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성 여행기 5 — 따리에서 리지앙으로
<10월 16일 여행 경로: 따리에서 리지앙까지>
10월 16일 아침 일찍 리지앙으로 출발했다. 물론 시내버스나 시외버스가 아니라 대절한 버스다. 누가 이야기했다. 가는 길에 염색 공장이 있으니 한 번 들르자는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염색 공장과 염색한 옷을 살 수 있는 전시장이 있다고 했다. 이번 여행 중 자발적으로 그리고 처음으로 들른 영세 규모의 쇼핑센타가 바로 여기다.
무엇을 이용하여 염색 원료를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옷에 물들이는지를 한 아줌마가 설명했다. 설명한들 뭐 누가 알기나 하나? 중국말을 알아야 면장이라도 해먹든지 말든지 하지. 캄캄한 밤중에 윙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염색 집 거실에 걸려있는 아주머니 사진: 상장이며 갖가지 사진들이 아주머니의 과거를 말해준다.>
<염색집에 걸려있는 포목: 역광사진>
옷에도 관심이 없고 염색에도 관심이 없는 나는, 사람들을 피해 그 집 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지금은 쭈그렁망텡이 할망구가 된 염색집 할머니의 젊었을 때 사진이 벽에 걸려있었다. 한 때는 저렇게 젊었고,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지금은 요 모양이 되었구나. 햇빛에 그을리고 바람에 휘둘리고 세월따라 흘러가다 보니, 지금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저런 할머니가 되었구나! 옛날에 공부를 잘 해서 받은 것인지, 염색을 잘 해서 받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상장이 벽에 덩그러니 걸려있다. 할머니 서러워 말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는거여, 인생 뭐 별거 있어? 그냥 살아. 이것저것 따지면 한숨과 눈물 뿐여. 그냥 잘 살아. 나도 할머니 곧 따라 갈기여.
염색 공장을 나와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차의 속도가 느려진다. 창밖을 보았더니, 군인을 실은 자동차가 끝이 없이 지나간다. 군대가 이동하나보다. 역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인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던가? 무자비하게 반대자를 진압하고,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사람들이 아니더냐? 목숨을 날파리처럼 날려보내 충성을 다 하는 것이 그들 아니던가? 아무리 가도 군대 차의 행렬은 끝 날 줄을 몰랐다. 약 30분 정도 지나니 드디어 차의 행렬이 끝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한국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했다. 멀리 펼쳐진 들판에는 듬성듬성 농작물이 보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산등성이로 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은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여 주었고, 마을 뒷 산은 다시 뒷 산으로 이어져 끝없는 산들이 병풍처럼 겹겹이 놓여 있었다.
중간 지점에서 한 번 쉬었는데, 한 들판에 거대한 쇼핑센타가 있었다. 주로 그 지방의 농산물과 가공 농산물을 팔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일단 그 쇼핑센타에 들어가면 미로처럼되어 있는 길을 따라 약 15분간 가야하는데, 요소요소마다 알 수 없는 중국말로 종업원들이 한 가지 물건을 더 팔려고 정성을 다 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일을 하루 이틀 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젊은이는 그저 레코드판 돌아가듯이 상투적으로 공중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나는 중국에서 커피가 그리 많이 나는지 처음 알았다. 광고판에 커피 선전이 대단했다. 나는 여기에서 들깨로 만든 넓적한 엿 비슷한 것을 약 3000원어치 샀는데, 이것은 나중에 호도협 여행할 때, 피로에 지친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거기를 벗어나면 또 무슨 시계점과 목걸이 반지 판매소가 기다리고 있다. 아이구, 빨리 나가야지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다.
<따리와 리장의 중간 쯤에 중소 도시 하나가 있다. 이름은 잊었지만 장날인 듯 하다.>
점심 때가 되어서 한 중소 도시에 도착했다. 길가에 음식점과 노점상이 죽 늘어서 있다. 본래 이곳이 소수 민족이 사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옷과 모자 그리고 그들이 메고 있는 바구니를 보니 정말 여기가 중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된다.
한 할머니가 있어 사진을 찍으려하니 도망친다. 진심어린 부탁은 부처님도 들어준다고 했던가? 결국 할머니는 잠시 포즈를 취해 주었다. 곱게 전통복을 차려입고 끈으로 가슴을 장식한 할머니 —무심한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버섯으로 가득찬 얼굴에 환한 미소가 넘쳤다.
거리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읽어보니 차마고도상의 요충지라고 되어있는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다음 흘려쓴 지명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 광고판 아래서 옷가지 몇 점을 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젊은이를 보니 참 딱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가끔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예컨대 여러 명의 노인들이 과일 몇 개를 갖다 놓고 파리를 쫓으며 앉아 있는 가운데, 그 속에 약 20살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가 역시 과일 몇 개를 갖다 놓고 손님이 사주기를 바라는 모습 같은 것이다. 늙건 젊건 일자리가 없으니 그렇게라도 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가나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리지앙에 가까이 왔나보다. 창 밖으로 웅장한 옥룡설산이 보인다. 앞으로 이틀 동안 저 산의 뒤쪽을 트레킹할 예정이고, 또 며칠 뒤에 샹그릴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리지앙에 들려 케이블카를 타고 저 산을 오를 예정이다. 멀리서 보이는 옥룡설산(玉龍雪山)의 하얀 부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어떤 사람은 눈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흰 바위라고도 했다. 같은 고도상의 다른 부분에 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는 흰 바위일 것이라고 주장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바로 만녀설이었던 것이다. 즉 고도가 높아 일년 내내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쌓여 있는 것이다.
MCA라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여 커피숍에 들렀다. 방 배정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20명이라는 대 군단이 들어서니 마침 거기에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서양인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집을 나선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미 힘든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사실 여행이라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종일 생고생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누가 뭐라할 사람 없겠지만, 자기가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일단 아침에 호텔 방을 나오면 항상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본다. 어딘가를 가야하고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고, 알 수 없는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어야 하고 또 그 경험을 감내해야 한다. 좋게 말하면 세상이나 슬슬 보면서 인생 즐기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돈 주고 생고생하는 것이다. 옛날 영어 책에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짐을 호텔 방에 두고 거리 구경을 나섰다. 골목을 지나가는데 유공방(有空房)이라는 여관 안내판이 눈에 띈다. 호텔에 "빈방 있다"는 뜻이다. 물론 중국어로 읽으면 "요우 콩 팡"이 될 것이다. 왜 그런지 중국어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 명료하지 않은가? 그 위에 보이는 忆古客栈(억고객잔: 이꾸커잔)에서 첫 자는 기억할 억(憶)자이다. 즉 옛날을 회고하는 여관이라는 뜻이다.
<리지앙의 고성 내부 지도의 일부: 마치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길을 잃으면 어디가 어딘치 찾을 수가 없다.>
<고성 중심지인 물레방아 광장: 나무를 깎아만든 널빤지에 소원을 적어 놓은 장식품. 더 이상 걸데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차 있다.>
<리지앙 골목>
리지앙의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져 서울 인사동의 수백 배 또는 수천 배가 되는 면적이다. 인사동이나 효자동, 또는 남산 한옥마을에 몇채의 한옥이 있는지 모르지만, 리지앙 고성 내에 4200 채의 전통 가옥이 밀집해 있다하니 가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시골의 한 마을이 100가구가 있다고 치면 42개 마을이 한 곳에 모여 있는데 모두 1-2층 기와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끝없이 펼쳐진 나즈막한 전통 가옥이 눈이 닿을 수 있는 범위까지 펼쳐져 있다. 그래서 리지앙은 중국 서남부의 최대의 관광지로, 해외에서는 물론 중국 전국 각지에서 물밀 듯이 관광객이 몰려든다.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쉽상이다. 지도를 들고, 방향을 생각하며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며 걸어야 한다. 걸어가면서도 어디가 어디인지, 그리고 길을 잃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니다가 결국은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그래서 나는 더욱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자주 확인해야 했다.
<사방가라는 광장에서 할머니로 보이는 사람들이 전통 춤을 추고 있다.>
특이할 것도 없고, 또 특이하지 않을 것도 없는 민족 춤을 추는 노인 무용수로 가득 찬 사방가에 도착했다. 노인들이 춤을 추는 것이다. 한국에는 어디를 가든지, 어떤 텔레비전을 보든지, 대체로 젊은이가 판을 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나이가 든 사람들이 곳곳에서 문화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나이트클럽에서 야간에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고 있을 뿐이다.
<사자산에 있는 만고루라는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골목길을 한 참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다가 인형이 신기하여 한 장 찍었다.>
<만고루라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리지앙 시내의 중요부분. 16-80미리 카메라로 찍었지만 카메라의 시각이 좁아 일 부분만 찍혔다. >
<사자산 정상에 있는 탑>
정상에 스님이 계셨다. 그분이 나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몇 마디 말 중에 "워 쉬 한궈런(나는 한국인입니다.)" 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하니 스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서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럳다가 서로 한참 웃다가 헤어졌다. 스님이 큰 소리로 잘도 웃는다.
<아저씨가 여기에서 무엇을 끓이는지 나는 모른다. 중국말을 할 수 없기에. 중국 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담배를 훨씬 많이 피우는 듯 했다. >
중국 중앙 정부는 13세기에 나시족이 사는 리지앙을 침략하여 굴복시켰다. 그러나 중앙으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어서 통치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중앙정부에 호의적인 목씨(木氏) 가문을 내세워 리지앙을 통치하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 목부는 바로 이 목씨 통치자가 머물렀던 곳이다. 성이라면 성벽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성벽이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목씨가 성 주위에 벽을 두르면 곤란한 "곤"자가 되기 때문에 성벽을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口(성벽) +木(목씨) =困(곤란할 곤)〉. 하지만 본래 있었던 목부 건물은 1996년 지진 때 거의 파괴되고, 새로 지었다 하니, 규모의 대단함과 건축물의 아름다움은 인정하되 역사적 건물이 아니니 그 또한 섭섭하기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남대문을 새로 지으면 명목상의 고대 건물이지 실제로는 현대 건물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떻든 목부는 경복궁에 있는 또는 비원에 있는 거대한 건물과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게 들어선 곳이라고 보면 된다.
<목부(木府) 건축물 앞에서 한 아가씨가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목부에서 바라 본 옥룡설산>
넋을 놓고 구경하는데 , 6시에 어떤 음식점으로 오라고 가이드가 말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함께 가서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식당 이름을 알려주고 택시를 타고 오건, 걸어서 오건 그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택시 운전수에게 음식점을 알려주었다. 나의 서툰 발음을 못 알아 듣는지 그 운전수는 몇 번 더 되물었다. 나는 그 여자 운전사에게 종이에 한자를 써서 알려 주어야 했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돌고 돌아서 목적지인 오리고기 집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손님으로 들끓는 그 오리 고기 집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어디 가나 유명하다고 소문난 집은 항상 사람으로 북적인다. 중국 식당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가이드는 오늘도 어김없이 한국인의 입맛에 맛는 음식을 끊임없이 주문하기 시작한다. 오리 집에 오리보다는 다른 요리가 더 맛있었다. 물론 중국인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의 입맛에 맛는 중국 요리가 12가지 정도 나왔다. 저녁을 먹을 때마다 술은 항상 무한정으로 제공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루 종일 술에 취해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위하여"를 소리치며 건배를 제안한다. 그는 꼭 세 번을 반복해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는다. 사실 조용한 손님들 속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절에 어긋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나는 건배 제안에 동참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냈다. 일본인의 도에 지나칠 정도의 예절과, 중국인의 막무 가내식 예절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예절은 중간 정도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문화의 차이, 국민성의 차이, 전통의 차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나 어떤 때는 우리가 너무 시끄럽지 않은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리지앙에서 떠나던 날 새벽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여관 마당에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며 떠날 준비를 하느라고 떠들었는데, 이를 참지 못한 서양 사람들이 인상을 쓰며 다른 곳으로 피하는 것을 보고, 예절을 갖춰야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 지나면 리지앙에 다시 들릴지 어떨지 확신이 서지 않아, 저녁술은 마시지 않고 시끌벅쩍한 식당을 떠나 택시를 타고, 리지앙 고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야경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다. 밤에는 오히려 사람이 더 많은 듯 했다. 대부분은 중국 단체 관광객이었다. 이 밤중에 웬 관광단이 이리도 많은가?
<밤에 찾은 리지앙 고성>
<물레방앗간이 리지앙 방문의 중심지다. 여기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오른쪽에 강택민 글씨도 보인다. "세계 문화 유산 여강 고성"이라고 적혀 있다.>
물레방아간에서 다시 개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작은 나이트클럽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가만히 보면 껍데기만 고성이지 이미 내부는 모두 상가나 식당 나이트클럽으로 다 변모해 있다. 경제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그들도 "돈맛"의 달콤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전통복으로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쿵쾅거리는 나이트클럽 겸, 식당 겸, 카페 앞에서 손님을 유인하고 있었다. 안에 있는 젊은이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는 30병 이상되는 맥주병이 쌓여 있기도 했다. 내가 그들과 어울릴 것이 못되기에 민망함을 무릅쓰고, 문에서 머물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거리로 계속 쏟아져 나왔고, 이 나이트클럽에서 저 나이트클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옷 가게나 기념품 가게도 손님으로 들끓었다.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한국인을 단 한 사람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특징이 한국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녀갔을 것이나, 아직도 이곳에 오는 한국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짧은 휴가를 내서 여기까지 오기에는, 오고가고 걸리는 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리라.
<나이트 클럽이나 술집 앞에 나시족이 손님을 붙잡고 늘어진다.>
<밤이 되면 리지앙 고성은 거대한 동화책의 도시가 된다.>
등불을 물에 띄워 떠내려 보내는 이야기나 사진은 전에 영어를 가르칠 때 지문에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캄캄한 밤에 한 아가씨가 등불을 팔고 있었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등불을 사서 그 아래 개울가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등불을 개울물에 띄웠다. 흘러가는 등불은 모퉁이를 만나고,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아쉬운 듯 젊은 연인들을 뒤돌아 보더니, 그 머뭇거림도 잠시, 급류를 만나 쏜살같이 떠 내려갔다. 두 연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두 눈에 아쉬움과 즐거움의 흔적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진다.
<종지에 든 불을 소녀가 팔고 있다.>
시간이 거의 열두 시가 다 되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수가 없다. 아직도 가 보지 못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아니, 사자산 올라갈 때 보아둔 아늑하고, 성내가 내려다 보이는 찻집에서 차 한 잔 하려고 했던 생각이 그때서야 떠 올랐다. 구경만이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조용한 찻집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매래를 이곳의 분위기와 엮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텐데. 여기본다, 저기본다 하다가 마치 떠돌다가 꽁치 한 마리 사들고 돌아오는 장똘뱅이마냥 내 신세가 그렇게 되었다. 아직도 젊은이들로 붐비는 광장을 떠나 여관이 있는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가 묵은 mca 여관에서 본 불타는 여강 고성. 실제로 리지앙 고성은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기획할 당시 모티브가 되었다한다. >
다시 성 밖에 위치한 여관 카페에 돌아왔다. 창 밖의 고성이 눈에 부시다. 그야말로 글자그대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룬다. 불야성이라는 말은 과연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렸다. 산과 마을, 시장, 가게, 나무와 지붕, 눈에 띄는 모든 것이 형형색색의 온갖 찬란한 등불로 환상이라는 이름의 꿈의 세계를 펼치고 있었다.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다. 글로 쓸 수 없다. 눈으로도 다 볼 수 없고, 귀로도 다 들을 수 있다. 몽환의 세계가 바로 거기에 그렇게 있을 뿐이다!
카페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동료들이 술을 들고 있었다. 저 불빛 아래서 술을 마시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 하늘 아래서 잠을 잔다면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하랴. 이 밤이 가기 전에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즐겨야 할지니!
(2009년 11월 1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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