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간 중미 여행기 8: 온두라스 "테구시갈파와 꼬빤 유적지"
온두라스로 가려면 새벽 5시 반에 니카라과의 마나구아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한다. 이 버스를 타기 위해 새벽 3시 반에 눈을 떴다.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반쯤 졸면서 마나구아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수속을 밟고 버스를 타니 아직도 날이 어두워 좌석 번호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행이라고 하면, 휘파람 불면서 놀러다니는 신선놀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이란 우선, 육체적, 시간적, 금전적으로 가능해야하고, 특히 정신적으로 어떤 역경이나, 어떤 고생도 감내해야하는 외롭고 고독한 방랑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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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에 있는 국가의 수도는 나라 이름에 시티를 붙이면 되는 경우가 많다. 파나마→파나마 시티, 멕시코→멕시코 시티, 과테말라→과테말라 시티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코스타리카의 수도는 산호세이며, 엘살바도르의 수도는 산살바도르라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온두라스라는 국가명은 많이 들었어도, 수도가 어디인가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수도는 "테구시갈파"이다. "대구시"도 아니고 "테구시"이고, "쪽파"도 아니고 "갈파"이다. 한 국가의 수도 이름이 왜 이렇게 어색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온두라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위험"이란 단어다. 실제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도,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보아도 위험이란 단어가 수도 없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San Pedro Sula, Honduras, has been given the unfortunate title of the most dangerous city in the world. The data was compiled by Citizen Council for Public Security, Justice, and Peace, a Mexican think tank
focusing on crime statistics from the Western Hemisphere. The city tops the list for the second year in a row.(온두라스의 "산페드로 술라"는 유감스럽게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양의 범죄 통계를 주로 다루는 멕시코의 씽크 탱크인 공중, 정의, 평화를 위한 시민 협회에서 수집한 것이다. 이 도시는 2년 연속 이 목록의 맨 위에 올라와 있다.) 사실은 이런 말을 듣고, 온두라스에 가고 싶은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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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버스는 8시 30분에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국경에 도착했고, 출국과 입국 수속을 마치고 10시경 수도인 테구시갈파로 출발했다. 온두라스의 수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20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그라나다 호텔에 전화를 걸어 "그라나다 호텔 3"으로 예약을 했다(그라나다 호텔은 체인점으로 1- 4까지 있다).
건들건들 왔다갔다하는 택시 운전수를 잡고 얼마에 갈지 물으니 6,000원을 달라고 했다. 3대가 갈테니 깎아 달라고 했더니, "다른 두 대를 더 불러 올테니, 다른 두 차는 각각 5,000원씩만 주고 나에게는 6,000원을 달라."고 말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온두라스의 수도인 테구시갈파의 인구는 113만명, 해발 975미터에 위치해 있다. 길이 엄청나게 막혔다. 좁은 길에 무슨 차들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우리 택시는 별 문제 없이 호텔에 도착했으나, 다른 한 택시에서는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그라나다 호텔 3으로 데려다 달라고 택시 기사에게 이야기 했지만, 이 기사는 엉뚱한 호텔에 데려다 놓고, 다짜고짜 호텔 주인에게 팁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야단법석을 부렸다는 것이다. 손님이 3명이나 되니까, 그를 압도하여 다시 그 택시를 타고 그라나다 호텔 3으로 오기는 했지만, 만약 혼자 가다가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본래 온두라스가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데다가, 거기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고 보니, 어서 빨리 테구시갈파를 떠나 김광석 거리가 있다는 대구시에서 쪽파전에 막걸리나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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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근처에 있는 중앙 광장에 갔다. 모두들 가방을 앞에다 메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혹시라도 말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대꾸하지 않고 모르는 척 지나가기로 했다. 광장에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사진을 몇 방 찍고 어떤 골목으로 가는데, 광부 복장과 삽을 든 사람이 소위 말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실감나게 분장을 했는지 광부보다 더욱
광부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그날밤 집에 가서 온몸에 묻은 시커먼 물감 씻어 내려면 때미리 수건으로 한 시간은 박박 문질러야 제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돈 몇푼 벌려다가 피부 다 날라갈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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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라고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도, 아주 오랫동안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젊은이, 아니 중늙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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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장식이 이채롭다>
<예수를 믿어라!>
날은 저물어가는데 길 한 복판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일분만 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다가는 목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았다. 예수를 "헤수스"라고 발음하는 것이 이채롭다. "헤수스 ~~~~~, 헤수스 ~~~~~~~~~~. 알 수 없는 스페인말로,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 사거리를 자기 음성으로 가득 채운다. 사명감에서 그러는지, 스스로 우러나오는
신앙심인지, 아니면 누가 시겼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곧 죽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참고: 스페인어에서는 p는 "ㅃ" 으로, c는 a, o 앞에서 "ㄲ" 으로, t는 "ㄸ" 으로 소리난다. 그리고 j는 "ㅎ" 으로 발음한다. 따라서 copan(코판)은 "꼬빤"로 발음되고, Jesus(지저스=예수)는 "헤수스"가 된다. 또한 h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Honduras는 "혼두라스"가 아닌
"온두라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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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구시갈파의 야간 장면>
그날 밤 내가 자고 있는 옆방에 밤새도록 웃음소리가 났다. 그 소리 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젊은이, 아이 등의 목소리가 섞여있었다. 아마 전(全) 가족이 오랫동안 돈을 모아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하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조부모를 모시고 시골에서 수도 테구시갈파까지 왔으니 밤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어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내
비록 설잠을 자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이 더욱 큰 소리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기 바랬다. 그 이야기가 창문을 타고 멀리 멀리 테구시갈파의 밤 하늘에 메아리치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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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꼬반 유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중간에 한 도시에서 내려 점심 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버스가 있던 곳으로 가니 우리를 기다려야 할 버스가 없어진 것이다. 당연히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 모두 다 없어진 것이다! 모두들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는데, 한 사람이 "여기에 다 내려 놓고 갔네."라고 소리쳤다. 알고보니 우리를 태우고 왔던 버스는 사라지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밖에 내려 놓았던 것이다.
우리가 새 버스를 탈 때는 무슨 일인지 가방을 열어서 하나하나 다시 조사하고, 레이저 막대기로 몸 수색이 끝난 후에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버스를 타면서 공항에서처럼 레이저 막대기까지 동원하여 샅샅이 몸을 수색하는 것은 아마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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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7시 반쯤 꼬빤에 도착했다. 사방은 어둡고 비를 피해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호텔을 잡으러 간 선발대에서 아주 좋은 호텔을 잡았다는 연락이 왔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엘 보스케라는 콘도였다. 대지가 넓고 큰 나무가 하늘을 향해 사방에 뻗어 있었다. 젊은이들이 방을 안내하면서 서툰 영어로 콘도 자랑을 늘어 놓았다. 방 앞에 놓여 있는 그물 침대에서 누워보려다 확 뒤집히는 바람에 땅바닥에 쿵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그물침대 곁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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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한 식당의 벽화>
<다음 날 새벽 산책길에 찍은 꼬빤 시내. 길바닥이 모두 돌이다.>
<붉은 집이 인상적이다.>
<꼬빤 유적지가 시작된다.>
오늘 이후로 마야 유적을 많이 보게 된다. 따라서 마야 문명 이야기가 계속 나오므로 기본적인 사항은 알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에 기술된 것은 인터넷을 참조하여 필자가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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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be Illustrator를 사용하여 필자 제작>
1. 마야 문명 : 멕시코 유카탄 반도 (과테말라 북부)
케추아족, BC3000년경에 북아메리카의 한 부족이 남진해서 세웠다고 추정 됨., AD300~900년 경 중흥, 10세기 경에 멸망 원인은 불명. "0" 사용, 20진법 사용. 정교한 천문학과 건축술이 발달했던 문명으로, 중미의 과테말라와 벨리즈, 온두라스, 멕시코 남부 지역에서 그 흔적이 남아있다. 코판은 마야 문명이 남긴 섬세한 조각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마야 문명의 초기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코판은 1570년 경에 발견되었다.
*여기 꼬빤의 유적은 마야 문명이다.
2. 아즈텍 문명 : 멕시코 중부
마야족+풀텔족 . 마야 족 멸망 후 일부가 아즈텍 문명을 세움, 1528년 스페인(Hernan Cortes)에 의해 멸망. 석기 문명. 마야 문명과 비슷함.
3. 잉카 문명 : 페루 지방
빈,치무 나스카, 티아우아나코 족 연합, 케추아어 사용, 잉카는 군주의 호칭. BC1250년경 부족사회 형성 - AD 1200년경 부터 국가 형성 및 부족간 정복. 1492년 콜럼버스에 발견 된 후 스페인 군에 침략 당함. 16세기 까지 왕조를 이어가다가 스페인 군에 의해 해체됨(AD 1532년 정도).
<인터넷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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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를 내고 유적지에 들어가면 몇 마리의 앵무새(macaw)가 눈을 사로잡는다. 앵무새는 온두라스를 상징하는 국가 새(National bird)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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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이나 비석을 확대해 보면 모두 상형문자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상은 "18 토끼"라는 이름의 왕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왕의 이름이 18토끼다! 이름도 이상하다! 왜 하필이면 십팔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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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 폭 5m, 높이 32.5m의 계단이 있는데, 여기에는 1200여 개의 상형문자가 촘촘하게 조각되어 있다. 8세기 중엽에 제작된 이 상형문자 계단은 당시 코판을 지배했던 마야 통치자들의 일대기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아직도 상형문자 해독은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비가 와서 침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단 위에는 천막이 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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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계단에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계단 안내 표지판>
<공놀이 경기장>
코판 상형문자 계단 옆에는 볼 경기장(위 사진)이 있다. 마야인들이 공놀이를 하던 장소다. 마야의 유적지에 남겨진 것 가운데 두번째로 크고,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처음에는 여기에서 어떻게 공놀이를 할까 의아하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야인의 공놀이는 손을 사용하지 않고 엉덩이와 허리 등을 이용해 공을 상대편 골대로 넣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어떤 곳에서는 골대에 공을 넣는 경기이고, 또 어떤 경기에서는 누가 더 오래 볼을 가지고 있느냐를 따졌다고 한다.
공놀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1)하나는 죄수와 공놀이 선수와 하는 것이다. 죄수가 이기면 자유를 얻고, 선수가 이기면 죄수는 죽는다. 2)선수끼리 하는 경기는 진팀이 목을 내놓아야 하는 경기다. 어떤 기록에는 승리자가 자신을 희생하여 목숨을 바쳤다고도 한다.
그러나, 글자로 기록된 것도 아니고, 겨우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해독을 못하니 추측만 할 뿐이다. 이에 비해 이 당시에 해당되는 시대에 중국은 한자로 모든 것을 기록해 놓았으니, 여러 면에서 동양 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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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는 장대를 가지고 다니는데, 가리키면서 설명할 때 사용한다. 유물에 해를 입히지 않게 하도록 끝에 깃털이 달려있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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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설명 안내판에 필자가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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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동굴도 있다.>
<동쪽 광장: 재규어 광장: 여기에 지하 동굴이 있다.>
<동쪽 광장에 있는 동굴 입구>
<동쪽 광장>
<서쪽 광장>
서쪽 광장에 있는 제단석 Q는 8세기 무렵 코판을 지배했던 16명의 왕이 새겨져 있다. 이 곳에서 15마리의 재규어와 몇 마리의 앵무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한다(로운리 플래닛에서 인용). 제단석의 주인공은 야스 팍 왕으로, 돌 위에는 `763년 7월 7일'이라는 그의 등극일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인터넷에서 인용)고 하나, 우리가 갔을 때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해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찾아볼 수는 없었다.
*여기를 구경할 때, 자살공양이라는 말을 들었다. 자살을 하여 공양을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 돌아가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여, "자식과 마누라를 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자살하러 떠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럴 듯 하게 써보려고 메모해 두었다. 그러나 막상 구하려하니 이와 연관된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상상으로 소설을 쓰기도 좀 뭐해서 결국 자살 공양 이야기는
좀더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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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비닐로 덮혀있는 조각상이 많다. 발굴을 덜 했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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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들은 표정이 아주 특이하다>
<마야 문명에 대한 또 다른 면>
가장 뛰어났던 문명인들이 가장 어리석은 미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이 바로 마야인이었다. 이 복잡한 역법과 건축 설계술은 신관(神官: 신을 받들어 모시는 일을 맡은 사람)들만이 알았다. 그들은 일식과 월식 따위를 예언해 평민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오로지 천체를 관측하고 역법을 계산하면서 시간의 비밀을 풀고 그 해의 길흉을 점치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신관들은 또 노예나 평민을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산 사람의 가슴을 돌칼로 가르고 뜨거운 심장을 꺼내어 신에게 바치는 잔인한 의식이었다. 신관들은 사람 제물을 많이 구하려고 포로를 잡기 위한 전쟁을 자주 부추겼다. 마야의 전쟁기록에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잡았다는 기록만 있을 뿐, 어떤 도시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마야 문명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잉카와 마찬가지로 쇠붙이를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복잡한 그림문자를 돌에 조각할 때 돌칼을 썼다. 그뿐이랴. 짐수레가 없었으며, 심지어 밭을 가는 쟁기와 가축도 없었다. 그런데도 맨손으로 돌을 날라 밀림 속에 피라미드를 쌓고 도시를 건설했으니 노예와 평민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부분 인터넷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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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판 유적지 입구에 있는 기념품 판매장: 이 꼬마는 나보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끝까지 따라다녔다.>
유적지에서 나와 코판 마을로 걸어가는데, 한 무리의 데모 군중이 피켓과 깃발을 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행진을 하고 있었다.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라 곁에 가면 다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물어보니 초르티라는 마야족이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단결하여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행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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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데모대는 다시 코판 시내 중심부에 모였다. 음악을 틀며 분위기를 끌어올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인지 사람들 사이로 이상한 음식이 돌고 있었다. 옥수수잎처럼 보이는 포장지에 쌀가루와 붉은 콩을 넣어서 찐 일종의 떡이었다. 조금 떼어 먹어보았는데, 나름으로 맛은 있지만, 좀 밋밋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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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를 사기 위해 시장에 들렀을 때, 아이들이 신기해 하면서 우리를 쳐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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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시장에서 사온 재료로 김치를 만들고, 된장을 끓이고, 돼지고기를 볶았다. 날아가는 밥이나마 밥도 자리를 지켰고, 몇 가지 채소도 술 안주 하라고 옆에서 대령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이런 한국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큰 호강 중의 호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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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이 음식을 장만할 때, 호텔에서 일하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 아주머니는 한국 사람들이 요리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관찰하기도 하면서 늦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도 와서 요리하는 것을 도와주었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뿌듯이 여기는 듯 했다.
엘살바도르로 가기 위해 짐을 싣고, 호텔 종업원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순간 아주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눈물을 닦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서로 손짓 발짓으로 의사전달을 했을 뿐인데, 아주머니는 울컥하며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왜 자기는 한국 여인으로 태어나서 이런 여행도 다니지 못하고, 온두라스 여인으로 태어나 식당일이나 하고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 생활을 할까, 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짧은 순간에 말 없는 정이 오고 갔고, 그 정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라는 추측이다. 조용필의 노래처럼 "정이란 주는 걸까, 받는 걸까"가 아니라, 정이란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애틋한 마음"이다. 사랑이 능동적이라면, 정은 "저절로 찾아오는 손님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고 떠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끊을 수 있어도 정은 끊을 수 없다. 어느 날 찾아와 사랑방에 묵고 있는 손님이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코판을 떠나 차를 타고 가면서 이 여인에 대한 생각이 한 동안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은 오직 나만의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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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마나구아에서 온두라스 테구시갈파까지 버스비: 1인당 25,000원
11월 17일: 숙박소: 테구시갈파 시내 "그라나다 호텔 III": 2인 1실 30,000원
11월 18일: 테구시갈파에서 꼬반까지 버스비: 1인당 40,000원
11월 18일-19일 꼬반 숙박소 "엘 보스께 펜션": 2인 1실, 1박당 35,000원
11월 19일: 꼬빤 유적지 입장료: 1인당 37,000원.
(2015년 1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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