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여행기 3 "담불라/시기리야" 1
<아누라다푸라에서 담불라/시기리야로 이동>
<시기리야 가는길: 구글 지도 사용>
2014년 1월 17일 오후, 아누라다푸라에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인 시기리야로 출발했다. 시기리야로 가는 길은 처음에는 시골 동네를 가는 듯 하다가, 듬성듬성 호수가 나타나는 들판을 달렸다. 좋은 경치가 나타날 때마다 차를 세워달라고 했지만, 막상 버스를 세운 곳은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를 항상 지난 곳이었다.
내가 자가용을 몰고 가지 않는 한, 내가 원하는 곳에 차를 세우는 것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내 마음대로 하려면 나 혼자 다녀야 하고, 내 마음대로 살려면 결혼도 하지 말고 독신으로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
시기리야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나무 숲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호텔 로비에 놓인 의자에 비쳐 흥미로운 디자인을 만들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나에게 배당된 1층 방으로 들어갔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습기가 많아 침대며 수건이 축축했다. 얼마나 습기가 많은지 이날 저녁에 빨래해서 널어 놓은 옷이, 다음날 보니 전날보다 오히려 더 축축해져 있었다. |
<숙박한 곳. 시기리야 홀리데이 인. 1층에 숙박했다>
18일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어제 우리가 꺾어 들어온 3거리로 사진 촬영을 나갔다. 그러나 삼거리에 가봐도 시기리야를 상징하는 사자발(lion's foot) 이 들어가 있는 광고판 이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었다. 별 생각없이 투덜거리면서 걸어오다가, 한 골목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집 개가 짖기 시작하더니 다른 집 개가 짖기 시작했다. 돌을 던져 조용히 시킬까도 생각했으나 결국은 포기하고 다시 큰 길로 나왔다.
큰 길을 걷는데,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포옹을 하더니 남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로 가고 여자는 집으로 들어갔다. 창살로 된 대문 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니, 금방 안으로 들어간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아직도 어두움이 남아 있는 꼭두 새벽에 남의 집에, 더군다나 여자가 오라고 하여 들어가는 것이 과연 잘 하는 짓인지 어쩐지 판단이 서지 않아 한잠 망설였다. 계속 들어오라는 여인의 손짓을 따라, 뭔가 불안했지만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
아주머니는 나보다 앞서 가면서 큰 소리를 질러 집안의 아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그 집의 작은 아이는 종이 뭉치를 부스럭거리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선머슴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 했다.
어머니는 다른 방에 가서 또 큰 아이를 깨웠다. 20대로 보이는 큰 아이는 하품을 하면서, 웃옷을 입으면서, 눈을 비비면서, 문을 닫으면서, 거실 바닥에 놓인 빗자루를 발로 차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어떨결에 밖으로 나왔다.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하더니 어머니가 부엌으로 가 홍차를 내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이 모든 것이 어머니 때문에 생긴 일이니,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위로 했다.
큰 아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니, 방금 밖으로 나간 사람은 아버지였으며 경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큰 아들은 담불라에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자가기 아이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유인물을 보여주며,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자랑스러워 하는 듯이 보였다. 그가 보여준 유인물은 컴퓨터 시험 문제인 듯이 보였는데, 첫 문제는 "다음 중 입력장치가 아닌 것은? 1) 키보도, 2) 마우스, 3) 스캐너, 4) 프린터" 뭐 이런 것들이었다.
|
<어머니와 두 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청년은 자기의 facebook을 열어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여러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도 나의 스마트폰에서 facebook을 열어 저장되어 있는 몇 장의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한국에 있으면 facebook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해외에 나가면 그들은 항상 나의 facebook의 아이디를 묻기에 작년부터 만들어서 명함에 써가지고 다닌다. 해외에서 친구를 사귀려면 facebook 계정을 갖고 있는 것이 아마도 필수 사항인 것 같다.
약 30분간 큰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머니와 아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나타난 듯 팔장을 끼고 우리 주위를 빙빙 돌았다. 어머니는 작은 아들에게도 "너도 영어를 해보라"라고 말했지만, 작은 아들은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우리 주위만 맴돌았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 많은 상패며 상장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냉장고 텔레비전 등을 비롯하여 집안에 있어야 할 것은 모두 갖춰진 집으로 보였다. 자기들은 상류층에 속하며 이런 삶을 사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아들은 말했다.
작별을 하고 나오면서 왜 나를 들어오라고 했느지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스리랑카의 어떤 집에서는 외국인이 자기 집에 와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 했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여기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나, 터키, 이란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마 외국인에 대한 호감이 이런 식으로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곳에서 나와 조금 걷는데, 길옆에 두 아주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채소를 팔고 있었다. 두 아주머니는 사진을 찍기 전에 웃고, 찍은 후에 웃고, 그저 웃는게 일이었다. 가게 안에는 검댕이로 덮여있는 주전자에 물이 끓고 있었고, 그 옆에는 뜨거운 물을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컵이 뜨거운 물에 녹아 곰보처럼 여기저기 들어가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가지나, 토마토, 오이 강낭콩 등 무엇이나 한 가지 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요리를 할 일이 없어, 그냥 돌아서야 했다.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되지만, 조금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
아침 일찍 시기리야 바위 구경을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약 15분,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관광객이 와 있었다. 어떤 사람은 도자기 만드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날은 점점 더워져 가고 있었으나 호기심에 가득찬 젊은이들의 표정은 그저 밝고 설레임으로 가득 찬 듯이 보였다. 입장료는 30불(34,000원), 아마 스리랑카에서 가장 비싼 입장료일 것이다. |
시기리야란?
시기리야는 "사자의 바위"란 뜻이다. 스리랑카 중부의 정글에 수직의 요새처럼 우뚝 솟은 화강암 덩어리가 바로 시기리야이다. 화산의 폭발로 생성된 이 바위 언덕의 높이는 370m로, 네 면이 다 깎아지른 듯한 수직이다. 꼭대기 부분의 평평한 표면 넓이는 1.4헥타르에 이른다. 이곳은 세계의 8대 불가사의라고 한다. 주변의 울창한 삼림 한가운데 솟아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기리야는 주위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드넓은 스리랑카 평원 저 멀리에서도 잘 보이는 지형물이다.
5세기 말, 아버지를 산 채로 묻어버리고 왕위를 찬탈한 피해망상증의 왕이 있었다. 그는 형제까지 죽이려 했지만 실패하자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해 시기리야에 몸을 숨겼다. 그는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새로운 바위 성의 아랫부분을 깎아 사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 성을 찾는 사람들은 백수의 왕인 사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대 도시는 지금은 폐허가 되었고, 복잡하게 연결된 좁은 계단과 거대한 갤러리들과 1,000년도 더 전에 그려졌다고 하는 벽화만이 남아 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필자가 편집> |
<바위가 움푹움푹 파인 것은, 바위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한 받침 구멍이다. 그냥 바위에 기둥을 세우면 미끄러지겠지만, 이렇게 구멍을 파 놓고 그곳에 기둥을 세우면 기둥이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다.>
<두 중국인 여인과 스리랑카 젊은이>
한참을 올라가는데 어디서 중국말 소리가 들렸다. 스리랑카 젊은이가 가이드를 할터이니 조금만 가이드비로 달라는 것이었다. 모른 척하고 가면 될 것을 중국어를 배운 것이 죄인지, 그 중국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 나중에 많은 돈을 요구할지도 모르니, 조심하시오."라고 중국어로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Lonely Planet 책에 가이드를 조심하라는 말이 써 있었기에 해준 충고였던 것이다. 그 말을 듣던 중국인들은 막 성사 단계에서 가이드가 필요없다고 말해 버렸다. 내 말을 듣고 중국인의 태도가 달라지자, 이제는 험상궂은 인상의 스리랑카 젊은이가 나에게 달려들어 따졌다. "당신 말을 듣더니 저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당신이 문슨 말을 했느냐?" "나는 그저 인사만 했다. 나는 한국인이어서 중국말은 잘 모른다. 왜 나한테 따지느냐?" 라고 말했다. 얼굴에 인상을 팍팍 쓰던 스리랑카 젊은이는 위 아래로 나를 훑어보며 식식거렸다. 순간, 이러다가 내가 저놈한테 한 대 맞아 데굴데굴 굴러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그 젊은이가 내려간 후, 나는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인지, 잘 못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돈 많은 중국인이 바가지를 좀 써서 가난한 스리랑카인을 돕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저런 바가지 씌우는 자들에게 이익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든 본래 싸움도 못하는 놈이 이제 늙어가지고, 젊은이에게 한 대 얻어 터지는 날에는 사망아니면, 뼈다귀도 못 추릴 것이라는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
이 곳을 올라가는 것은 해발 370미터의 수직 산을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땀이 나고 숨이 차기 시작한다. 뚱뚱한 서양인 아줌마 몇 사람이 계단에 앉아 죽는 시늉을 한다. 여기서 좀더 힘을 내서 원통 계단을 통과하면 드디어 아름다운 나체 여인들이 꽃을 들고 반겨주는 Fresco 벽화 갤러리에 도착한다. 본래 프레스코는 갓칠한 회벽에 수채로 그리는 화법을 말한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을까? 회벽은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림은 살아서 꿈틀거리고 벽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튀어나와 나를 환영하는 듯 했다.
아, 이 서슬 퍼런 절벽에 저토록 가슴이 풍만한 여인을 그려야겠다고 맨처음 생각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높은 곳에 와서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 권세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고, 수 많은 여인을 옆에 거느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왜 이 위험한 절벽에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이곳에 부처님 상이나, 산수화를 그려놓았을 것이다. 탄트라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까? 왜 가슴이 훤히 보이는 그림을 여기에 그렸을까? 그들은 훗날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이걸 보고 갈 것이라고 어디 꿈에라도 상상했을까?
|
여기서 다시 조금 내려오면, 길고 긴 황색의 거울벽이 나온다. 벽이 맨들맨들해서 마치 얼굴이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제작할 당시는 어떨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니 거울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 듯 했다. 옛날 시골에서 살 때 장판을 하고 그 위에 니스칠을 한 듯한 느낌이 드는 벽이었다. 누군가가 그곳에 낙서를 한 것이 많이 눈에 띄었다. Lonely Planet에 따르면 그 낙서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고 한다. "가슴에 황금 목걸이를 걸친 여인들이 나를 오라고 손짓하네. 눈부시게 빛나는 여인들을 바라보니, 천국도 이보다는 못 하리라."
|
<거울 벽위의 낙서>
약 70% 정도 올라오면 펑퍼짐한 공터가 나타난다.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잠시 쉬기도 하고, 내려갈 사람들이 쉬면서 마음을 다잡는 공간이기도 한다. 여기서부터 한 줄 난간에 의지하여 다시 올라간다. 어떤 곳은 교행(交行)이 가능하나, 어떤 곳은 한 사람만이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눈을 끄는 것은 사자의 발(lion's foot)이다. 사자의 발이라기 보다는 곰발처럼 보이는 이 형상은, HCP Bell이라는 영국의 고고학자가 1898년 발견했다. 한 때는 두 개의 발 사이에 사자의 입이 있어서 그 입을 통해서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지금은 사자의 머리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왜 이곳에 사자를 새겨 놓았을까? 그 이유는 석가모니는 석씨 집안의 사자와 같은 사람이다. 석가모니의 말은 사자의 울부짖음에 비유할 수 있기에 여기에 사자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Lonely Planet에 써 있는 내용이다.
|
드디어 사자산 정상에 올라가면 넓은 평원이 나온다. 각종 건물터와 연못 계단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으며, 세월이 흘렀음에도 세워진 건물은 없어졌지만, 바닥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감격하여 우는 사람은 없지만, 감격에 겨워 사방을 둘러보고 또 보고, 눈을 들어 먼산을 보고 하늘을 보고, 눈을 감고 회상에 젖는 사람들이 목격된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거기에서 즐기는 왕은 말할 수 없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를 깎고, 370미터 아래에서 흙을 퍼올리고 벽돌을 날라서 그런 시설을 만드느라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뼈가 깎이고 땀이 나다 못해 피가 나오고 한숨이 하늘을 채우고, 눈물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연못을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가 팔자가 좋아 20세기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요, 한국에서 태어난 것은 천천만만 다행이다. 밤이나 낮이나 죽기살기로 싸우는 한국의 정치판에 끼여들지 않은 것은 천재일우가 아니라 억재일우의 행운이다. 아, 감격스럽다, 내가 나인 것이!
|
<복만씨, 빨리 비스켓좀 꺼내봐. 개 눈빠지겠네. 개눈빠지면 주워 먹으려는 겨?. 아래에서 도움을 주었던 중국인 아가씨도 저쪽에 보인다. >
<복만씨인가봐, 아마도!>
<바위에서 내려와 주위를 돌던 중 발견한 코끼리 투어>
<호수에 비친 바위를 찍던 중, 한 어부가 고기를 잡아 들고 나오고 있다.>
<호텔로 오는 중 자전거 수리공을 보았다. 그의 옷이며 얼굴, 특히 두 눈동자가 힘든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진을 찍는 다는 것 자체가 죄스러울 뿐이다.
<Episode>
시기리야 바위 정상에서 보면 약 1키로 떨어진 곳에, 시기리야 바위와 거의 비슷한 또 하나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시기리야 바위를 촬영하려면 항공 촬영을 하거나, 바로 맞은편에 산에 가서 시기리야 바위를 찍어야 한다.
우리 팀원 중에 두 사람이 맞은 편에 산에 간다고 갔다. 그러나 이 두 여자분들이 저녁이 먹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전등불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해도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도 연락도 되지 않고, 이제 밖은 완전히 깜깜해 졌다. 예상대로라면 4-5시에는 돌아왔어야 했다.
시내에 간 사람이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사실 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시내에서 더 즐기거나 차가 막히거나 기껏해야 술에 취해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첩첩 산중에 더구나 여자 두 사람이 갔으니 사람들의 조바심은 시시각각으로 더해갔다. 산에서 길을 잃었거나, 강도를 만났거나, 바위에 미끌어져 부상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거나, 땅속에 들어갔거나 하늘로 날아갔거나, 그럴 확률은 적어보였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가 큰길에 나와서 기다려 보았으나 가끔가다 지나가는 자동차 이외에, 밖은 컴컴한 바다일 뿐이었다. 다시 들어가 또 술을 좀 마시다가 다시 나와서 또 기다리기를 여러 차례,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사고가 났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굳혀져 가고 있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또 먹다 나오다, 먹다 나오기를 몇 차례, 그때 멀리서 차가 한 대 마침내 오더니 거기에 두 사람이 타고 오는 것이 아닌가? 전사 편지 받고 시름에 찬 부인이, 죽었다던 남편이 돌아오는 것보다 더 반가웠다. 그런데 그들이 늦게 온 이유는, 내려 오는 중 어떤 스리랑카 젊은이가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그집에 갔다가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스리랑카 사람이 한국에 다녀온 사람인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너무 반가워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허탈하기도 하고, 조금 실망스럽기도 했다. 어떻든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그날 일은 泰山鳴動鼠一匹(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났다. 아마 마누라가 그랬으면 그날밤 찬물을 양동이채 떠다 놓고, 바가지로 퍼마시며 밤새도록 싸웠을 것이다.
스리랑카 젊은이 중 한국에 다녀온 사람을 가끔 만나는데,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한국에서 대접을 잘 받은 사람은 한국에 애정을 갖게 되고 또 다시 한국에 가려고 한다. 그러나 못된 한국인을 만난 사람은 한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 한국인에 대한 험담을 늘어 놓는다. 즉 자기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의 행동에 의해 모든 한국인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라는 말이 있다. 한두 사람을 보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배우자 한 사람을 보고, "모든 여자들은 다 수다스럽다"고 판단하거나, "모든 남자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한다. 장사하는 사람에게 한두 번 속으면 대한민국 장사꾼은 다 도둑놈이라고 하기도 한다. 교회를 나가는 사람이 한번 나쁜 짓을 하면 "오히려 신을 믿는 놈이 더 나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기야 이다지도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니 어찌하랴. 그것은 신의 책임이지 인간의 책임이 아니다.
내가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은 넓고 사람의 생각은 가지각색이다. 각자가 각자의 생각을 하도록 내 버려 두어라. 각자가 행동하고 싶은대로 행동하게 내 버려 두어라. 각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 버려 두어라. 역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말은 "내비둬"임이 틀림없다. 내비둬교의 교주로서 감히 한 마디 해본 말이다.
|
(2014년 3월 30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