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블랑카입니다. 며칠 전에 회식했어요. 고기 먹으러 갔어요. 저 너무 좋아서 고기 먹으려고 했더니 사장님 "흠 흠"합니다. 또 저 고기 먹으려고 하면 사장님 "흠 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사장님 고기 먹으려고 할 때 "흠 흠"했더니 사장님 불판을 던졌어요.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스리랑카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오래 전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위에 언급한 개그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스리랑카가 적도 근처에 위치해 있으니 아주 더울 것이라는 것,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타밀족과의 마찰로 스리랑카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마음이 선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설령 선하지 않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인도인들보다는 대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또한 "아리 아리, 스리 스리, 아라리요"라는 한국 노래와, "스리 랑카"의 "스리"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았고, 혹시나 전생에 그들과 우리가 무슨 인연으로 맺어진 같은 동포가 아닌가 하는 중뿔난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었다.
2014년 1월 15일 새벽별을 보면서 인도의 첸나이 호텔을 떠났으나 비행기의 수속이 뭐가 그리 복잡한지 7:00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비행기는 첸나이 공항을 이륙했다. 비행기 창밖을 보니 날은 이미 밝아서 푸른 하늘과 구름이 인디안 에어라인 항공기 아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솜털 구름이 참으로 편하게 느껴졌고,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뛰어나가 솜털 위에 누워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을 청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8:00시경에 콜롬보 공항에 도착하니 공항에는 세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가이드, 한 사람은 버스 운전수,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짐꾼이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샤즐리"라는 이름의 가이드는 능숙한, 그렇지만 조금은 이상한 영어로 자신을 소개하더니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우릭 묻는 어떤 질문이든지 능숙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면서, 불룩하게 나온 그의 뱃속에는 능구렁이가 들어 있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이 세 사람은 철저히 분업을 하는 것 같았다. 가이드는 입만 나불거렸고, 운전수는 운전대만 굴렸고, 한쪽 팔이 좀 불편한 짐꾼은 숨을 색색 쉬면서 우리의 배낭을 운반했다.
9:00시에 공항을 출발한 우리의 전용버스는 비교적 한산한 시골길을 따라서 콜롬보 시내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기억에 있는 한, 거의 한 시간 버스가 달리는 동안 길 양쪽으로 끊임없이 가게나 민가가 있었다. 넓은 땅덩어리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소음과 먼지를 뒤집어 써가면서 길거리에 집을 짓고 복닥거리면서 사는지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에 접어들자 역시 수도이어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수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크고 웅장한 건물이 눈에 보였다. 왼쪽으로 큰 건물이 도열하고 있는 반면, 오른쪽으로는 건물, 잔디밭, 그리고 파란 바다가 듬성듬성 보였다. 차도는 출근하는 사람들이 탄 자동차로 혼잡했으나, 인도(人道)나 간간히 보이는 골목은, 그저 한산하기만 했다.
<우리가 묵은 호텔>
우리가 도착한 곳은 Supun Residency라는 아파트 단지였다. 이 아파트 몇 동을 빌려서 호텔로 사용하는 듯 했다. 우리는 50평 정도 되는 아파트 세채를 빌려서 6명, 6명, 2명이 각각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실내로 들어가니 침실이 세 개가 있었고, 거실과 부엌 그리고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었다. 거리에 접해 있는 창밖으로는 콜롬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으며, 반대 쪽으로는 비교적 낮은 건물이 들쭉날쭉 솟아 있었고, 그 너머로 멀리 바다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여기가 흡사 이란의 카스피해와 인접한 찰루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찰루스의 콘도에서 비를 맞아가며 장을 보아다가 끓이고 볶고 지져서 허리띠를 풀러 놓고 먹었던 생각이 꿈틀거리며 올라왔던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방마다 스스로 메뉴를 결정하고 스스로 요리해 먹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오랜만에 돼지고기 삼겹살을 먹자고 하였고, 만약 삼겹살이 없으면 돼지고기 찌개라도 먹자고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잠시 후 돼지 고기를 사러 나갔던 복만씨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들어왔다. 스리랑카에서는 보름날은 돼지 고기를 팔지 않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하필이면 15일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돈이 없어서 그렇지, 돈이 있는데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나? 회교국가도 아닌 스리랑카에서 돼지고기도 못 먹어 본다면 그것은 불굴의 한국인이 아닌 것여!" 누군가가 사자처럼 하늘에 대고 포효하는 매서운 한 마디에, 마음을 굳게 먹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우리 방 전원 여섯명이 고래잡이 아닌 돼지고기 사냥을 나갔다.
<호텔의 식당>
<호텔 옥상에 있는 수영장>
일단 지나가는 뚝뚝이 운전사를 잡고 사실 이야기를 하니, 좀 멀기는 하나 돼지 고기를 파는 집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 우리는 두 차에 나눠어 타고 비오는 콜롬보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콜롬보 시내 양쪽으로 낮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왔다 몰려가고 비가 뿌렸다 멈추었다를 반복했다. 신기하게도, 희미하게 저 멀리 무지개가 순간적으로 나타나더니 또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텔에서 바라 본 콜롬보 시내: 비가 온 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좀 큰 수퍼마켓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다른 곳에서는 안 팔아도 거기에서는 돼지고기를 판다고 해서 온 것이다. 뚝뚝이 운전사는 거만하고 당당하게 별을 단 장군처럼 고개를 쳐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나온 그는 "살 수 없었다"라는 말을 하면서 들어갈 때와는 대조적으로 쥐구멍이라도 들어갈 것처럼 미안해 하면서 머리를 득득 긁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서 다시 들어가서 스리랑카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고, 한국인이 먹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사정사정 하였다. 그래도 정육점 아저씨는 철두철미하게 군대정신이 깃든 이등병처럼 절대로 팔 수 없다고 벅벅 우겼다.
밖으로 나왔다가 한참을 기다린 후 우리는 또 다시 들어갔다. 복만씨를 비롯한 몇 사람의 설득과, 비겁할 정도의 아첨, 때로는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의 위협적인 언사 덕분인지, 정육점 아저씨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정유점 아저씨는 종이로 돌돌 말고, 그 위에 비닐로 소중하게 감싼 5만원어치의 돼지 고기를, "쓰리꾼"처럼 스리슬적 우리의 손에 넘겨 주었다.
아,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친구와 친구의 애인 그리고 나 셋이 술을 먹다가,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에 그 친구의 애인을 빼앗아 도망치듯, 그런 스릴감과 급박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민첩하고도 은밀하게 비오는 콜롬보 거리로 뛰쳐나왔다. 또다시 뚝뚝이를 타고 돌아 오면서, 이것은 정녕 형사 콜롬보가 콜롬보 핸드백에 돼지고기를 넣고 콜롬보 길거리를 달리는 것보다 더 짜릿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1월 16일 새벽 콜롬보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날밤 오랜만에 노릇노릇 하게 구워진 돼지고기가, 배추쌈위에 올려져 마늘과 양파와 함께 사람들의 입을 통해 썰물처럼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맥주와 함께 목을 지나고 식도를 지나 위를 통과하고 허파를 지나 콩팥 이자까지 관통하여 온몸을 꿰뚫고 훑고 관통하여 지나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날도 몸에 난 상처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굳바이 하면서 내미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바라보듯, 멀리서 그저 바라볼 도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비극 또는 참극이라고 부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날 밤 늦게까지 , 나는 H형으로부터 사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가 중요하다. 화면 속에 이것저것 사정없이 넣을 것이 아니라, 무엇을 빼서 단순화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초보자는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고 하지만, 고수들은 화면을 단순화시켜 핵심을 보여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전봇대에 부딪힌 듯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지금까지 찍은 사진은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사진었지, 뺄려는 생각을 게을리 한 사진이었다. 말은 많되 핵심이 없는 글이 있고, 말은 적지만 말 속에 뼈가 들어가 있는 말도 있다. 이 한 마디의 말은 내가 앞으로 사진을 찍을 때, 꼭 명심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H형의 사진학 강의는 이어졌다. 사진 속에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사진 한 짱을 삐죽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인도의 어떤 골목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이 칼을 갈고 있었어요. 칼을 갈고 있는 그 사람을 한참 바라보니 그가 일을 하는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어요.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개피 권하고 우리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어요. 두꺼운 돋보기를 코에까지 내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깊은 인간애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사진을 찍었어요." 예컨대 이런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싣는다면 그 사진이 살아 움직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많은 생각을 하면서 뒤척거렸다. 소중한 진리가 나를 흥분시켜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1월 16일 찍은 사진: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를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사진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콜롬보 시내>
<콜롬보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1월은 콜롬보의 날씨로 친다면 일년 중 가장 시원한 때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더워서 구경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시원한 나무 밑이나 호텔의 커피 숍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쥬스를 마시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 같았다. 아예 몇 발자국 걸음 옮겨 놓는 것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사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멋있는 곳을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금강산이 아니라 금강산 할아버지를 찾아가더라도, 코빼기도 보기 싫은 사람과 가면 뭐가 그리 좋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곳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간들, 더워 죽거나 얼어 죽을 만큼 혹독한 계절에 간다면 뭐가 그리 즐거울 것인가? 곰곰히 생각해봐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여행은 돌아다니기 가장 좋은 계절에 다녀야 한다. 괜히 돈 버리고, 수고하고서도 구경다운 구경 못하고 생고생만 하다 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