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4일 11시,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첸나이를 가기 위해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비에 있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스마트폰을 꺼내놓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가 서울의 지하철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없는 2-3명은 "아이구 나도 스마트폰 사야겠어. 나는 외계인이여!"라고 말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예약한 전용 버스가 도착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14인승 소형 버스가 온 것이 아닌가? 복만씨는, 우리 일행이 14명이고 짐이 많으니 충분히 큰 버스를 가져오라고 말했는데도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하여 매우 화가 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인도에 별 호감을 갖고 있지 못한 판에 또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아마 어이가 없었나보다.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했던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것을, 나까지 소리를 버럭 질러대고 말았다. "We are 14 people, you know?" 이런 일에 껴들라고 영어를 배운 것이 아닌데, 나는 곧 나의 행동을 반성하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로 했다.
모든 비난을 한 몸에 받던 버스 기사는 태연하게 엄청난 짐을 버스 뒤에 싣기 시작했다. 버스 뒷칸을 가득 채우고 나더니 버스 위로 올라가 짐을 올리라는 제스쳐를 했다. 어떻든 짐은 깔끔하게 처리되었다. 짐은 그렇다 치고, 운전수 포함 15명이니, 좌석이 없는 한 사람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지켜보기로 했다. 버스 기사는 호텔로 들어가더니 식당에 있는 의자를 꺼내 들고 나왔다. 버스 앞쪽 중앙 통로에 턱 끼워 넣고, 사람들을 보면서, "OK?" 라는 말 한마디로 "상황 끝"이 되고 말았다.
점심 때가 좀 지나서 우리의 첫 목적지인 마하발리푸람에 도착했다. '덥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해서 이제는 '덥다'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입장료가 250루피(4500원)나 되니 너무 비싸다고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사람은 입장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밖에서 대충 보았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전에 다른 곳에서 사용했던 입장표를 보여주니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도에 가서는 한번 받은 표를 잘 간직했다가 다른 곳에 가서 그 표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여기 유물은 본래 자연상태의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이 특징이었다. 저런 거대한 유물을 깎아서 조각하려면 원석(原石)이 얼마나 커야할지 감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더위에 이골이 난 인도인들은 수 없이 사진을 찍고, 기념물에 올라가고, 바위 속에 들어가고, 바위 틈에 낀채로 사진을 찍으면서 즐기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더위를 참을 수 없어 대충 찍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는 정원의 나무 밑에서 콜라와 비스켓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그때 어떤 인도인이 자기 허벅지만한 몽둥이를 들고 도망가는 개를 쫓아가더니 무지막지하게 던졌다. 맞았는지 어땠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깨갱대는 개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 하였다.
구경을 마치고 첸나이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몇 미터 가자, 정말로 꼭 보아야할 장소가 그제서야 나타났다. 인도 여행책에 자주 나오는 둥글고 큰 바위, 울산 바위 근처의 흔들바위와 같은 바위가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곳보다는 오히려 이곳에 볼 것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바위 위에서 썰매를 타는 사람,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사람, 할 일 없이 걷는 사람, 뽕갈 축제 휴일을을 맞아서 인도인의 절반은 쏟아져 나온 듯이 보였다.
그 와중에 어떤 자동차가 좁은 길을 역주행하여 오고 있었다. 오는 차나 가는 차가 꼼짝달싹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버스 기사가 보통 기사더냐? 14명 정원인 버스에 짐과 15명을 싣고 가는 기막힌 기사가 아니더냐? 야, 그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데 간이 올마졸마하여 눈을 뜨고 차마 볼 수 없었다. 잠시 박수 소리에 눈을 떠보니, 우리 버스가 "악어의 입", "절망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온 것이 아닌가? "깻잎 한 장 차이로 패스!" 누군가 외쳐대는 소리에 박수와 환호성이 곁들여 버스가 날아가는 듯 하였다.
첸나이로 가는 도중 우측으로 빠지는 작은 길이 많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한적한 어촌 마을이 나올 것이다. 일정이 촉박하여서 그렇지, 개인 여행이라면 조금 가다가 샛길로 들어가서 상황에 따라 하루 이틀 더 묵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죽기 전에 언젠가 그런 일을 꼭 해보리라고 마음을 다졌다.
첸나이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 우리가 첸나이를 구경할 수 있는 것은 해가 지기 전 2-3시간밖에 없었다. 다음 날 새벽에 스리랑카의 콜롬보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상의를 하여 뚝뚝이를 타고 마리나 해수욕장에 가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된다면 해변 근처에 있는 마드라스 대학도 가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변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마두라스 대학을 멀리 보면서 백사장으로 향했다. 여기 마리나 해변도 뽕갈 휴일을 맞아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행수욕장에는 장사꾼이 널려있었고, 가끔 말을 타거나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화장실은 드물고 돈까지 받아서인지, 사람들은 화장실을 피해 실례를 했다. 이들은 훈련이 끝나고 단체로 앞산을 향해 일발 발사하는 예비군처럼 중구난방으로 "이 강산 낙화 유수"를 감행하였다. .
수영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이들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훨씬 더 많았다. 바닷가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고, 뚝방에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집채처럼 밀려오는 파도와 대판 싸움이라도 벌릴듯할 기세였다. 물속에 들어가는 여자들은 별로 없었는데, 어떤 여자들은 평소의 복장을 그대로 착용하고, 마치 용왕님께 제사 지내려는 심청이처럼 조심조심 물속을 거닐었다.
해수욕장에서 밖으로 걸어 나오는데, 해변 한 구석에서 밧줄이 양쪽 버팀목에 묶여 있었다. 여기가 밧줄 타는 곳이었다. 어린 소녀는 깡통을 들고 구경꾼으로부터 동전을 받고 있었다. 동전을 받은 후에 다시 줄에 올라가 묘기를 부리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미있어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하면서 침을 삼키며 아이가 줄에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도 이 소녀의 줄타기가 궁금한 듯, 담벼락 위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이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둥실둥실 북을 치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이 아이는, 원숭이처럼 나무에 올라가 관중을 한바퀴 쓱 훑어보더니 검은 선글래스를 턱 꼈다. 이 아이는 자기 몸무게 만큼이나 무거워 보이고, 자기 키의 두 배나 됨직한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막대기는 너무 무거워 들지 못하는지 목에 건 목거리에 묶여 있었다.
아이는 한발짝 한발짝 걸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뒤로 쑥 앞으로, 앞으로 뒤로 쑥 앞으로, 리듬을 타며 아이는 줄을 타며 걸어갔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어머니로부터 동그라미를 받아들고 동그라미를 타기 시작했다. 동그라미도 한번에 쑥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약간 뒤로 그리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둥더쿵 둥더쿵 북을 쳤고, 아이는 이에 맞춰 줄 위에서 목숨건 사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나와 걷어 놓은 돈통을 살피고 정리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성이 난 듯이 더욱 세게 북을 때려댔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부어 모래 위에 처절한 굿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북을 두드리는 어머니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화가난 듯 했고, 아이는 신중하다 못해 겁이 난 듯 했다. 검은 안경을 끼고 긴 장대를 허리에 맨 이 아이가,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허공에서 덩더쿵 춤을 출 때,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성은 백사장을 타고 흘러넘쳐 하늘로 솟구쳤다.
이런 환호성에 속에서도 어머니와 아이의 머리 속에는 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돈을 자기에게 던져 줄까라는 생각에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훈련받은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는 것은 그 재주를 부리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재주 뒤에 자기에게 제공되는 음식을 받아 먹기 위해서 이거나, 아니면 주인으로부터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저 아이도 어머니로부터 꾸지람을 듣지 않기 위해서, 아니 공연이 끝난 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 준다는 어머니의 말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현재 소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화 선수의 500미터 우승 장면을 감명깊게 보았다. 빙상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전직 씨름선수인 강호동씨까지 TV에 나와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선동적인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상화 선수의 어머니 말이 또한 다른 방송을 타고 방영되고 있었다. "'상화의 하지정맥류가 종아리에 있었는데 허벅지까지 올라갔대요.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시합 끝나면 꼭 수술하자'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말하자면 영광이라는 금빛 물결 아래 선수 자신의 몸은 멍들고 썩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피나는 눈물과 고통을 겪은 뒤에 성공한 사람을 따라서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는 쪽으로 아이를 몰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못해도 된다. 박지성이나 류현진을 보아라. 축구나 야구 하나만 잘 해도 잘 먹고 살지 않느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가? 박지성이나 류현진은 대한민국 전국민 중에서 제일 축구나 야구를 잘 하는 몇 사람 안에 속한다. 나같은 보통 사람이 박지성을 목표로 해서 노력한들 과연 몇 사람이 제2의 박지성이나 류현진이 되겠는가?
우리는 통계를 믿어야 한다. 주마다 복권을 사서 당첨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남산에서 돌 던져 내가 맞을 확률보다도 적다. 이상화나 김연아 선수처럼 될 확률은 4천만분의 1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공부 잘 하는 축에 들 확률은 30% 정도의 확률이다. 특별한 재주가 없는 사람은 그래도 학교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그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해도, 생각만 조금 달리해서 어떤 일을 하면, 예를 들어 식당을 하더라도 남과 조금 다르게 하면, 적지 않은 돈을 벌어 별 걱정 없이 인생을 살 수도 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 하지 못 했어도 훗날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삶속에서 남과 다른 경험을 쌓고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실현성이 있는 방법이다.
영어에 plain living, high thinking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David E. Shi라는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이다. "평범한 삶속에서 고상한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정말 고상하게 들리고,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고상한 생각이 뭐가 그리 필요한가? 우리 인생이 뭐 그리 고상하던가? 그저 평범한 생각, 평범한 삶이면 족하다.
우리는 평범한 삶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독특한 삶이란 무턱대고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독특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인도 이야기를 끝맺음할 시간이 다가온다. 벌써 인도를 세 번이나 다녀왔다. 덥고 더렵고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다시는 인도에 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서한다. 그러나 이 순간 다시 인도에 또 가볼까하는 생각이 꿈틀거린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무릎에 상처가 나서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힘든 하루의 여행 후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가져다 주는 만족감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그 다음으로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어떤 곳은 제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물수제비처럼 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 날씨가 너무 더워 한낮에는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100미터 앞에다 두고 돌아서듯, 아무리 좋은 관광지라도 곁에 가서도 보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역시 마두라이의 뛰어난 사원이었으며, 깐야꾸마리의 3 대양이 합쳐지는 곳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함피의 수 많은 돌도 아직도 뇌리에서 맴돌고 있다. 물 한방울이면 보잘 것이 없지만, 이 한방울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면 절경을 이루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함피의 수 많은 돌은 한마디로 "아름다운 교향악"을 연주하며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이제 여행 전의 생활로 돌아가야겠다. 아직도 스리랑카에서 걸렸던 감기가 낫지 않고 밤마다 기침이 찾아온다. 기침이 잦아들면, 등산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려보고, 친구를 만나 막걸리도 한잔 해야겠다. 밤을 새워가며 소치 동계 올림픽도 보고, 중국어 공부도 다시 시작할까보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 다음 여행에 대한 궁리도 해야겠다. 목적지도 없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끝에 다다르기 전에, 아직도 가봐야 할 곳이 너무 많다. 삭풍이 불고 나의 강이 얼기 전에 새로운 목적지로 향하는 배를 띄울 준비를 해야겠다.
*우리는 다음날 즉 2014년 1월 15일 첸나이를 떠나 스리랑카의 콜롬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뭄바이에 도착한지 14일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