것이 불교이고, 다른 쪽에서 분출하는 것이 기독교이며, 또 다른 쪽에서 터져 올라오는 것이 이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진리는 저 밑에서 꿈틀거리며 타고 있는 용암이지만, 사람들은 분화구에 갇혀서 그 뿌리(=큰 용암 덩어리)를 보지 못하고, 용암의 황홀함에 눈멀고 귀멀어,  "내 분화구의 용암이 진짜다, 내 분화구가 제일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뿌리와 한 줄기에서 나온 나무 가지들이, "나만이 진실한 나무 가지이고 옆에 있는 나무 가지는 사이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달 반 동안 저는 불교가 무엇인지 짧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이 불교라면 저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지리산을 한 바퀴 휙 돌아 보았습니다. 진짜 지리산의 천왕봉에 도달하려면, 차에서 내려 등산 망태를 지고 등산화를 신고 두 발로 끙끙거리며 올라가야 하듯이,  저는 더 많은 공부와 수행과 자비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향하지 않고, 저의 차를 몰고 다시 서울로 가렵니다. 그리고 평상심으로 돌아와 전과 같은 생활을 하렵니다.

 

 

결국 저는 도(道)라는 것은 "자유" 또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속박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한 속박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에게 가한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영혼적, 인습적, 사상적으로 나를 칭칭 감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뛰쳐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가능하겠지만, 나 자신을 옥졸라 매었던 모든 속박으로부터, 특히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는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곽영을, 너는 좀 더 자유로워 해."라는 말로 이 글을 끝냅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저는 결국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속박에다가 "좀 더 자유로워야 한다"는 또 하나의 속박만을 뒤집어 쓴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제행무상 시리즈 끝)

 

(2009년 6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