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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광서, 귀주, 중경, 무한 여행기 12 "무한 그리고 귀국"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3. 1. 29. 17:22

 

 

 

 

 

 

 

 

 

 

광서, 귀주, 중경, 무한 여행기 12(최종회)

"무한(武汉: 우한) 그리고 귀국"

 

 

 

 

<여행도>

 

 

<무한(武汉: 우한)이란?>

우한은 후베이 성의 성도이다. 우창, 한커우, 한양의 세 도시가 "우한"으로 통합되었다. 이들 세 도시의 통합은 1927년에 이루어졌다. 이들 세 부분은 강을 건너 마주하고 있고 다리를 통해 연결된다. 북부와 중앙은 낮고 평평하다. 면적은 8494 km2로 대부분이 평지이고 언덕과 많은 호수, 웅덩이가 산재해있다. 우한의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강수량이 풍부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다. 우한은 답답할 정도로 습한 여름 날씨로 잘 알려져 있다. 무더운 여름 날씨 때문에 우한은 난징, 충칭과 더불어 '중국 3대 화로' 라고 린다. 봄과 가을은 대체로 온화하고 겨울은 시원하고 가끔 눈이 온다. 최근 30년 동안 연평균 강수량은 1269mm였고 7월과 8월에 집중되며 연평균 기온은 15.8℃-17.5℃이다. <인터넷에서 인용>

 

 

 

 

<무한시 지도: 1927년 무창, 한구, 한양 세 곳이 합쳐서 '무한'이 되었다.>

 

 

 

 

 

 

 

2012년 12월 1일 아침 7시경 무한의 우창역에 도착하였다. 밖으로 나오는데, 만두와 빵을 팔고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무거운 짐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일단은 호텔을 찾아 나섰다.

 

 

 

 

 

 

나와보니 역의 동쪽 광장이었는데, 비교적 한가로웠다. 그런데 앞에 정차해 있던 버스에서 승객 두 명과 운전수가 갑자기 난투극을 벌렸다. 두 명의 젊은이는 버스 밖으로 도망쳐 나왔고, 운전수가 옆에 있던 몽둥이를 꺼내, 두 젊은이를 뒤 따라가, 한 젊은이의 어깨를 둬 번 후려쳤다. 나는 그때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으나, 이미 난투극의 장면은 끝난 뒤였다. 그날 알게 된 것은, 중국 버스 기사는 버스 안에 몽둥이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 여차하면 몽둥이로 내려친다는 것이었다.

 

 

역에서 나와 호텔을 찾아 약 10분간 돌아다닌 후, 한 호텔에 들어가 1박 당 200위엔 달라는 것을 깎아서 150위엔(27,000원)으로 정하고, 2박 호텔비를 지불했다. 호텔은 넓었지만, 손님이 별로 없는지 실내는 썰렁하기만 했다. 우리가 무한에 있는 기간은 딱 이틀이라는 짧은 기간이었다. 근처에서 간단히 만두와 죽을 먹고 관광에 나섰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운전수가 화를 내고 있다. 운전수는 모자 쓴 사람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가랑이 사이로 몽둥이가 조금 보인다.>

 

 

 

 

<무한 중심부>

 

 

 

 

<장춘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도교사원인 장춘관이었다. 날이 흐리고 음산해서 인지 경내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다른 도교사원과 마찬가지로 경내에 향을 태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실내가 어둡고 꿈에 보아도 무서울 것 같은 부처 비슷한 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설명을 보면 그 안에 모셔진 인물이 대단히 중요한 성인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단지 밖에서  기 수련을 하는 몇몇 젊은이가 있어서 그들을 좀 구경하다가 바로 밖으로 나왔다.

 

 

 

 

 

 


 

장춘관에서 조금 장강쪽으로 걸어가면 황학루가 나온다. 황학루는  도가(道家)의 선인(仙人)이 노란 귤껍질로 만든  학이 진짜 학이 되어 선인을 태우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가 재건되었는데, 1984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규모는 3층에서 5층으로 확장되었는데, 각 층이 2층으로 되어 있어 실제로는 10층인 셈이다. 전체 높이도 원래보다 2배 가량 높아져 51m에 이르고, 구조도 목조에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황학루>

 

 

 

 

 

 

 

 

 

 

 

 

 

 

황학루는 건물 자체도 훌륭하지만, 그 안에 수 많은 그림, 글씨, 조각품이 진열되어 있어서, 구경을 하려면 한 나절로도 모자란다. 마치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중국 관광지 중에서도 5성급 관광지이며 입장료도 다른 관광지 못지 않게 비싸다. 외국인보다는 중국인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모여들었는데, 황학루 안에서 각 층을 돌아다닐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걸려서 걷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1층 대청의 미술품:  황학을 타고 옥피리를 부는 신선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높이 9m, 너비 6m의 채색 도자기 그림. 정말 학이 하늘을 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 비는 계속 내리기 시작하여 하루 종일 내렸다. 근처 켄터키 프라이집에서 세트 메뉴를 시켰는데, 이런 곳에 자주 다니지 않아서, 종업원과 몇 분간의 힘든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서 겨우 시켜 먹을 수 있었다. 옆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시켜 먹지도 않고, 집에 가지도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 몇 번을 빙빙 돌고 돌아다녀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는 그 자리가 먹는 자리라기보다는 자신만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해혁명 박물관>

 

 

 

 

 

그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신해 혁명 기념관이었다. 마침 점심 시간이 되어서 더 이싱 입장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밖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때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외국인이냐고 했다. 그렇다고 하니까, 우리만 특별히 입장료도 받지 않고 다른 문으로 입장시켜주었다. 아마 내가 중국에 와서 외국인이어서 대우를 받는 첫 번째 사례였으리라. 

 

 

대부분의 중국의 건축물이 그렇듯 이곳도 구경할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를 보아야할지 잘 몰랐다. 안에 전시된 예술품이나 역사적인 전시물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중국인들은 손문(孙文)을 대단히 중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어기 가나 손문이 나오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또한 박물관을 돌아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인들은 과거에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한 것을 큰 수치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한 것으로 보였다. 어떤 곳에서는 일본인이 오지 못한다는 안내판이 보이기도 하고, 한글 안내판은 있어도 일본어로 된 안내판이 없는 곳도 있다.

 

 

하기야 솔직히 말해서 일본 백성이 무슨 죄가 있나? 수뇌부 몇 사람의 명령으로 자신들도 목숨을 잃은 피해자일 뿐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일반 백성이 무슨 죄가 있나? 수뇌부 몇 사람의 잘못으로 오늘날 일반 백성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힘있는 몇 사람에 의해 백성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역사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호북성 박물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호북성 박물관이다. 비는 오는데, 버스를 잘 못 타서, 우리가 탄 버스가 우리의 목적지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버스 종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 시설로 보아 엄청난 입장료를 받아야할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무료 입장을 시켰다. 오전에 다른 박물관에서 이미 많은 것을 보았기에 진열품에 대한 일종의 염증이 생겼는지, 별로 돌아다녀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책에나 써 있는 것이, 그곳에 전시된 편종을 보라는 것이었으므로, 이 악기는 꼭 보고 싶었다. 이것은 증후을(曾侯乙: 쩡허우이) 무덤에서 출퇴된 것인데, 현재 발견된 동종(銅鐘) 악기 중 가장 크고 아름답다고 한다.

 

 

과연 이 악기는 그 웅장함이며 섬세함이며 아름다움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증후을은  B.C. 477 - 433년 사람인데, 그 당시에 저런 악기를 만들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런 악기가 1978년 무덤에서 발견될 때까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

 

 

 

 

<曾侯乙(증후을: 쩡허우이) 무덤에서 출토된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편종이다.

 

 

 

 

 


 

 

호북성 박물관을 나와서 한커우에 있는 보행자 거리를 간다는 것이 또 버스를 잘 못타고 말았다. 반대편으로 가는 버스를 또 탔던 것이다. 그날은 우리 네 명 모두 귀신에 홀린 듯 했다. 종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서 보행자 거리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차는 막히고, 버스에 승차한 사람은 많고, 날은 어둡고,  밖에 비는 오고, 어느 것이나 아군편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데서나 내렸다.

 

 

어둠 속에서 지도를 본들 잘 보이지도 않았고, 방향 감각이 없어서 허둥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와 함께 가는 아주머니에게 좋은 식당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우리를 데리고 한참을 갔다. 너무 많이 걸어서, 혹시 우리를 값비싼 집으로 데려가지 않나 의심을 가졌지만, 결국 그녀가 데려다 준 집은 적절한 값을 받는 근사한 전통식 중국 음식점이었다. 잠시나마 의심을 했던 내가 미안하기도 했다.

 

 

백주(白酒) 두병을 시켰는데, 나는 이미 감기 기운으로 춥고, 머리가 아프고, 목이 부어 있어서 전혀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히고 추위를 달랬다. 종업원들은 우리가 한국 사람인 줄 알고, 한국돈을 보자고 했다. 종업원에게 1,000원짜리 한 장씩 선물했다. 배불리 먹은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곧바로 호텔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때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12월 2일은 중국 여행 마지막 날이어서, H형과 헤어져 각자가 각자의 계획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무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동호(东湖)인데, 동호의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동호 사진을 찍으러 가기로 했다. 일단 광곡 보행자 거리에 갔다가 동호를 보고, 그 주위에 있는 공원에 가서, 여행의 종지부를 찍으려고 마음 먹었다.

 

 

 

 

 

 

광곡의 보행자 거리(이 글의 앞쪽에 있는 지도 참조)는 아침부터 젊은이들로 붐볐다.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으로 상가, 식당 오락장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아이들이 실내 낚시하는 곳도 있고, 음악을 들으며 발을 맞춰 춤추는 곳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색적인 곳이 스페인 거리였다. 투우를 비롯한 스페인 복장의 마네킹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영어 학원 선전물이 사방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영어 열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멋있어 보이는 소품집에 들러 매력적인 볼펜 몇 자루 샀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모나미 제품이었다.

 

 

근처에  눈에 띄는 한국 음식 점이 두 곳이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들어간 곳이 할인 행사하는 곳이었다. 돌솥 비빔밥 2 그릇, 갈치 구이 2쪽, 김치 한 접시에 42위엔(7,560원)에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70위엔(12,600원)  한다고 한다. 그리고 무슨 복권에 당첨되어 선물도 받았다.

 

 

한국 음식점이지만 종업원들은 한국말을 몰랐다. 그런데 한 여종업원이 오더니 더듬더듬 말했다. "저는 한국말을 배우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나는 그녀가 한국말을 잘 한다고 칭찬해주고, 왜 배우는지 어떻게 배우는지 물었다. 그녀는 한국 배우들이 너무 멋이 있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고, 혼자서 인터넷을 통해서 배운다고 했다. 너무 수줍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는, 우리가 떠날 때,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면서 주방으로 사라졌다. 역시 우리말, "안녕히 가세요"와 "안녕히 계세요"는 외국인들에게 구별하기 어려운 말인가 보다.

 

 

 

 

 

 

 

 

<광곡에서 결혼 기념 촬영을 하는 여자>

 

 

 

 

<한국 식당>

 

 


 

 

 

 

 

 

 

<무한의 동호>

 

 

 

 

 

동호에 도착하여, 한참 동안 호숫물을 바라보았다. 다른 호수나 이 호수나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찌보면 경치라는 것도, 도시라는 곳도, 이곳이나 저곳이나 큰 차이가 없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김춘수 시인이 말한,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돌아와 꽃이 되었다."라는 말과 같이, 주어진 사물에 애착과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 오는 것이 아닐까?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보고 또 보다가 옆에 있는 매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매원에는 매화나무보다는 메타세콰이어와 토란과 연근이 더 많았다. 정원사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호수와 주위에 있는 나무와 꽃과 풀과 언덕이, 마치 독일이나 카나다에 온듯한 느낌을 주었다.  길 양쪽으로 쭉쭉 뻗어 있는 나무 사이로 신혼 촬영을 하는 신랑 신부들이 추위에 떨며 걸어가고 있었다.  신혼이 아닌 젊은이도 낙엽을 밟으며 사진을 찍고 웃으며 젊음을 즐기고 있었다.  

  

 

 

 

 

 

아, 나도 언제 저런 날이 있었던가? 갑자기 목이 메이는 듯 했다.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무수한 새들이 떼를 지어 이리 날고 저리 날고 있었다. 저 새들은 내일이면 귀국을 해야하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일까?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하면 조금 슬퍼지는 것은 누구나의 공통 심사일까?

 

 

11월 10일 계림에 도착한지 23일 만이다. 지난 23일간의 여행은 한 마디로 말해서 힘들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고생이었다. 지난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 커지더니, 비온 뒤 장마 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내려와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우리 네 인생이 한 번 삶이듯, 한 번 여행한 곳도 또 온다고 말은 하지만 다시 가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 아닐까? 잘 있어라, 무한!  호수도, 산도, 나무도 그리고 하늘을 나는 저 새들도 잘 있어라. 그리고 혹시 모르지만 기회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찾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 날, 즉 2012년 12월 3일 상해를 경유하여 인천 공항에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읽어주신 분, 댓글을 달아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끝>

 

 

(2013년 1월 29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