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칭의 산샤 박물관 내의 그림>
광서, 귀주, 중경, 무한 여행기 9 "중경 시내, 그리고 중경에서 만주까지"
<총칭 시내 관람도>
2012년 11월 25일, 시내 관광을 하기 전에 일단 다음 날 있을 양자강 유람을 예약해야 했다. 우리는 호텔의 프론트에 이야기하여 어제 만났던 그 호객꾼을 불렀다. 그는 유인물에 나와있는 금액보다 훨씬 싸게 해 줄 터이니, 일단 여행사에 가서 이야기 하자고 했다.
채 10분이 되지 않아 그가 안내하는 여행사에 들어갔다. 약간 거만하게 보이는 직원은 내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로 여러 가지 말을 했다. 여행 코스며 요금을 이야기했던 것으로 이해했다. 양자강 유람을 하면서 이창까지 가는데 일인당 1180위엔(212,400원)인데, 850위엔(153,000원)에 해 주겠다고 말했다. 다음에 와서 예약하겠다고 이야기하니, 조금 늦게 오면 좋은 자리가 나지 않으니 지금 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800위엔에 해달라고 했다. 그는 선뜻 그러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좀더 깎아 달라고 할 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결국 우리는 800위엔(144,000원)에 2박 3일 장강 유람 예약을 끝냈다.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에 의하면 웬만하면 70만원, 싼 것이 40만원, 비싼 것은 몇 백만원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돈이 들어서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우리가 계약한 내용은 배삯과 3 곳의 입장료, 이창까지의 버스비였다. 선택관광지인, 백제성, 그리고 소협곡 관람은 각자가 부담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 날, 호텔 직원에게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좀 비싸게 예약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기분이 나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텔측에 예약을 의뢰했다면 호텔에서도 몇 퍼센트의 중개료를 떼었을테니 결국은 그게 그거다라는 생각으로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혹시 장강 유람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여기에 적힌 금액을 참고하여 계약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장강 유람을 예약한 여행사>
<해방비로 가는 길>
장강 유람 예약을 마치고 처음으로 간 곳이 해방비가 있는 총칭의 중심가였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사람들은 해방비와 그 근처에 있는 백화점 그리고 음식점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특별히 구경할 것은 없었기에 음식점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우선 중경 한국 임시 정부에 가기로 했다. 해방비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 아주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 있었기에 몇 번이나 사람들에게 물어야 했다.
<해방비 광장>
<중경 임시 정부 가는 길>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은 주택가에 위치한 회색 건물이었다. 바로 옆에 있어도 찾기 힘들 정도로 한적했다. 마침 우리 4명이 갔을 때는 아무런 관람객이 없었다. 젊은 직원 두 명이 안내소에 있다가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 후에 나이가 지긋한 중국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우리를 안내했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한국임시정부는 처음에 상해에 세워졌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중국이 패전함에 따라 임시 정부도 장사, 광주 등으로 계속 옮기게 된다. 결국 여기 중경에서 1945년 해방을 맞는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유인물에서>
건물 내부는 그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와 사무소였으며, 내부에는 그 당시에 사용했던 물품과 그림들이 놓여져 있었다. 거기에서 근무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우리를 방마다 들어가 보게 하시고, 녹차를 따라 주셨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따뜻한 마음씨만은 이심전심으로 느껴졌다.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김구선생의 육성을 직접 들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어떻게 촬영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김구선생의 목소리는 힘있고 우렁차게 잘 전달되고 있었다.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면서 끝까지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편에 붙어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산 사람도 있다. 무엇이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되도록 작용하는지 몰라도, 사람의 목숨은 하나인데, 어떻게 살다가 가는 것이 정말 보람있는 일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중경 임시 정부에서 상영되는 김구선생의 생전 육성>
"그러면 최후로 할 말씀은 무엇인고 허니, 여러분! 앞으로 우리가 이제 말한 거와 같이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고, 우리 전 민족이 나가는 길에 어떠한 나라나 어떠한 민족이나가 우리의 앞길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우리의 조상 나라를 위해서 조금도 애끼지 말고, 우리의 몸에 있는 피 근량대로 전부를 다 쏟아 바쳐야 됩니다." <김구 선생 연설 중에서>
<현장 녹음: 임시정부청사에서 녹음한 김구선생 육성 녹음: 여기를 클릭하세요.>
나는 이번에 중경 여행을 다녀와서 백범일지를 읽어 보았다.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백범선생의 말씀을 듣고, 역시 김구선생은 위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정말로 대한민국이 흥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더럽게 망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저 아래 명치 끝에서 치밀어 올랐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백범 일지에서.>
<임시 정부 건물 내>
<임시 정부에서 근무하는 중국인>
<중경시인민대예당>
다음으로 간 곳이 인민 대예당인데, 일종의 회의장이라고 한다. 너무 규모가 커서 의아하기까지 한데, 무슨 회의를 저런 곳에서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 앞 마당에서는 무슨 축하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중국인들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이상한 춤을 추고 있었다.
<인민대예당>
우리가 보려고 했던 곳은 산샤박물관이었다. 산샤땜이 만들어진 배경과 그곳에 묻힌 수많은 유물, 그로 인해 생긴 새로운 관광지 등을 설명하거나 진열해 놓은 어마어마한 대리석 건축물인데, 자세히 보려면 하루를 보아도 모자랄 것 같았다. 다리가 아파 몇 차례 쉬고 또 보고 하다가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장강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산샤 박물관 내의 사진>
<산샤 박물관 내의 사진>
<산샤 박물관 내의 사진>
<산샤 박물관 내의 사진>
장강을 건너는 케이블카 옆에 큰 다리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그 다리가 완공되면 이 케이블카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고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설이 낙후되고, 이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좀 불결하고 안전하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무엇이든지 끝나가는 판국은 다 그렇게 시시하게 관리되다가 막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한 젊은이가 비닐 봉다리에다가 수십 마리의 오리를 운반하고 있었다. 숨을 쉬게 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는데, 그 뚫여진 구멍사이로 오리가 자꾸 머리를 들고 나왔다. 오리가 나온 그 구멍으로 다시 오리를 집어 넣었는데, 그 오리는 바로 그 자리로 다시 나오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닐 봉지의 구멍은 점점 찢어지지, 오리는 자꾸 밖으로 나오지, 오줌 똥을 가리지 못하는 젊은이가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중경 시내에 붙여진 광고 포스터. 공연 중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우리가 묵은 13층 호텔에서 바라본 유치원. 아이들이 아침 체조를 하고 있다.>
다음 날 즉 11월 26일 오후 2시에 출발할 배를 타기 위해 우리는 예약한 여행사로 갔다. 안내원은 우리를 데리고 조천문 광장쪽으로 갔다. 짐은 무거운데 이리저리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것이 기분은 나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끙끙 거리며 안내자를 따라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버스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목에 명찰을 차고 대기하고 있었다. 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다시 가나보다, 라고 생각하고 기다리니 드디어 버스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 가던 버스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갔다. 어, 어, 계속 가네, 어디로 가는겨? 배는 안 타는 겨? 부두와는 관계없는 곳으로 버스는 계속 달렸다. 30분이 지나서 나는 옆에 있는 중국인에게 왜 부두로 가지 않는지 물었다. 그는 이 배가 만주(万州:완조우)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는 것이라고 했다. 만주는 일제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피난 간 곳인데, 총칭에 무슨 만주가 있는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갑자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사기를 당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방에 넣어둔 계약서를 꺼내서 사전을 찾아가면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우리가 예약한 것은 만주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에서 2박 3일 여행하는 상품이었던 것이다. 나는 옆 사람에게 왜 중경에서 배가 출발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는 중경에서 만주까지는 별로 볼 것이 없어서, 중요한 것만 보기 위해 만주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참 기가 막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 무슨 여행을 한다고 다니는지 내가 나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역시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생소한 곳에 여행을 하면 항상 오해와 착오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또다시 계약서를 읽고 또 읽었다.
<여행사에서 받은 계약 내용>
중경을 출발한지 4시간 후인 6시 반, 해는 져서 어두운데,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버스는 만주에 도착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도시의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물위의 도시라고나할까, 밤의 도시라고나 할까, 만주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중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도 있었구나. 물도 불빛을 받아 오색 빛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 멀리 "일품 강(一品江)"이라는 불빛이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의 눈에 비친 불빛처럼 그렇게, 내 눈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만주에서 본 양자강에 일품강이라는 불빛이 화려하다>
(2013년 1월 2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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