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0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 위에 있다는 어떤 부자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산위로 쭉 올라가면 엄청난 부자가 있는데, 대접을 잘 해준다는 말을 전날 들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오른쪽이 2/5쯤 보이지 않는 달이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음력으로는 보름이 조금 지났을 것이다. 열대지방이라고는 하나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조금은 쌀쌀했다. 저 멀리 발 아래 보이는 계곡에 안개가 끼어 중국의 풍경화에 자주 나오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캔디의 아침이다.
갑자기 원숭이가 나타나 나를 째려보더니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원숭이가 하품하는 것은 처음 보았고, 원숭이의 입이 그렇게 큰 것도 처음 보았다. 원숭이는 하품할 때 눈을 감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런 곳에 와서 눈감고 하품하는 원숭이를 보았으니, 참 귀신이 하품할 일이다.
그때 어디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오라는 손짓을 했다. 따라가 보니, 조그만 법당같은 것이 있었는데, 음산한 기운이 돌아 조금 먼 발치서 보고 접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안내대로 여기저기 보니, 어느덧 캔디 시내로 갈 시간이 되었다. 부잣집 구경은 접어두고 호텔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페라데니아 왕립 식물원의 위치>
<식물원 입구에 노란 꽃으로 뒤덮인 나무가 서 있다.>
숙소에서 약 1시간 걸리는 왕립 식물원은 전에는 왕과 그의 친척들만 드나들었겠지만 지금은 돈만 있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 입장료는 약 9천원. 면적은 60헥타아르라다. 계산해 보니까 한변의 길이가 약 800미터인 정사각형의 면적과 비슷하다. 따라서 네 변을 따라 한 바퀴 걷는다면 약 3키로가 될 정도의 크기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식물원에 아침부터 결혼 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랑신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친척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전통복을 입고 촬영을 하는 바람에 스리랑카의 과거 복장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우리에게 온갖 포즈를 취해주며 마음대로 찍으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외국인에게 전통 복장을 보여주어 기분이 좋고, 우리는 결혼식장이나 가서 보아야 할 것을 여기에서 보니 웬떡이냐 싶었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 내려가면 아름드리 나무가 늘어서 있는 곳이 나온다. 양쪽으로 서 있는 나무 하나하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 내는 원근은 미술 시간에 배웠던, 소실점이니 원근법이니 뭐 그런 상상을 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아니 내가 관심이 간 것은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흰소 한 마리였다. 소는 자기의 발굽으로 코를 후비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다. 발굽이 뾰죽하여 코를 후비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도 발굽으로 자꾸 코를 건드리니 코가 찢어지든지 아니면 미친 소가 아닌가 싶었다.
한참을 기다려 관찰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집주인이 소의 코를 뚫어 그 속에 새끼 줄을 관통시겼는데, 줄을 너무 꼭 묶어서 주둥이가 5-10센티가 찢어져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소의 코청(=두 콧구멍 사이를 막고 있는 얇은 막)을 꿰뚫어 나무 고리를 끼우는 방식은 양반 중에서도 상양반이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내밀어 통증을 호소하는 소를 보면서 도대체가 인간의 잔인성의 끝은 어디인가 싶어 다리가 후덜덜 떨렸다.
한참을 가다 보면, 그림자가 땅바닥에 놓여 아름다운 수를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꽃잎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곳에 나뭇잎의 그림자가 무질서한 무늬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한참 들여다 보면 마치 술먹고 지긋이 눈을 감고 태양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길 위에 만들어진 그림자의 장관은, 노란꽃과 황색 개가 졸고 있는 길 위에도 나타났고, 야자수가 자신의 모습을 펼쳐보인 아스팔트에서도 나타났다. 그림자가 이렇게 아름다운 피사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전에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그림자와 그늘이 어떻게 다른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금방 대답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림자(shadow)는 평면 도형이어서 우리가 밟을 수 있지만, 그늘(shade)는 입체 도형이어서 밟을 수는 없고, 그 속에 들어가 쉬든지, 고스톱을 치든지, 소코에 구멍을 뚫어 잔인함을 보이든지 온갖 짓을 할 수 있는 입체 공간이다.
여기 식물원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무수한 박쥐 무리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박쥐는 동굴에서만 사는 것이고 낮에는 잠만 자다가 밤에 돌아다니며 먹이를 사냥해 먹고 사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대낮에 날아다니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사람들이 뭐라하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기 본성대로 살아가고 있다. 멀쩡한 대낮에 나무에 대롱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고도 신기했다. 나는 곧바로 인터넷에서 박쥐에 관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박쥐의 경우 다리를 가볍게 하는 쪽으로 진화하여 그 가는 다리로는 그들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게 되어 거꾸로 매달려 생활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박쥐의 다리는 새의 다리에 비해 뼈의 강도가 매우 약해서 새와 같이 두 다리로 나뭇가지에 서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대용으로 갈고리처럼 생긴 발에 체중이 실리면 연결된 힘줄이 수축되어 천장에 매달리게 되었다. 또한 새에 비해 비상력이 약한 박쥐는 낮은 바닥보다는 천장이 높은 곳에서 비상을 시작하는 것이 유리하여 거꾸로 매달려 생활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매달리는 힘은 에너지소모가 거의 없어, 때로는 죽어서도 이런 모습으로 그대로 매달려 있기도 한다. 또한, 박쥐의 심장과 혈관의 구조는 거꾸로 매달리는데 유리하게 진화되어 었어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혈액이 머리로 모여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매달려 있어도 머리가 무거워지거나 어지러워지는 증세는 없다.<인터넷에서 인용>
나도 박쥐에 관한 추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시골 살 때,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삼태리 뒷 산에 형석굴이 있었다. 3개가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제 때, 일본군이 전쟁을 해야하는데 화약이 모자라 형석(파란색의 돌가루로 화롯불에 조금 넣으면 탁탁 튀었었다)을 캐다가 전쟁에 썼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누가 거기에 박쥐가 있으니 가서 모조리 잡아 죽이자고 했다. 무기는 모자와 긴 마당비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5-6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두 명이 모자를 쓰고 긴 싸리비를 들고 컴컴한 동굴로 들어간다. 앞잡이가 마당 싸리비를 가지고 형석굴의 천장을 쓸면서 굴 속으로 전진해 간다. 그러면 박쥐 일부는 맞아죽고 일부는 바닥에 떨어진다. 그러면 그 뒤를 따라간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놈을 밟아 죽인다. 하지만 재수 좋은 놈은 밖으로 날아갈 천금같은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가 정말 재수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 형석굴 밖에 총쟁이처럼 지키고 있던 나머지 사냥꾼이 있지 않은가? 날아 밖으로 나오는 박쥐는 두서너 명의 보초에 의해 휘두르는 싸리비에 맞아 끽소리 못하고 죽는다. 그후 설죽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놈은 죽지 않고 개긴다는 죄목을 덧씌워 더욱 처참하게 찢어죽이거나 으깨어 죽인다.
그 당시에 나이도 어린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다. 성악설, 성선설 이런 말이 있지만, 인간의 근본은 그리 선한 것은 아닌가 보다. 또 한참 생각해보니, 아까 코가 뚫인 소도, 짓이겨 목숨을 잃는 박쥐에 비하면 재수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도살장에 갈 때까지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고 우심(牛心)으로 돌아가 자기 신분에 맞게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은 내가 좀 미쳤나 보다.
박쥐 떼를 지나면, 줄기도 이상하고 뿌리도 이상한 무수한 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4000종의 식물이 살고 있는 이 식물원은 1821년 영국인 알렉산드라 문(Alexandra Moon)이 스리랑카 여기저기 있던 식물들을 옮겨와 식물원 조성을 시작하여 1843년 공식적인 식물원이 되었다고 한다. 필자 생각에 캔디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다른 곳은 못 보아도 이곳은 꼭 보아야 한다.
비참한 소와 박쥐 이야기를 했으니 좋은 이야기도 하나 하고 넘어가야겠다. 공원 도처에 젊은 남녀가 쌍쌍이 앉아 껴앉고 키스하고 좋아 미쳐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B님은 "눈꼴 시러워 못 돌아다니겠네."라고 말을 하면서 그래도 그들에게 사진기를 갖다 대고 있었다.
많은 연인들 중, 한 연인 쌍과 함께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누었다. 그 당시 아가씨가 너무 멋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여자에게만 카메라를 들이댔다. 가끔가다 남자를 찍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여드름인지 주근깨인지 알 수 없는 점들이 여자 얼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아래 사진은 얼굴에 조금 손을 댄 것이다. 한국에 와서 facebook으로 여학생에게 연락을 했더니 회계학 시험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해왔다.
<왼 쪽 사진은 현장에서 찍은 사진. 오른 쪽 사진은 필자가 포토샵 처리한 사진. 내 포토샵 실력 이 정도인 줄, 사람들 "알랑가 몰라!" 여자의 얼굴이 "왜 말끔해야 하는건지, 알랑가 몰라">
캔디는?
캔디는 ‘센카다가라푸라(Senkadagalapura)’ 시로 널리 알려진 불교의 성지이다. 캔디 신성 도시(Sacred city of Kandy)는 싱할라(Sinhala) 왕조의 마지막 수도로서, 1815년에 영국이 스리랑카를 점령할 때까지 싱할라 왕조의 후원을 받아 2,500년 이상 디나할라(Dinahala) 문명을 꽃피웠다. 유명한 성지 순례 유적인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 Relic, 석가모니의 진신 치아가 보관된 사원)가 이곳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
캔디 시내에 도착하면 어디서나 보이는 흰색의 부처상이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뚝뚝이를 타고 그곳에 올라 사방을 한 바퀴 둘러보면 캔디 시내가 다 보인다. 그러나 그 사찰은 부처의 상만 클 뿐, 나머지 별로 볼 것이 없었다. 좀 특이한 것은 두 명의 어린 스님을 만난 일이었다. 스님이라고는 하나 너무 어려서 L님이 주는 볼펜을 받고 좋아하고, 찍은 사진을 받고 좋아하는 것은 보통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이날 얻은 수확 중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스리랑카 방송국을 견학한 것이리라. 허름한 집이 있어 재미삼아 가본다고 한 것이 방송국이었던 것이다. 우리 생각에 방송국이라고 하면 거창한 건물에 수위가 철저히 조사해 적격자만 들여보내고, 연예인이 들락날락 거리는 곳으로 인상이 박혀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경비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들어가도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기웃거리자 한 사람이 나타나 친절하게 맞이하며, 안내를 해 주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겁도 없이 생방송이 진행되고 있는 방송실로 안내해 주었다. 그때 진행되는 생방송은 음악을 들려주고 중간중간 해설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생각되었는데, 마침 해설자들은 쉬고 있고 음악이 방송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고, 우리는 목례를 하고 곧바로 다른 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옛날 흔히 보았던 릴 테이프가 사방에 쌓여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안내자와 명함을 교환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방문해 주어서 고맙다고 그들이 말을 했지만, 사실 우리가 방송국을 견학한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놀랍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 옆 나무 그늘 아래서는 잠시 후에 방송에 출현할 학생들이 흰옷을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도 마치 K-pop 가수라도 본 듯이 열광적으로 우리를 맞이 했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종류의 방송국 견학은 내 여행 중 없을 듯 하다.
<캔디 중심부>
캔디 시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캔디 호수다. 캔디 왕국의 마지막 통지자 스리 위크라마 라자신하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 당시 반대하는 몇몇 사람을 호수 뚝에 말뚝을 박고 거기에 묶어 죽인 후에야, 이 인공 호수는 건설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것은 스리랑카에서 최고의 사찰로 간주하는 불치사(佛齒寺)라는 절일 것이다. 부처님 이빨을 모셔 놓은 곳이다. Lonely Planet에 따르면, 1998년 폭탄이 터진 후 철저히 검색을 한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성스러운 곳은 모두 그렇듯이, 검사는 철저했으며 신발을 벗고 몸을 가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들끓는 이곳은 실내 규모가 아주 컸고, 도처마다 사람들이 앉아서 기도를 하거나 쉬거나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지 당연한지 모르지만, 부처님 치아는 볼 수 없고, 치아를 보관하는 큰 황금 상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부처님을 보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미라를 보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이빨조차도 보지 못하고, 이빨 하나를 담아 둔 상자만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저 속에 실제로 부처님 치아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저 속에 들었으니,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어리석은 중생들이여."라고 근엄하게 말하는 듯 하다.
나는 전에 "우리는 부처님 손톱 밑의 때만도 못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제 이것을 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될 듯 했다. 석가모니는 컴퓨터도 모르고, 영어도 모르고(하기야 그 당시는 영어가 없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도 몰랐겠지만, 그런 지식을 가진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하고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 지식과 지혜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큰가 보다.
Lonely Planet에 따르면, 기원전 483년에 부처님의 장례식 중 불에 타고 있는 이빨을 누군가가 꺼냈고, 기원후 4세기에 한 왕자의 머리카락 속에 숨겨 스리랑카로 가져왔다. 처음에는 아누라다푸라로 가져갔으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결국 여기 캔디로 오게 되었다. 1283년 인도군이 침략하여 빼앗아 갔으나, 파라크라마바후 3세에 의해 다시 스리랑카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저 상자 안에 부처님의 치아가 있다고 한다.>
그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문화센터에서 한다는 스리랑카 전통 공연이었다. 전통 복장을 한 무용수들이 전통음악에 맞춰 재빨리 돌고 도는 춤을 추었다. 그러나 전통 옷을 입고 추는 춤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배꼽을 내 놓고 춤을 추는 아가씨들의 뱃살이 덜렁거려서 그것이 구경거리라면 구경거리였다. "저 사람들은 잘 한다고 할지 몰라도, 세계 여러 곳의 무용을 보아온 우리로서는 별로 특이한 것이 없고, 조금은 시시하다고 해야겠네."라고 옆에 있던 S님은 말한다. 내가 보아도 한국의 각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무료로 참여하는 각설이 굿패를 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텐데,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그날 행사 마지막에 "숯불 위를 걷는 쇼"는 좀 쇼킹한 것이었다. 우리가 숯불 갈비를 먹다가 숯불의 조그만 불똥이 튀어도 그 뜨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고, 실제로 살이 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불 위로 걸어간다고 하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침 우리는 맨 앞 좌석에 앉아서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걸음을 빨리 걷기는 하나, 불 위를 걷는 사람은 분명 맨발이었고, 붉은 색의 고체는 훨훨 타는 숯불이었다. 5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대단한 불이었다. 숯불 위를 걷는 장면을 보면서 스리랑카 여행기 6회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