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할머니(Grandmother)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5. 07:20

<제사를 지내는 모습>


 

 

할머니

 

 

지난 11월 9일(일요일) 난생 처음으로 고향 시제에 참석했다. 연락을 받았을 때, 시제를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많았지만, 그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 있었는지도 관심 거리였다.

 

 

아침 10시 반 쯤 제사를 드릴 장소에 도착했다. 그 많은 장소 중, 하필이면 옛날 내가 살던 집터에 제사를 지낼 재각이 세워져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은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도 아는 얼굴보다는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다. 서로 악수를 하고, 이름을 이야기하니, 옛날 얼굴이 희미하게 떠 올랐다. 좀더 자세히 보니, 옛날 얼굴이 현재의 얼굴 뒤에 조금 숨어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실제는 16살에 고향을 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명절이 되면 이집 저집 다니면서 제사를 지냈고, 설에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 다니면서, 음식을 받아 먹었던 생각이 지금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 당시는 서열로 보면 내가 졸자 중에 상 졸자였다. 아랫 방에서 가장 먼 마루 끝에서 "절해라"하면 절하고 "무릎꿇고 조용히 있어라"라고 하면 쥐죽은 듯 했던 꼬마였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서열 순위 대 여섯 번째 드는 노인 축에 속해 있었다. 나보다 몇 살 더 되는 아저씨 뻘 되는 사람이 나이가 제일 많았다. 제사 상에 술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의 동생 뻘이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뒤에서 절이나 하고, 주는 음식만 얻어 먹으면 되는 그런 입장이었다. 세월이 본래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우리 집이 있었던 이 집터에 큰 밤나무가 있었으며 뒤에는 앵두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텃밭이 있어서 배추나 상추 등을 심어서 먹기도 했다. 텃밭에는 큰 화장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송아지가 그 속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형뻘되는 사람이 송아지를 구한다고 왔다가 미끄러져, 화장실에 빠지는 바람에 똥물을 뒤집어 썼다. 똥물을 뒤집어 쓴 사람은 울면서, "괜히 공부하는 사람 나오라고 해놓고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해."라고 했던 생각이 지금도 새롭다.

 

 

<내가 살던 집터는 없어지고 창고만 남았다. 뒷동산 대나무는 전보다 더욱 퍼져있었다.>

 

 

옛날 우리 집을 새 집이라고 했었는데, 아마 그 당시로는 가장 최근에 지어진 집인 모양이었고,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1)방 두 개에 마루 그리고 부엌이 있는 안채가 있었다. 2)디딜 방아간과 외양간 그리고 사랑방으로 된 사랑채가 있었다. 3)사랑채 맞은 쪽에 "두지"와 "도장"이 있는 집이 또 한 채가 있었다. 두지는 벼를 넣어두는 곳간이고, 도장은 쌀 단지가 몇 개 있었던 광을 그 당시 그렇게 불렀었다. 이 세 집은 ㄷ 자의 형태를 유지했었다.

 

 

<제사를 지낸 후 식사를 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그 사랑방에서는 할아버지가 친구와 함께 자주 골패놀이를 했었다. 연기가 자욱한 방에 노인들이 모여서 골패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머니는 점심 때가 되면 점심을 해다 바치고, 저녁이 되면 저녁을 해다 바쳤다. 어머니는 별 불평없이 그렇게 했는데, 할머니는 불만이 많았었다. "우리 살림 다 망하려고 이러느냐?" 면서 때가 되면 제발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라고 소리쳤다. 그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대판 싸움을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에 머물지 않고 어떤 때는 밥상을 들고 사랑방으로 가는 어머니를 붙잡아, 밥상을 마당에 내동댕이친 적도 있었다.  

 

 

증티댁이라고 불리는 우리 할머니는 증티라는 곳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와서 첫날 저녁이 되었다. 설거지를 하다 눈을 들어보니 동산에 달이 떠 있었다. "아이구, 증티도 달이 있는데, 여기도 달이 있네. 동네마다 하나씩 달이 다 있네. 요상도 해라. "라고 해서 그 뒤에 두고두고 동네 사람들의 놀림을 받았다.  

 

 

33살에 모든 이빨이 다 빠진 우리 할머니는 항상 얼굴이 합죽했었고, 글자 그대로 이 대신 잇몸으로 살았다. 조기를 너무 좋아했던 할머니는, 조기의 살을 다 발라 드신 후, 나머지 머리와 뼈를 도마 위에 놓고 칼로 다져서 남김없이 드셨다. 내가 가끔 연못에서 붕어를 잡아오면, 붕어에 고추장과 간장, 그리고 파를 넣어서 졸여 드셨다. 그리고 공부하라는 말 대신, 자주 연못에 가서 붕어를 잡아 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낚시질을 가지 않으면 어떤 때는 책을 뺏고 붕어를 잡아오라고 했다.

 

 

우리 할머니는 나를 "옝일이"라고 불렀다. 내가 친구 집에서 늦게까지 노는 날에는 산에 올라가 사방에 대고 큰 소리로 "옝일아, 밥먹어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치 동네 장닭이 사방 천지 다 들으라고 "꼬끼오"라고 우는 것과 비슷했다. 할머니의 외침이 얼마나 컸던지 동네 사람들이 불났다는 줄 알고 모두 문을 열고 바라보기도 했었다. 나는 그 당시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할머니는 언젠가 보따리 인삼 장사를 한 적도 있었다. 어떤 할머니와 같이 다녔었는데, 같이 장사를 하다가 우리 할머니가 동료할머니로부터 돈을 꾸었었다. 그러던 중 화폐가치를 10분지 1로 줄이는 화폐 개혁이 있었다. 돈을 돌려주어야 하는데, 괴상한 논리로 말을 꾸며대서, 결국은 빌린 돈의 100분의 1만 갚았다. 그러니까 지금 돈으로 치면 10만원을 빌렸다가 단돈 천원만 갚은 셈이다. 동료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고무신으로 땅을 치면서 삽작문(사립문)을 나서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대학교 졸업 때 사진: 맨 앞이  할머니, 맨 왼쪽 작은 아버지, 맨 오른쪽이 어머니, 맨 뒤가 나다>

 

 

우리 할머니는 요상한 말도 잘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나를 불러놓고 말했다. "옝일아, 개는 세 가지 고민이 있는데, 너 뭔지 아냐?" "몰라, 할머니. 뭔데?"내가 물었다. "고것은 말이다. 개는 앉기만 하면 시뻘건 좆이 쏙 나와서 고민여. 두 번째는 말이다. 아무리 걸어가려고 해도 자꾸 달음질이 쳐진당깨. 세 번째는 말이다. 개는 잠만 자면 호랭이 꿈이 꿔지는 것여. 그래서 잠을 잘 때 켕켕 거리는 거랴."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을 다닐 때는 창신동에서 자취를 했었다. 할머니가 올라오셔서 밥을 해줬다. 어느 날 맛있는 배추국이 밥상에 올라왔다. "할머니 이 배추 어디서 났어?" 내가 물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따듬고 버린 배춘데, 내가 쓸만한 것을 추려서 가져왔다. 맛있지?"라고 말하면서 자랑을 했다.  

 

 

대학교 다닐 때, 중학생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아르바이트 비로 한 달에 만원 정도 받은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내가 말렸지만 할머니는 그 학생의 집에 죽어도 가보겠다고 떼를 썼다. 아이들 고집도 고집이지만, 노인의 고집은 더욱 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학생 어머니께 이야기를 했더니 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다. 어느 날 할머니와 함께 학생 집에 갔다. 할머니는 나 몰래 가지고 간 곱게 싼 상자 속에서 엿을 꺼내어 주인께 두 손으로 바쳤다. "이렇게 우리 손자에게 많은 돈을 주셔서 한량없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더니 큰 절도 했다. 젊은 주인집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절하는 할머니를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할머니는 고마움의 표시로 엿을 드리려고 그 집을 그렇게 방문하겠다고 졸랐던 것이다.

 

 

내가 직장을 얻은 후 매달 적은 돈을 할머니께 보내 드렸다. 할머니는 그 돈을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우리 손자가 돈을 주었다고 자랑을 해댔다. 내가 동네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할머니 한테 돈을 매달 준담서. 장하네 그려."라는 말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 돈이라는 것이 지금 돈으로 치면 몇 만원하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그 돈으로 장에 가서 과자도 사다 놓고, 꽁치도 사다 드셨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렇다.

 

 

할머니는 편애가 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특히 나를 대단히 사랑했었다. 보통은 다른 손자가 모르도록, 또 티가 나지 않게 그러는 법인데, 우리 할머니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동네 사람 다 봐라, 다른 손자들 다 봐라"라는 식으로 티를 내며 좋은 것은 모두 다 나에게 주려고 했다. 어떤 때는 내가 너무 민망해서 그러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해도 모두 소용없었다.

 

 

이제 할머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할머니가 긴 담뱃대를 "삑삑" 소리를 내면서 양쪽 볼이 쏘옥 들어가도록 빨아대던 옛날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는 이제는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먹일 고기 국이 끓고 있다. 한 번만이라도 할머니를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조기를 사다 드리고, 연못에 가서 붕어를 잡아 드리고 싶다.

 


 

(2008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