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성의 위치>
<여행 경로>
중국 윈난성 여행기 2
나는 중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시끄럽고, 더럽고, 무례한 것이 중국의 특징이라면 하나의 특징일 것이다. 모든 것이 가짜인 나라가 중국이다. 티벳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일부 당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곳이 중국이라고 알고 있었다. 북경이나 상해, 장가계, 계림, 서안 등 중국 동부 쪽 웬만한 곳은 다 다녀왔다고 생각했던 그런 나라다. 그래서 앞으로 갈 곳은 라오스나 미얀마, 인도 등지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중국 여행을 한 후, 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중국이라는 매력에 흠뿍 빠져들었으며, 중국어를 배우겠다는 향학열에 불타서 돌아왔다. 앞으로 중국은 내가 가장 많이 찾는 나라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세계 어느 곳에 있는 것이건, 중국에 가면 모두 다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온대, 한대, 열대는 말할 것도 없고, 높은 산이면 높은 산, 사막이면 사막, 폭포면 폭포, 비경이면 비경 없는 것이 없는 곳이 중국이다. 더구나 중국은 한국에서 가깝고, 아직까지도 한국에 비해 물가가 싸다.
중국 사람들은 돈이면 환장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운남성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존심이 강했으며, 공짜로는 어떤 형태의 물건도 받지 않았다. 어떤 팁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한테서 도움받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중국은 남한 면적의 100배가 되는 땅이다. 내가 여행한 운남성의 면적은 남한의 4배다. 10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13일을 여행했다고 하나, 가는 날과 오는 날을 빼면 11일 여행한 셈이다. 이를 비율로 계산해 보면, 남한을 3일간 구경한 셈이다. 즉 서울에서 하루, 속초에서 하루, 그리고 경주에서 하루 구경하고, 한국 구경 잘 하고 왔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박 겉 핥기도 이런 겉 핥기가 없다.
구름이 흐르는 산의 남쪽이라는 뜻을 지닌 윈난성(云南省: 운남성)은 26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하는 곳이다. 대체로 대지가 높은데, 샹그릴라에 있는 6740미터의 매리설산이 가장 높다. 우리가 도착한 쿤밍(昆明: 곤명)은 위도상으로 대만의 타이페이와 같은 북위 25도에 위치해 있다. 열대지방이라고 해야할 것이나, 해발 1900미터인 고지대이기에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약간 추웠다.
중국 배낭여행 동호회 회원들인 우리 여행단은, 모두 21명이라는 대 군단이었다. 안내자가 2명, 19명이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었다. 평소에는 10명 남짓하게 참석했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이곳을 개발하여 가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 것으로 보인다.
윈난성에는 국제 공항이 쿤밍에만 있다. 한국에서는 대한항공이 일주일에 한 번 운행할 뿐 다른 항공기는 운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은 상해로 일단 가서, 거기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곤명으로 간다.
<서양인 몇 명이 험프 객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우리가 쿤밍에 도착한 것은 10월 12일 밤12시가 다 되어서다. 타봉객잔(보통은 hump 객잔이라고 한다)에 도착하니 서양인 몇 사람이 옥상에서 맥주를 들고 있었다. 동양인은 우리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서양인들이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국 하늘에는 별이 듬성듬성 박혀있었고 사방이 적막강산이었다.
안내자의 인도로 서로 인사도 할겸 골목에 있는 식당에 들렀다. 그때가 아마 새벽 한 시쯤 되었을 것이다. 서로 서먹서먹함을 달래기 위함이리라. 간단한 각자의 소개에 이어 칭다오 맥주가 돌아갔다. 그러더니 안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로 옆에 있는 길거리 포장마차로 가자고 했다. 2시가 가까워 왔음에도 포장마차의 굽고 볶고 지지는 냄새는 천지를 진동했다. 후라이팬에 갖가지 음식 재료를 넣고 불 위에 굽는 아줌마는, 한국에서 온 구경꾼을 의식한 듯 더욱 신나게 하늘에 음식을 내동댕이쳤다가 다시 후라이 팬에 담아 넣었다. 보는 사람이 박수를 치고 탄성이 나왔다. 아줌마는 더욱 열을 내서, 그 열기와 가스불의 열기가 해발 1900미터의 기온을 따뜻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포장마차에서 아주머니가 능숙한 솜씨로 요리를 한다.>
우리가 묵은 타봉객잔은 일종의 게스트 하우스다. 게스트 하우스는 중급 또는 싸구려 여관으로 알고 있으면 된다. 일 인실, 이 인실, 4인실 등에서부터 여러명이 모여 자는 다인실까지 골고루 갖춰진 방이다. 요금은 얼마인지 모르지만 일 인당 1-2만원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험프 객잔 바로 옆에 있는 금마 건물>
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바로 옆에 전통 건물이 있었는데 한자로 금마(金馬)라고 씌여 있었다. "진마"라고 발음될 것이다. 이곳 일대를 진비광장이라고 부른다. 하루 종일 사람들로 들끓는다. 거기에서 길을 하나 건너면, 자동차의 통행을 금지시킨 넓은 광장이 다시 나타난다. 나는 걸을 수 있는데까지 걷다가 되돌아 왔다.
<윈난 민족촌 입구>
우리는 윈난에 올 때, 일인당 120만원을 냈다. 120만원 속에는 한국과 중국의 왕복 항공권, 도시와 도시 사이의 이동 교통 요금, 그리고 저녁 식사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불포함된 것은 도시 내에서의 개인 이동 경비, 그리고 아침식사와 점심식사 비용이다. 유료 관광지에 입장할 때도 각자가 각자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입장료가 비쌌다. 최소 우리돈 5,000원부터 25,000원이 드는 곳도 있다. 어떤 날은 입장료와 케이블카 비용을 포함하여 60,000원이 드는 날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비원의 입장료가 15,000원인 것을 생각하면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놀랄 만한 돈이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중국 관광객이 들끓었으며, 긴 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중국이란 나라를 정말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윈난 민족촌>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윈난 민족촌이다. 각 소수 민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민속촌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러 민족을 한 군데 모아 놓았기에 왜그런지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안내책자에 보면, 다이족, 바이족, 나시족, 장족 라후족, 이족 모소족 등을 먼저 보라고 되어 있으나, 우리는 되는대로 보기로 하고 되는대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설령 이들의 공연을 볼 수 없다하여도,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대규모의 공연장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민족촌: 우리의 공 던지기와 비슷한 놀이>
<젊은이가 진지하게 소 머리에 조각을 한다.>
<오리 구이인지 닭 구이인지>
인상 깊었던 곳 중의 하나는 바이족(白족) 마을이었다. 바로 앞에서 오리 고기를 구워서 판다. 불쌍하게도 대나무에 뀌어져, 그 대나무가 입에서 시작하여 몸전체를 관통하는 오리가 불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죽어서까지 저렇게 비참한 꼴을 해야하니 오리의 팔자도 참 기구하기도 하다. 오리 한 마리 구운 것을 찢어서 몇 점 먹어보았으나 한국의 오리만은 못한 듯 했다. 마침 누군가가 술을 내 놓아서 그런대로 술맛 겸 분위기 겸 해서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자꾸 바라본다. 나이를 따지면 내가 더 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국인 아줌마 셋이서 비닐 봉지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서 먹고 있었다. 나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냥 "션머"하면 된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지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국의 할머니들이 그렇듯, 인정이 많아서인지 먹다만 과일을 주더니, 다시 봉지에서 과일을 꺼내어 썩은 부분을 돌여내고 성한 부분만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기는 했지만, 어디가나 사람은 사람이고 인정은 인정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 맛이 있는 것이리라.
<백족 마을 바로 옆에서 공연을 한다. >
<민족촌 내의 교회>
어딘가를 가니 교회 표시가 있었다. 중국에 교회가 있다! 가보니 한국인들이 예배를 보고 있었다. 중국에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의 한 교회에서 단체로 구경을 왔던 것이다. 기둥에 쓰여진 한자 중 삼위일체라는 말이 내가 아는 유일한 말이다. 20명 정도인 한국인들은 이곳저곳 살펴보며 무엇인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힘이 부쳐 졸고 있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민족촌 대 공연장>
다른 동료들은 다시 타마객잔으로 돌아가고, 나를 포함한 세 명만이 민족 공연장에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약 반 정도 관광객이 찼는데, 입구에는 사진 촬영 금지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쫄아서 구경만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촬영하는 것을 보고 사진기를 꺼내 촬영했다.
배경에는 큰 스크린에 영화가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앞에 있는 무대에서 40-50명 정도, 때로는 백 명 정도의 공연단이 자기 고유의 민족 복장을 하고 갖가지 춤을 추었다. 변화를 주려는 듯, 손님을 무대에 올려 배우 복장을 입혀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 배우들이 관람석을 돌며 춤을 추기도 했다.
<민족 공연>
<민족 공연>
우리가 묵는 타봉객잔은 어떤 건물의 3층에 있다. 그런데 2층에 어마어마하게 큰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은 일년 내내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년 365일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기 때문이다. 수 백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이 곳은 쿤밍 시내에서도 유명한 집이라고 했다. 메뉴를 보니 음식의 종류도 끝이 없는 듯 했고, 종업원도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묵은 타봉 객잔 2층의 식당>
저녁 식사를 하러 그 집에 들어갔다. 토마토와 버섯을 넣고 사골뼈 삶은 물 같은 육수에 기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세수대야 같은 큰 그릇이 있었다. 여기에 고기와 채소를 넣어 샤브샤브를 만들어 땅콩 소스에 찍어 먹는다. 시각적으로는 느끼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먹어보니 그 맛만은 대단했다.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은 고추장이 없이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바로 이 식당에서 자전거 여행을 수 년째 하고 있는 한국인 임종태씨를 만나게 된다. 다른 곳을 여행하다가 중국에 온지 이제 6 개월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가 쓰는 하루 생활비는 단돈 5000원. 먹는데만 들어간다. 아무데나 빈 공간만 있으면 텐트를 치고 잔다. 중국인 자전거 여행자와 함께 다니다가 헤어지면서 서로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동안 의지했던 친구가 없어 우울증에 빠진듯한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그의 자전거에 중국기와 한국기를 꼽고 다녔는데, 한국기를 조금 높게 매어 달고 다녔다고 한다. 그랬더니 중국 경찰이 시비를 걸기도 하고, 보통 사람들이 시비를 걸기도 했다고 한다. 언제 한국에 돌아갈 것인지를 묻자, 그는 곧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어 한국의 회사를 찾아 다니면서 스폰서를 서 달라고 이야기 해야겠다고 했다.
단지 우리와 함께 하루 동안 같이 있었지만, 헤어질 때 그는 울먹울먹했다. 내가 보아도 그렇게 굳센 청년은 아닌 듯 했으나, 어디서 그런 용기와 배짱이 나서, 빈 손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는지 알 길이 없다. 그와 명함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생각은 여행 내내 그치지 않았다.
한국에 와서 그의 위치를 추적해 보니 그는 7 개월간의 중국 대 장정을 마치고 지금은 베트남에 있다.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라오스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가 세계 여행을 하면서 사진과 경험담을 올리는 홈페이지는 http://phototour.tistory.com 이다.
밤 9시행 따리(大理 : 대리) 행 기차를 타기 위해 쿤민 기차역에 도착했다. 십몇년 전 유럽에서 침대차를 타보고 처음 타 본다. 그러니까 좀 젊었을 때, 90년대에 유럽에 20여일간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 생각이 났다. 혹독한 더위와 피로에 휩싸여 돌아다니는 것초차 싫었던 악몽같은 여행이었었다. 혹서를 참지 못한, 털을 온통 벗은 닭이 눈만 꺼벙이며 목을 축 내리우고 숨만 깔닥이던 그런 모습이었었다. 그 고통을 참지 못했는지, 나와 함께 여행했던 아내는 그 유럽 여행을 하고 딱 1년 뒤에 세상을 떴다. 그 여행이 잘 한 여행이었는지 잘 못된 여행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침대차 한 칸에 네 명이 타는 그런 방에 안내되어 들어갔다. 내가 아래 칸에 탔고, 다른 한국인 여자가 위층에 탔다. 맞은 편에 중국인 젊은 여자, 그리고 그 위에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중국인 두 사람은 아마 애인인 듯 했고, 서로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중국에 가기 전에 8시간 배운 중국어로 나는 나 자신을 소개했다. "추츠 찌엔미엔(처음 뵙겠습니다.)" 그들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찡 뚜어뚜어 꽌 짜오.(잘 부탁합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그들이 영어를 못하고 내가 중국말을 못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를 사람이 보면, 원숭이는 사람을 보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 뜬채 그렇게 30분을 보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마치 맛선을 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사진이나 찍어두자고 손짓발짓을 하여 한 방찍고 잠을 청했다.
참으로 말을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일까? 아무런 사전 교육도 없이 동남아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사는 한국 농촌 총각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좀 살다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다하나, 마음 속 깊은 말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말이 없는 삶은 껍데기 삶이다. 누가 그들의 고통을 알아 주겠는가?
이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말이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안다. 내가 교실에서 무지막지한 욕을 1분간만 하면 나는 아마도 사표를 써야할 것이다. 나의 아들이 "네까짓 것이 무슨 아버지냐?"라는 단 한 마디의 말에 나와 나의 아들은 영원히 부자관계를 단절할 수도 있다. 말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가 너무 좁아 다리를 뻗을 수 없는 잠자리에 누웠다. 다리를 삼각형으로 구부려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 왔다. 기차 바퀴와 철도 사이의 덜커덩 소리가 자장가 속삭임처럼 잔잔하게 들렸다. 간간히 커튼 사이로 달빛이 들어왔다 사라졌다. 따리행 침대차는 그렇게 밤 공기를 가르며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쿤밍에서 단 24시간도 채우지 못하고서 말이다.
<같은 침대 칸에 있었던 중국인 두 사람>
<아가씨 손톱의 매니큐어>
(2009년 10월 2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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