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에서 본 장강>
광서, 귀주, 중경, 무한 여행기 11 "이창(宜昌)과 은시 (恩施) 대협곡"
2012년 11월28일 오후 2시 30분, 이창의 산샤댐을 출발한 우리 버스는, 1 시간 후인 3:30분 이창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도착하기 전, 우리가 탔던 배에서 안내양이 추천하는 호텔에 1박당 120위엔(21,600원)에 이미 예약을 했기에, 이창역에 내리자마자 우리를 데려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다행히 내 이름을 종이에 써서 들고 있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를 따라 약 5분 걸어 "양자강 호텔"에 도착했다. 양자강 호텔은 양자강이나 터미널에서 가깝고, 비용도 저렴했다. 시설을 보니 방도 넓고 깨끗하여 마음에 흡족했다.
우리가 이창에 온 것은, 은시에 있는 "은시 대협곡"에 가려고 했기 때문이므로, H형과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기차역을 향해 출발했다. 종점에서 내리니 바로 옆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먼저 눈에 띄어 그곳에 갔다. 그런데 시간도 잘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금도 120위엔(21,600원)으로 비쌌다. 그래서 바로 그 옆에 있는 기차 역으로 갔다. 기차역에서 다음 날(11월 29일) 11시 은시행 기차표를 33위엔(5,940원)에 예매했다. 나는 버스비와 기차비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크게 놀랐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중국에서는 기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창 시내>
날이 어두워져 호텔에 돌아왔는데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J님이 방안의 화장실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미 방문을 안에서 잠그고 그 옆에 있는 쇠사슬 고리까지 걸어둔 상태에서,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바로 그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화장실 안에서 아무리 소리쳐봐도 복도까지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전달받고, 호텔 여종업원이 열쇠 뭉치를 들고 왔다. 그러나 안에 체인이 잠긴 상태에서 바깥 손잡이와 연결된 문을 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종업원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열 수 없다(打不开: 따부카이)"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날 그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내 죽는 날까지 "따부카이"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 나라 같으면 119를 불러서 문을 열면 되겠지만, 중국은 그런 체계가 없는 듯 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도구함을 든, 남자 종업원이 나타났다. 그는 방문 손잡이를 빼더니, 무지막지하게 문을 발로 차 버렸다. 문이 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쇠사슬이 묶인 부분과 그 주위에 있는 나무 조각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화장실 문도 무지막지하게 발로 차버렸다. 화장실도 이그러질대로 이그러지며 문이 열렸다. 그제서야 사람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밤 근처 식당에서 매운탕을 먹으면서 팔자에 없는 감옥살이 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일은 드물기는 하겠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좀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나를 구하러 올 사람이 있다는 희망 때문에 나는 버틸 수 있었습니다."라는 J님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렇다. 인간은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나에게 희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그저 식은 죽 먹고 터벅터벅 돌 길을 걷는 것처럼, 만사가 매가리가 없는 그런 생활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에 학교를 나와도 취직할 희망이 없는 학생들이 정말 너무 안됐다. 취직이 된다는 희망이 있어야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 아닌가? 사정을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은, 요즘 아이들이 왜 결혼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 하기도 한다. 몰라서 묻나? 돈이 있어야 결혼을 하지! 직장이 있어야 돈을 벌지!
어디 젊은이 뿐이겠는가? 노인도 생활비가 없고, 생활비를 벌자니 직장이 없다. 노인이 폐 휴지를 모아 팔아서 얼마나 돈을 버나? 돈이 없어 추위를 견디지 못해 얼어 죽은 독거 노인의 이야기가 가슴을 후벼 판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 많은 사람이 여전히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죽기도 한다. 정말 세상은 이해하기 힘들다.
<아침의 이창>
29일 아침 양자강변을 걸었다. 중국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공원에서는 체조나 춤을 추는 사람이 있었고, 강변에서 조깅을 하거나 걷는 사람이 자주 보였다. 양자강에서는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낚시꾼들이 낚시를 강물에 드리우고 하염없이 찌를 바라보고 있었다. 낚시꾼 몇 사람에게 고기를 잡았는지 물었지만 모두 다 빈 고기 그릇만을 가리키며 '허허' 겸연쩍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11월 29일, 11시에 이창을 출발한 기차는 오후 1:40분경 은시 기차역에 도착했다. 광장을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와 숙소 이야기를 했다. 그를 따라 갔는데, 알고보니 역 근처에 있는 리원빈관 사장이었다. 그는 자진해서 방 하나에 88위엔(15,840원)에 해주겠다고 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썩 마음에 드는 방이었다. 아마도 대도시가 아니어서 방값이 싼 듯 했다.
은시시(恩施市:언스시)는?
은시시는 후베이성(湖北省) 언스투자족먀오족자치주(恩施土家族苗族自治州: 은시토가족묘족자치주)이다. 항일전쟁 시기에 후베이성(湖北省)의 임시 성회(省会)였다. 은시역사문화주제 공원이 유명하다. 경내 추이자바진(崔家坝镇, 최가패진) 군룽바촌(滚龙坝村, 곤룡패촌)이 있다. 은시시의 면적은 3,972㎢로 대부분이 해발 900m 이상의 산지 지역이며, 인구는 79만(2007)으로 투자족(土家族, 토가족), 먀오족(苗族, 묘족), 둥족(侗族, 동족) 등 소수민족이 38%를 점유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인용>
호텔에 짐을 풀고 호텔에 있는 사람의 차를 타고 유명하다는 은시역사 문화 주제 공원으로 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호텔의 종업원과 우리를 차에 태워준 사람은 모두 호텔 사장의 친척이었다. 우리는 자동차비로 30위엔(5,400원)을 지불했다.
경내에서는 마침 공연이 있었는데, 족장을 위로하는 춤과 노래로 보였다. 리듬은 빨랐고, 율동은 활기찼다. 나중에 남자들이 나와서 큰 통에 든 엄청 마셔대는 연기를 했다. 술을 마시고는 갈 수 있어도, 등에 지고는 못 간다는 연기를 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도 끝 부분에 가서 관중들과 연예인들이 함께 마당을 돌며 춤을 추는 것으로 공연은 종료되었다.
계속 뒤쪽으로 올라가면 마을 전체가 보이고, 더욱 올라가면 성이 있어서, 걸어서 성을 한 바퀴 돌도록 되어있었다. 그날 안개가 엷게 끼어 있었는데, 멀리 보이는 자그만 산들이 그야말로 꿈에나 볼 수 있는 몽환적인 분위가였다. 넋을 놓고 한참을 구경하다가, 정상에 있는 종루에 올라 타종을 해보고 아래로 내려왔다.
그날 밤, 은시 시내를 약 한 시간 걸었다. 얼마 걷지는 않았지만 도시 자체는 특별한 도시가 아니었다. 오늘도 푸짐하게 식사를 한 후, 다시 기차역으로 갔다. 다음 날(11월 30일) 무한으로 갈 기차표를 사기 위해서다. 그런데 역전에 붙어 있는 기차 시각표를 보니 뭐가뭔지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마침 한 여학생이 도움을 주어 밤 11시 침대칸을 일인당 180위엔(32,400원)에 예약했다. 이 대학생은 아주 열성적으로 우리를 도와 주었는데, 아마 그 여대생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대생은 영어도 잘했다. 중국어는 더 잘했다!
11월 30일 6:30분 은시 대협곡 트레킹을 위해 호텔을 나섰다. 전날 호텔 사장과 대협곡 일일 투어로 일인당 190위엔(34,200원)에 예약을 했었던 것이다. 우리는 기차역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버스를 타게 되었다. 우리를 태운 차는 중간에 아침 식사 시간도 주고, 여러 호텔을 돌면서 사람들을 태우더니 8시 20분이 되어서야 은시 시내를 벗어나 은시 대협곡으로 출발했다.
버스는 주로 시골길을 달렸지만 가끔가다 작은 도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멀리 말라 버린 옥수수대를 쌓아둔 들판이 보이고, 배추밭이나 무밭도 듬성듬성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역시 늦가을임을 알 수 있었다. 무단을 한짐 지고 가는 아낙네에게서 삶의 고뇌가 보였고, 망태를 지고 방황하는 젊은이의 얼굴에서 인생의 씁쓸함이 묻어났다. 중국 어디를 가나 농촌의 생활은 억새풀같이 팍팍하게 보였으며, 말 없이 흐르는 강물과는 달리, 끈에 묶여 떠나지도 못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듯한 처량한 느낌을 받았다.
<은시 대협곡 관리소>
은시 대협곡 매표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그러나 어쩌랴, 짙은 안개로 전혀 산이 보이지 않았다. 관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비도 아니요, 눈도 아닌 바로 안개라는, 형체도 없는 훼방꾼이었다. 몇 미터 앞만 보일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이 푸념어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어떤 짐꾼은 바구니를 지고 가고 있었는데, 그 바구니 속에는 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과연 아이에게 협곡을 구경시키고 자신도 볼 수 있을지는 안개가 걷힐 것인지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날 하루 종일 안개가 끼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앞 사람의 엉덩이만 쳐다보다가 내려왔다고 말해야겠다.
산세가 험하고 산이 높아 나뭇 가지는 이미 얼어 붙어 있었고, 절벽에 만들어 놓은 바닥은 듬성듬성 얼음이 깔려 있었다. 아마 안개가 없었다면 천길만길 낭떨어지를 걷느라 오금이 절였겠지만, 비교적 편안히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바위 틈을 지나고, 거대하게 솟아 있는 희미한 바위를 본다. 가까이에 펼쳐진 작은 석림(石林)을 보면서, 여기를 다시 와야할지 말아야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금강산 구경을 갔었는데, 안개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끔가다 나타나는 장사꾼들이 풀속에 숨은 뱀처럼 스물스물 나타났다가 스물스물 사라졌다.
아이를 안고 대나무 표면에 조각을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술을 넣을 대통을 만들고 있었다. 단단히 칼을 쥔 이 여인네의 다부진 손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가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엄마 품에 매달린 채로 엄마가 조각하는 것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초리가 한 없이 애처롭고 불쌍했다. "사람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혹독한 고난을 참고 그렇게 사는 것이 참 삶인 것이다." 어머니의 무언의 말에, 아기는 원만스러운 듯 대나무 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날 밤 10시 50분 우리는 호텔을 나섰다. 은시 대협곡을 보지 못해서 섭섭하다는 생각도 벌써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호텔 사장님은 5월에 오면 구경할 것도 많고 체험할 것도 많으니 꼭 다시 한 번 오라고 신신 당부했다. 사장이 건네주는 해바라기 씨앗을 몇 개 먹다가 반드시 다음에 오겠다고 말하고 역을 향해 호텔을 나섰다.
기차 대합실에서 우리는 멍하니 우리가 타고가야할 기차의 개찰구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대합실 한 곳에 걸려있는 경찰이 붙여놓은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
아, 그래서 중국인들은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에게 음식을 먹어보라고 권유하지도 않는구나! 평소에 늘 궁금하게 여겼던 한 가지 숙제를 한 것 같아서 마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바로 그때 무한으로 가는 개찰구가 열리고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이 여행기는 다음 호에서 끝맺습니다.
(2013년 1월 2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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