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Korea

다시 찾은 제주도: 올레 11코스(Jeju Olleh course 11)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7. 30. 08:54

 


<11코스: 11코스를 끝낸 후 자구내 포구로 갔다.>

 

 

 

 

다시 제주 올레길을 찾다-제 11코스-

 

 

2009년 6월 18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나를 물은 지네가 작아서인지 피부가 붓거나 가려운 증상은 없었다. 아침 7시 30분에 하모 해수욕장에 있는 펜션을 출발했다. 상쾌한 바람이 해변에서 불어와 얼굴과 팔을 감돌고 지나갔다. 조금 해안을 따라 걸어가니 모슬포항이 나온다. 정박해 있는 배 사이로 낚시꾼 두 명이 하염없이 앉아있다. "많이 잡힙니까?"내가 물었다. "이 놈의 고기들이 사람 죽입니다. 물을 생각을 안해요." 그들의 고기 그릇을 보니,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모슬포항>

 

 

제 11코스는 안내책에 따르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 근대사와 현대사가 녹아있는 올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를 바라보고 가니 나는 동쪽으로 가고 있다. 어제 하루 종일 본 산방산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넓디 넓은 들판에는 야생화가 피어 있고, 지금 수확할 때인 무밭과 지금 방금 심은 고구마 밭, 그리고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고개를 내민 채소가 간간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알뜨르 비행장 근처: 멀리 산방산이 보인다.>

 

 

알뜨르 비행장 터를 지나면 4.3 유적지 섯알오름 학살터에 다다르게 된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총살집행자의 진술이라고 되어 있다.

 

 


"이곳은 1차 1950년 7월 16일 해병 모슬포부태 5중대 2소대원과 2차 8월 20일 해병3대대 분대장급 이상 하사관들에 의해 민간인을 학살한 장소이다. 해병대 모슬포부대에서 차출된 대원들이 도착하자 중대장, 소대장이 미리 도착했고, 소대장이 총알을 나누어 주었으며 한 사람씩 한 명씩 총살하라는 명령에 대원들이 일렬 종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GMC 트럭에서 내리는 민간인을 이곳 호 가장자리로 끌고 와서 한 명씩 세워 놓고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해 시신을 호 안으로 떨어지게 한 장소이다."

 

 

전쟁은 무섭다. 전쟁에 참가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전쟁이라고 한다. 겨울에 동상이 걸려 썩어 문드러지는 발가락을 보면서 총을 쏴야 한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동료를 무시하거나 죽이고 자기는 도망쳐야 한다. 그러다가 그도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전쟁터엔 늙은이가 먼저 끌려나가 싸워야 한다. 내가 늙은이가 되어가니 하는 소리다. 젊은이들이 무슨 죄가 았나? 앞날이 구만리나 남아 있는 젊은이가, 사랑도 해보지 못하고, 결혼도 해보지 못하고,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 인간이, "국가를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이 벌벌 떨면서, 늙은이들을 위해 싸우다 죽어야 한다.

 

 

지금 한 반도에는 전보다 훨씬 더 전운이 고조된 상태다. 전면전이건, 국지전이건, 간첩이 옛날처럼 다시 넘어오건,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발사하면 죽는 것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다. 그들은 국립묘지에 묻어주면 끝이다. 죽는 것은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번쩍번쩍 별을 단 군인들이 아니다. 나의 아들과 나의 친구의 아들이 죽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맨 앞에 대통령이 서고, 그 뒤에 장관이 서고, 그 뒤에 별자리들이 서고, 그 뒤에 노인이 서고, 맨 나중에 젊은이가 서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대통령이나 장관 장성의 아들이나 친척이 무조건 최전선에 서야 한다. 그러면 전쟁은 아마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지 전쟁이 나면 그 책임은 국가의 원수가 져야한다. 국가 원수의 최고의 임무는 무조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봐라. 그 당시 전쟁터에 나가 싸웠던 모든 사람은 다 "국가를 위해 장렬하게 몸을 사른 위대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봐라. 이 세상에 의로운 죽음이 어디있나? 전쟁터의 죽음은 개죽음뿐이다. 신라의 병졸은 다 위대한 죽음을 맞이했고, 백제의 병사는  다 개죽음을 당했는가? 그 당시에는 모두 의로운 죽음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정말 쓸데 없는 전쟁에서, 쓸데 있는 젊은이만 죽어 나간다. 내가 왜 이리 열을 내는지 모르지만, 암기식 교육만 받다가, 사회로 나와보니 직장도 마음대로 얻지 못하고 한숨만 쉬다가, 전쟁터에 먼저 끌려나갈지도 모를 요즈음 젊은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런다.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서로를 죽이려는 것이 가장 비열한 짓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다. 진보와 보수가 그렇고, 좌익과 우익이 그렇고, 남과 북이 그렇다.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되지 않는 한, 이런 말 싸움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요소요소마다 모든 이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아니 통일이 된다해도 또 나누어 싸울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싸움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격렬하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이다. 본래 인간이 그렇다.

 


 

 

 

 

<일본인이 만든 묘 모양의 건축물>

 

 

일본인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알뜨르 비행장 일대에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시멘트 건축물이 산재해 있다. 그 안을 살펴보니 교실 한 칸만한 면적이다. 안에는 물이 고여있고 쓰레기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아마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만든 방공호일 것이다. 이곳을 평화의 공원으로 만든다고 하니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것인가?

 

 

 

 

<무 뽑는 농부>

 

 

얼마 지나자 무를 뽑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다가가서 버려진 그러나 아무런 상처가 없는 무를 집어 들고 먹어도 되는지를 물었다. "예, 하지만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농부들은 말했다. 깎아 먹어보니 과연 아무런 맛도 없었다. 겨울 무는 당도가 상당히 높았으나 여름무는 그저 무가 무(無)맛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한 남자(사진의 반바지 입은 남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는 강원도에서 삼 개월 전에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돈은 잘 벌리지 않고, 세월은 가고, 날은 뜨겁고-----나는 언제나 제주 올레길을 걸어 볼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알뜨르 비행장과 무밭을 지나면 모슬봉이 성큼 눈 앞에 다가온다. 사모마을에 다다른 것이다. 한 건물에 붙어 있는 "돈이 되는 계약재배!"가 눈길을 끈다. 왕마늘은 1kg에 1,500원이고, 고사리는 1kg에 2,000원이다. 마늘은 1톤을 팔아야 백오십만원이다. 농사를 져서, 말려서, 작은 트럭으로 한 트럭은 팔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농사지어서 부자되기는 웬만해서는 힘들다는 이야기 나오게 생겼다.

 

 

 

 

 

<길옆의 딸기>

 

 

11코스와 12코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도처에 산재해 있는 야생 딸기 밭을 지나며 딸기를 따 먹는 일이다. 처음에는 혹시 농약을 뿌리지 않았나 의심했지만, 동네 사람들이 따 먹는 것을 보고 나도 따 먹기 시작했다. 10분간만 따 먹으면 아침 식사는 거뜬히 해결된다.

 

 

 

 

 

<정난주 마리아 성지>

 

 

모슬봉 정상에서 내려와 정난주 마리아의 묘에 도착한 것은 11시 반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열대 나무를 심고 잘 정리해 둔 것은 신앙심이 강한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서다.

 

 

정난주의 삼촌은 유명한 정약용이다. 정난주의 남편은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이다. 보통 백서(白書)라는 것은 본래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든 보고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백서(帛書)라고 쓴다. 백(帛)에 수건건(巾)자가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한다. 즉 백서(帛書)에서 백(帛)은 "비단 백"자이다. 따라서 백서(帛書)는 "비단에 쓴 글"이라는 뜻이다. 황사영은 제천의 베론 성지의 토굴에서, 조선 천주교도가 박해받은 것을 중국의 주교에게 알리려고 비단에 글을 썼다. 이것을 중국에 보내기 직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로, 황사영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황사영의 아들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황사영 아들의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추자도 여행할 때 그 동네를 찾아가 볼 예정이다.

 

 

 

정난주 마리아 성지를 출발하면 먼지가 하늘을 뒤덮는 공사판 가운데로 나있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한 없이 걸어야 한다. 중간에 길 양쪽으로 놓여있는 밭을 만나고 민가를 만난다. 사정없이 짖어대는 개도 직면해야 하고, 길옆에서 태양 아래 마늘을 다듬는 아주머니도 만나야 한다.

 

 

정난주 마리아 묘역에서 만났던 휴지줍는 사람들을 다시 만난 것은 신평리에서다. 근처의 올레길 상점에는 두 명의 원주민이 있었는데, "아, 점심 먹자"라고 말했다. 가게에서 무슨 점심을 먹나 보았더니, 그저 빵 하나와 우유 하나였다. 나는 얼음물 두 통을 샀다. 그리고 배낭에서 초코파이 하나 꺼내서 먹었다. 이것이 점심이다.

 

 

길을 건너 오솔길에 접어들면 곶자왈에 도착한다. 곶자왈은 내가 지금까지 걸어본 산길 중에서 최고의 길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길을 내 놨는지 상상하기 조차 힘든 곳이다. 어떤 곳은 허리를 굽히고 배낭을 벗어 들고 가야하는 곳도 있고, 풀을 양 팔로 헤치고 지나가야 하는 곳도 있다. 하여튼 3키로나 되는 이 숲은 겨우 한 사람 지나갈 그런 길이다.

 

 

곶자왈 올레길을 약 1키로 지나서 나무 아래에서 몇 사람이 점심을 먹고 가라고 사정하다시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지나쳤다. 왜그런지 피해가 될 것 같아서다. 바로 그곳이 유일한 숲속의 빈터다.

 

 

얼마정도 가니 어디서 개짓는 소리가 들렸다. 들개라고 생각되는 이 개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짓는 소리가 "깨애앵~~~~~~, 깽"이라고 짖어대는데, 등골이 송연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나는 혹시라도 몰라, 이 놈이 나타나면 일격을 가하기 위해, 지팡이를 끄집어 내어 걸었으나, 다행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되지는 않았다.

 

 

계속 가면서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고사리였다. 산 전체가 고사리로 뒤덮인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제주도는 고사리로 뒤 덮였다. 3월에 제주도에 왔을 때도 민박집 주인이 고사리 꺾으러 제주도에 오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고사리가 이렇게 많이 나오니까 말린 고사리 1kg이 2,000원뿐이 안되는 것이다.

 

 

 

 

<곶자왈의 고사리>

 

 

그러면 이렇게 아름답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비경을 왜 곶자왈이라고 했을까? 아마 공자왈 맹자왈은 들어보았어도 곶자왈은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본래 곶자라는 사람은 공자의 제자로 문무에 특출한 중국인이었다. 그는 나처럼 여행을 좋아해서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반 미치광이었다. 어느 날 그는 학구열과 여행열에 불타 짚신과 슬리퍼를 끌고 요동을 지나 고조선에 들어왔다. 고조선에 잘 나있는 길을 계속 걷고 걸어 완도에 도착한 그는, 홀홀 단신으로 수영복 하나만 걸친 채 수영을 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은 곶자이며 왕이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그러나 제주도인들이 중국말을 알리가 있겠는가? 그가 하는 말 "곶자왕"은,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곶자왈"처럼 들렸다. 그곳 사람들은 동네 계곡에 그를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는데, 그 후손들이 지금도 그곳에 살면서 그곳을 곶자왈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다음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위 이야기도 사실이요, 다음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생각하면 위 이야기도 거짓이라고 알면 된다.

 

    한 어린이가 양동이를 들고 급하게 우물가로 달려갔다. 마침 한 아낙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아낙네: 이봐, 학생. 양동이를 들고
              그렇게 급하게 어디 가나?
    어린이: 우물가에 물길러 가요. 빨리 비켜요, 큰 일이에요.
    아낙네: 물은 어디에 쓸려고?
    어린이: 저기 봐요. 자동차에 "아이가 타고 있어요."

 

 

 

 

<아이가 타고 있어요>

 

 

곶자왈을 나오자 한 여인이 딸기를 따먹고 있었다. 어쩌다가 친구가 되어서 무릉리 생태마을까지 왔다. 그녀는 약 4키로 떨어진 고산까지 걸어서 간다고 했다. 이 말 저 말 하다가 친해져서 계속 걸어가면서 그녀의 배경도 알고 제주도에 왜 왔는지도 알게 되었다.

 

 

목적지인 무릉 2리 생태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반이었다. 생태마을에 들어갈까 이 여자를 따라서 고산으로 갈까 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여자를 보내고, 생태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부 수리 중이었으므로 먼지만 안개처럼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기 있을 수도 없고, 다시 고산을 향해 출발할 도리밖에 없었다. 괜히 여자만 떨군 채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었다. 오늘 걸은 것이 20키로인데, 4키로를 더 걸어야 했다. 왜냐하면 여기 산골에서 자는 것보다는 바닷가에서 숙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불타는 들판도 보이고, 햄버거 가게도 보였다. 햄버거는 일인 분은 팔지 않는다 하여 배고픔을 참고 걷고 또 걸었다. 햄버거 가게 앞에 있는 이름 모를 나무는 꽃으로 덮여있다.  너무 힘들어 차를 세워서 좀 얻어 타고 가려고 했으나 아무런 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마침 트럭이 와서 손을 들었으나 그들은 나에게 손을 흔들며 그냥 지나쳤다.  

 

 

 

 

<꽃으로 뒤덮인 나무>

 

 

 

 

 

 

<길 옆 밭에 있는 콜라비>

 

 

 

 

<고산리 할머니>

 

 

드디어 고산리에 도착했다. 할머니가 혼자 앉아서 지나가는 차만 바라본다. 할머니의 머리띠가 참 귀엽기도 하다. 쉴겸 이야기할 겸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는 무릎이 아파서 일도 못한다고 했다. 집에 있는 것보다는 큰 길가에 나와서 지나가는 차를 보는 것이 일과라고 한다. 그 앞에 있는 마늘 바구니는 무엇이냐고 했더니, 혹시 마늘을 사가는 사람이 있으면 팔아볼 생각도 있지만, 팔리지 않으니 그냥 시늉으로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 마늘 많이 파세요." 헛 인사하고 또 걸었다.

 

 

그런데 지치기도하고 바닷가는 나오지 않고 나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택시는 정확하게 일분 후에 목적지인 바닷가에 도착했다. 1분에 3000원 요금을 냈다. 그곳이 바로 자구내 포구라는 곳이었다. 올레 12코스의 후반부에 있는 지점이었다.

 

 

 

 

<낚시꾼이 차귀도가 보이는 지점에서 낚시질을 한다>

 

 

 

 

<차귀도가 보인다>

 

 

<민박집 방에서 찍었다. 내가 빨아 놓은 양말 너머로 차귀도가 보인다. >

 

 

 

 

<차귀도 섬 사이로 해가 진다.>

 

 

나는 차귀 횟집에 민박을 정했다. 25,000원. 그리고 해가 넘어갈 때까지 그리고 해가 넘어간 후 한참 동안 사진 촬영을 했다. 아마 100장 이상 촬영했을 것이다. 섬과 섬 사이로 넘어가는 태양이 주위의 물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빛을 내뿜었다. 점점 사방이 어두워오자 차귀도의 실루엣만이 마치 흑백 사진처럼 나타났다.

 

 

차귀도 횟집은 일찍 문을 닫았다. 해가 지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도미 3만원짜리 한 마리 잡아 달라고 했다. 오늘은 소주와 100세주를 짬뽕해 먹었다. 그것도 괜찮았다. 아니 24키로를 걸은 사람이, 그것도 아침과 저녁을 거의 굶다시피 한 사람이 돌멩인들 맛이 없겠는가? 주인은 계속해서 튀김이니 뭐니 갖다 주었지만, 결국 나는 반도 먹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만 했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들은 TV 연속극을 보면서 킥킥 웃고 있었다.

 

    :

    돈 많이 벌었습니까?

    아주머니 :

    작년에는 시원치 않게 벌었는데, 올해는 장사가 좀 되네요.

    :

    그 돈 벌어서 다 뭐해요.

    아주머니 :

    뭐하기는 뭐해요. 산에 감춰두고, 땅에도 묻고, 약도 사 먹지요.

    :

    내일 아침 돈 묻어둔 곳 좀 가르쳐 주세요.

    아주머니 :

    그러죠. 그런데 값이 비싸요. 묻어둔 돈의 두 배만 내면, 내 알려드리리다.

     


     

 

*곶자왈: 제주도 방언으로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

 


*"아기가 타고 있어요"는 "아기가 자동차에 타 앉아 있다"와 "아이가 지금 불에 타고 있다"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유모어임. 다른 사람이 이미 써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동차를 보고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곶자왈 이야기와 함께 만들어 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