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우이령을 넘어서
우이령이 개방되었다는 말은 전에 듣고 있었지만, 막상 그곳을 넘어 보아야겠다는 행동으로는 연결되지 못했었다. 아마 북한산이 내가 사는 서울에 있으면서도 먼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지금은 소수의 인원만 입장할 수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을 검색다보니 평일은 일일 입장 정원인 390명을 다 채우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렇다면 한 번 가보자하고, 9월 3일표를 인터넷을 통해 예약하게 되었다. 그날이 바로 하루 전인 9월 2일이다.
<우이령 길 안내 표지판>
9월 3일 집을 나선 것은 8시 반이었다. 아직도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2호선을 타고 동대문 운동장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 수유역에서 내렸다.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대로 수유역에서 시내버스 120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거의 9시 반이 되었다. 근처에서 달랑 2000원짜리 김밥 하나 사서 배낭에 넣고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집에서 먹다 남은 수박 한 덩이가 이미 배낭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50대로 보이는 남자에게 우이령 탐방지원센터가 어디인지 물으니 북한산쪽으로 가라고 손으로 가르킨다. 왠지 미심쩍기도 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차피 북한산 방향일테니 그쪽으로 가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러나 걸어가면서 설마설마 하는 생각과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인정 사정 없이 앞만 보고 팍팍 걸으니 약 15분 뒤에 도선사 입구가 나왔다. 그 앞에 있는 주차매표원에게 물으니, 우이령을 가려면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 좌회전 하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15분, 아니 왕복 30분 헛걸음을 하고 나니 기운이 쪽 빠졌다. 그 사람 덕분에 30분 운동을 더한 셈이라고 좋게 생각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걸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는 내가 석가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 그 50대에게 죽일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속이 시원해졌다.
그러다 보니 생각은 생각으로 이어져 한 국가로 보아서도 국가의 지도자가 국민을 잘 이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잠깐 생각했다. 한 사람의 잘 못으로 전국민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먼 데를 볼 필요없이 북한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다시 원점에서 등산을 시작한 것은 10시경이다. 요즈음 시력이 약해졌는지, 안내판을 어디에 숨겨 세워 놓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이령 안내 표지판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는데 한 부부로 보이는 노인네가 "저기 우이령 안내판"이 있다고 소리쳤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배낭을 내려, 지팡이를 끄집어 내고, 카메라를 허리 주머니에 넣고 허리에 매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안내판에 따르면 지금부터 약 1.7키로를 가면 우이령 안내소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이령 안내소까지 약 1.7키로는 소위 우이동 먹자 골목이다. "좋은 물가 자리 있다, 통개 주문 받는다, KBS, MBC, SBS에 몇 번 나온 집이다."라는 등의 식당 현수막이 눈길을 끈다. 그러고 보니 좋은 물가 자리는 양쪽으로 이들 음식점들이 다 차지 하고 있어서, 등산객이나 산책하는 사람들은 길 가운데 나 있는 메마른 아스팔트 길만을 보고, 그 길만을 밟고, 그리고 그 길만을 생각하며 가야한다. 날은 서늘하다하나 햇볕이 내려쬐어 뜨거울대로 뜨거웠고, 더구나 이미 도선사까지 30분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기에 몸은 상당히 지쳐있었다.
10시반쯤 안내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신분증과 예약한 인쇄물을 요구했다. 한 젊은이가 뙤약볕에 앉아 있다가 내가 준 나의 신분증과 예약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건물 안에서 한 남자가 "확인 끝났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그 물건을 받아 나에게 넘겨준 젊은이는 제주도에 무슨 환경 정화 운동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니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서명을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어떤 젊은이와 안내소 직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남자가 예약을 하지 않고 왔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부탁과 애원고 위협과 욕설을 동반한 승강이와 실랑이가 오가더니 결국 그 남자는 땅바닥에 침을 퇴하고 뱉으면서 발걸음을 돌이켰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이 명박 이놈 어디 한 번 보자."라고 말하면서 사라졌다. 글쎄, 대통령이 이런 것까지 지시를 내리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혀빠지게 30분을 올라온 사람의 헛물킨 헛발질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리라. "나도 오늘 아침에 고생 좀 했소. 좌우지간 모르면 고생이라우."라고 속으로 그에게 말하면서 나는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김신조가 넘어 온 길이라는 안내판이 이채롭다.>
조금 올라가니 경찰 기동대 건물이 왼쪽으로 보이고 멀리 북한산 자락이 상큼하게 다가 온다. 바닥을 보니 모래가 섞인 흙으로 되어 있는데, 도로의 넓이는 차 한 대는 넉넉하게 다닐 수 있고, 두 대가 교행하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할 정도다. 길 옆으로는, 이 길이 생긴 역사와 김신조가 이 길을 넘어왔기에 그 동안 폐쇄되었다가 올해 7월에 처음 민간에 개방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좀더 가니 "신발을 벗고가면 좋다"는 안내판이 보였으나, 실제로 신발을 벗고가는 사람을 내가 본 것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허락받은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을 구경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나처럼 혼자가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체로 2~3명 때로는 7~8명이 떼지어 가면서, 먹고 마시고를 반복하며 걸어갔다. 젊은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여자들은 약 30~50대로 보였고, 남자들은 거의 다 50대 이상으로 보였다.
길 옆에는 졸참나무와 잡목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듬성듬성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길 옆에는 나름으로 꽃밭을 만든다고 이런저런 꽃을 심어 놓았으나,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땅이 기름지지 않아서인지, 핀 꽃은 병든 닭이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비들비들해 보였다.
30분을 걸어가니 정상이다. 시각은 11시 4분. 이렇게 허망한 산이 다 있나!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급습하기 위해 이 길을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좀 과장하면 삼척동자라도 넘을 그런 고개다. 북한산을 넘어가는 가장 낮고 쉬운 고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이령 정상에는 북한군이 내려오면 막을 방비책으로 시멘트로 만든 돌무더기 장치가 떡 버티고 서 있다. 그 담장 위에 있는 돌을 아래로 떨어뜨려 얼마나 남침을 저지할 지 모르지만, 이런 시설은 철원이나 파주 이북으로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시설물이다.
조금 내려가면 넓은 광장이 나온다. "바위고개"라는 노래의 안내판이 서 있다. 이 노래의 저자는 "바위 고개"가 마음 속의 고개이지만, 사람들은 이 바위고개를 바로 "우이령 고개"로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아까 사온 김밥을 먹을까 하다가, 여름에 김밥을 먹다가 식중독에 걸렸다는 방송을 여러 번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포크로 찍었던 김밥을 다시 집어 넣고, 도시락에 들어 있는 수박을 꺼내 먹었다.
옆에 앉은 50대로 보이는 남자도 도시락을 꺼내 먹었는데, 그가 말이 없기에 나도 말을 걸지 않아서 10분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각자의 음식을 먹었다. 서먹서먹하다 했더니 바로 그 남자에게 핸드폰이 걸려왔다. 다짜고짜로 그는 "그 새끼 죽여 버려. 지금 내가 산에 와서 있어서 그러는데, 이런 나쁜 놈이 있나."라고 말하면서 무지막지한 욕을 해댔다. 나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나는 은근히 야코가 죽었고, 슬금슬금 그를 피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에 이기지 못하는지, 먹던 밥이 반은 자기 도시락으로 다시 튀어나오도록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 댔다. 좋은 산에 와서 마음을 정화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만 쌓아두고 가니 참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
<오봉 위에 놓인 돌이 인상적이다.>
조금 내려오면 오봉이 잘 보이는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우이령은 오봉을 오른쪽으로 끼고 우이동에서 교하리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오봉을 자세히 보니, 우이암 쪽에서 보았던 것 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그 위용을 들어낸다. 오봉의 특징인 봉우리에 올려진 돌덩어리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동네 총각들이 한 여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바위에 돌을 얹어 놓는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평범하면서도 걷기 좋은 길은 정상에서 거의 4키로 정도 뻗어 있다. 하산 길은 올라갈 때보다 더욱 좋아서 차 두 대가 거리낌 없이 교행할 수 있는 정도다. 물론 바닥은 계속 모래밭으로 되어 있다. 한참을 가다보면 유격장이 보이고 군부대가 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 오봉을 볼 수 없는 지점이 바로 오봉의 끝 지점인 교하리다. 교하리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12시 20분이다.
<구파발 역의 분수>
구파발로 가는 버스를 타고 구파발역 근처에 내리니 점심 먹을 데가 없었다. 본래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기왕에 이렇게 된 바에야 최근에 개방된 서울 광장에 가보기로 했다.
<서울 광장>
경복궁역에서 내려 세종문화회관쪽으로 나오려면 현대사옥 건물을 통과해야 했다. 현대 사옥 건물 내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낙지 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얼마나 매운지 한 숟가락 먹고 물 마시고, 또 한 숟가락 먹고 물을 마셔야 했다. 배가 고플대로 고팠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남겼을 밥을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다. 물은 다섯 컵을 마셔 나에게 주어진 물병이 송두리채 날아갔다. 아마 혼자 와서 주어진 물병에 있는 모든 물을 다 마시고 가는 사람은 아마 내가 전무후무할지도 모르겠다. 거의 1리터를 마셨으니 말이다.
밖으로 나오니 거기가 바로 서울광장이었다. 말로만 들을 때는 도대체 서울광장이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와서보니 바로 세종문화회관과 경복궁, 그리고 교보문고와 이순신 장군상으로 둘러싸인 상당히 넓어 보이는 지역을 말했다. 차선을 줄여 전에 있던 정원을 좀 넓히고 다시 재 정비한, 가슴이 탁 트이는 그런 공간이었다.
<서울 광장>
대부분의 바닥은 각종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날이 더워서 꽃이 생생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임시로 만든 연단 밑에는 일하다 지친 일꾼들이 숨을 헐떡이며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화단 옆에는 SBS에서 무슨 전시장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는 음악에 따라 분수가 리듬을 타며 솟구치며 춤추고 있었다.
한 여자 아이가 분수 사이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즐겁게 놀다가 갑자가 물기둥이 치솟자 꼼짝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놀란 엄마가 딸을 데릴러 가다가 "털푸덕"하고 넘어졌다. 일어난 엄마는 쏟아지는 분수 속에서 딸 아이의 엉덩이를 몇 차례 두들겨 팼다. 아마 자신의 창피감을 풀어보려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딸은 더욱 큰 소리로 마치 여름 강가의 미루나무 위에 있는 매미 울 듯이 울어댔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근심반 재미반으로 보면서 킬킬거리기도 하고 걱정어린 듯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더 큰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이번에는 엄마도 깜짝 놀랐는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엄마도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온 아줌마는, 사선을 뚫고 나온 지친 병사처럼, 그리고 죽은 자식을 안고 절망하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땅을 보고 힘없이 걸어갔다.
<서울 광장>
마치 영화 한 장면을 본듯한 나는, 교보문고에 갈까하다가 기왕에 베린 몸 계속 한 번 갈데까지 가보기로 하고 청계 광장으로 갔다. 날이 더워서인지 다리 밑에만 사람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발을 담근 사람도 있고, 그냥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조는 사람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피라미로 보이는 물고기가 사방에서 눈에 띈다는 것이다. 피라미가 산다는 것은 물이 맑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에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으므로 많이 머물지 않고, 그곳을 떠나 파고다 공원으로 향했다.
<청계천의 물고기>
<청계천 수표교 아래>
전에 노인으로 들끓었던 파고다 공원은 이제는 한가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공원 앞에 몇몇 노인들이 돋보기나 신발 그리고 허접한 옷가지를 리어커에 싣고 팔고 있었다. 더러 일본인 관광객이 눈에 띄었으나 그들도 그곳에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런데 이색적인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보안법 철폐를 외치는 몇몇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외쳐대는 저 소리는 보수라는 거대한 바윗 덩어리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비슷하리라.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이루려는 그들의 타들어가는 입술을 보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없는 죄지은 심정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누가 잘 했고 누가 잘 못했나? 돈을 벌고 공부를 해야할 저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더구나 길 가는 사람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이 뜨겁고 외로운 곳에서, 저들은 서글픈 표정으로 한숨을 쉬어가며 도대체 왜 저래야만 하는가?
<파고다 공원 앞>
종묘에 도착하니 입구에서부터 노인들이 시골 장날을 연상시키듯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있었으나 삼천만의 오락이라는 고스톱을 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간혹 할머니들도 보였지만, 남녀의 비율은 남자 95명에 여자 다섯 명 정도였다. 한 쪽에서는 이미 술에 취했는지 놀다가 지쳤는지 떼를 지어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또 한 쪽에서는 무슨 집회를 하는지 스피커 소리가 시끄러웠다. 또 술을 마시는 사람도 여기 저기 많이 눈에 띄었다. 바로 옆에 있는 싸구려 식당에서는 무엇을 파는지 모르지만 노인들이 술이 취해, 마치 갓결혼한 신랑 처갓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그 옆에 있는 수퍼에 물을 사러 들어갔는데, 여기서도 막걸리 한 병과 새우깡을 사는 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인이 종이컵을 하나 집자, 알짜리 없이 "20원입니다."하면서 수퍼마켓 계산원이 낭랑하게 외쳐대는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웬만하면 공짜로 하나 주시지!
<종묘>
전에 여러 번 가 본 적이 있는 종묘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단체 일본인이 전세를 낸 것처럼 여기저기 일본인 판이다. 육교를 지나 창경궁에 가니, 종묘로부터 멀어서 그런지 사람이 훨씬 적었다. 한 바퀴 돌면서 몇 커트 사진을 찍었다. 피곤하여 잠시 쉬는데 남자 5, 6명, 여자 두어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하는 말투나 내용으로 보아 소위 말하는 로맨스 그레이인 듯 했다. 전에도 만나서 무도장에 갔었던 듯 했고, 가끔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음식점도 드나들고 놀러도 다니는 그런 노인들인 듯 했다. 미래의 나의 모습을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창덕궁 생각이 났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다르다! 왜 그런지 단 한 번도 창덕궁에 가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다시 종묘를 나와 돈화문이라고 써 있는 창덕궁에 도착했다. 그때 시각이 오후 4시쯤이었다. 창덕궁은 평소에는 사람들을 모아서 안내자를 따라 다니면서 관람하는데, 매주 목요일은 자유 개방일이라고 한다. 너무나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옆에 있는 매표소로 갔다. 입장료가 15,000원이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역시 동그라미가 세 개가 붙어 있다. 외국인들은 말 없이 15,000원을 지불하고 들어갔지만, 한국인들은 놀라서 그냥 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마 한국인들이 부담을 느끼는 가격대를 책정하여 입장하는 사람의 수를 줄이려는 의도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들어가는 사람이 더 줄면 가격을 더 낮출 것이고, 사람이 많이 몰리면 가격을 올리려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사회 시간에 배운 수요와 공급을 적절히 맞추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15,000원을 지불하고 안에 들어가서 본 첫 느낌은, 역시 15,000원의 값어치는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넓게 펼쳐진 궁내, 멀리 아름답게 놓여진 수 많은 건물, 그리고 뒤에 숨어 있다는 비원까지 계산하면 15,000원이 비싸다고 할 수는 없는 듯이 보였다. 부산 옆에 있는 외도의 입장료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외도보다 더 볼 것이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지는 않았다.
6시에 문을 닫으므로 행동을 빨리 해야했다. 짐을 맡기고 카메라만 가지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 무슨 낭패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아무 문제가 없던 카메라가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바테리를 다시 교체했으나 마찬가지다. 눈을 카메라에 갔다 대고 보면 앞이 캄캄하게 보이는 것이다. 여러번 껐다 켰다해도 소용없어서, 렌즈와 카메라의 본체를 분리해 보았다. 나는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카메라 안에 있는 거울(mirror)이 나와 있지 않은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미 입장료 1만 5천원은 지불했는데 어쩐다냐? 하는 수 없이 비디오 카메라를 배낭에서 꺼내서, 그것으로 카메라 기능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처음에 들어간 곳이 궐내각사라는 곳인데 하도 복잡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마치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허접한 카메라라 찍어도 지붕만 찍히고 그것도 희끼무리하게 나오는 듯하여 내내 기분이 언짢았다. 사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구경이나 해 두고 나중에 10월에 단풍이 들면 그때 다시 오기로 하고, 정처없이 사정없이 걸었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구경하고 비원으로 들어갔다. 마침 연경당에서는 국악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늦게 들어가 판소리 심청전 끈 부분만을 보고 나왔다. 대부분의 관람객은 외국인들이었는데, 그들이 무엇을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한국인들이 저런 노래를 옛날에 불렀구나하는 정도만을 느낌으로 알았을 것이다.
--사진기 고장으로 이후의 사진은 없음---
옥류천이라는 곳은 작은 연못과 보리밭 그리고 아기자기한 여러 건축물이 놓여 있는 곳이다. 일본 여자 두 사람이 사진을 찍어 달라는 듯하여 "샤신 도리마쓰까?(사진 찍습니까?)"라고 물으니 "하이, 하이"한다. 그들의 사진기를 내가 건네 잡자마자, 두 여인이 중국 무술을 하는 듯이 서로에게 칼로 찌르는 흉내를 낸다. 나는 내 평생에 그런 포즈를 본 적이 없고, 또 그것을 보고 그렇게 큰 소리로 웃어 본 적이 없다. "니혼노 사무라이 데스까?(일본 사무라입니까?)"라고 물으니 그들은 칼로 배를 자르는 흉내를 내면서 "하라끼리(할복-腹切)"이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발길을 재촉하여 출구에 오니 5시 45분이다. 입구에 있는 안내원의 일본말이 대단히 능숙하다. 그런데 그는 일본인을 잡고도 일본말, 미국인에게도 일본말, 독일인에게도 일본말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말과 한국말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양인들은 그의 일본 안내말을 들으면서 아주 신기해 하는 눈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관광객이 사진을 찍으려면 한 시간에 4만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처럼 대충 찍는 것은 그냥 봐주지만, 삼각대를 놓고 찍는 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돈을 받는다고 한다. 하여튼 오늘은 이런 곳이 있다는 것과 매주 목요일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15,000원의 값은 된다고 생각했다.
10월 목요일 어느 날 노란 단풍으로 둘러싸인 창덕궁과 비원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찍지 못한 것을 포함하여 마음껏 셔터를 누를 것이다. 그리고 가는 가을을 애정어린 눈빛으로 다시 볼 것이다.
한참 안내원과 이야기를 끝내고 막 대문을 넘어서려는데, 아저씨가 큰 소리로 나를 부른다. "아까, 혹시 배낭 이곳에 맡기지 않으셨어요?" "아이구 내 정신이야. 이런 정신머리 가지구 무슨 사진은 사진!" 나는 재빨리 배낭을 꺼내가지고 안국역으로 향했다. 마침 수업을 끝내고 나오는 남녀 고교생들이 한 바탕 웃으며 씩씩하게 지나간다. 그들의 웃음 소리가 마치 나의 건망증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린다. 오늘의 이 건망증 사건을 건망증의 도움으로 빨리 잊었으면 좋겠다.
(2009년 9월 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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