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진놈이 죽일 놈이다 (A story of 2010 Wold Cup)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8. 5. 13:05

  

진 놈이 죽일 놈이다!

 

 

요즈음 월드컵으로 해가 지는지 뜨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월드컵 일정표를 식탁 옆에 붙여두고, 다음 날 볼 시합 중, 꼭 봐야 할 시합은 빨간색으로, 아마도 볼 것 같은 시합은 초록색으로 표시하고, 보지 않을 시합은 아무 표시도 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낮과 밤이 뒤바뀌기도 하고, 식사가 불규칙으로도 되고, 중국어 공부도 뒷전으로 밀려서, 귀신을 본 사람이 황야를 걷듯, 실성한 사람처럼 되어 버린지 며칠이 되었다. 이래서는 건강이고 뭐고 다 잃어 버리겠으니, 정신 차리고 본래의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야지라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다음 날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똑 같은 짖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또 한숨을 짓는다.

 

 

 

 

며칠 전 한국과 아르헨티나 전이 열렸다. 시합이 열리던 날, 길거리 응원전이 있기로 되어 있는 Koex 앞에 얼씬거려보기로 했다. 학원 강의가 끝난 것이 12시 50분, 삼성역에 도착한 것이 1시 반쯤 되었다. 나는 응원이 Koex 근처의 빈터에서 있을 줄 알았으나, 응원 장소는, 그냥 차도를 막아 버리고, 차도가 바로 응원 장소라는 것을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붉은 물결이 이미 1/3 정도 차 있었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길 옆에서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 있었는데, 뭔지 모르지만 나도 한 번  그 줄에 서 있어 보기로 했다. 뜻밖에도 붉은 악마 티셔츠를 무료로 나누어주고 있었다. 한 벌을 받고서, 그 옆에 줄을 섰다. 거기서는 빵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옆 줄에는 아이스 크림을 나누어 주었다. 그 옆에는 사탕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한 시간만 줄 서 있으면 배 터져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이런 경우 중국말로는 大饱口福(dabaokoufu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을 곳이지 내가 있을 곳은 못된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향했다.

 

 

잘 알다시피 전국민의 열렬한 성원, 응원, 청원,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 날 저녁 한국은 아르헨티나에게 4:1로 패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박주영의 자책골이 나오더니, "어 어"하는 사이에 두 번째 헤딩 골을 먹어 버렸다. 전반전이 끝날 무렵, 이청용이 한 골을 넣어, 이제 상황이 반전되는 것이 아닌가 하던 순간, 눈 깜짝 할 사이에 두 골을 또 먹어 버렸다. 그 날 마신 맥주가 왜 그리 쓴지 그렇게 쓴 맥주는 처음 마셔 보았다. 우리 아들은 한국팀은 역시 히딩크가 감독을 해야한다라고 벌컥 소리를 지르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 날부터 인터넷, 방송, 신문에서는 허정무 감독의 무능을 탓하는 기사로 넘쳤다. 본래 우리 팀은 역동적인 팀인데, 방어만 하다보니, 쫓아다니다가 힘이 다 빠져서 나중에는 뛸 기력이 없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매섭게 몰아쳐서 아르헨티나를 놀라게 했어야했다고도 했다. 이동국을 좀 더 일찍 투입해야 했었다라고도 했고, 이동국 대신 젊은 피 이승열을 투입했어야 했다라고도 했다. 왜 차두리를 빼고 오범석을 넣었느냐고도 했고, 이것은 분명 무슨 외압이 작용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시합이 있기 전 몇몇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르헨티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내가 물어본 사람의 80%는 한국 팀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희망과 현실을 착각하는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보자. 한국 팀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알려진 선수는 박지성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팀의 선수들은 박지성과 비슷하거나 한 수 위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몸값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희망인 박지성 선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출전할 기회도 자주 갖지 못하는, 어쩌면 얼마 있으면 다른 팀으로 방출될 위기에 처할 선수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이런 팀이 아르헨티나를 이길 수도 있지만 질 확률이 훨씬 더 많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속한 B조는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이다. 이 세 팀은 결과야 어떻든, 무조건 한국은 이기고, 다른 한 팀을 이겨서 16강에 나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물론 축구 공은 둥근 것이어서 객관적으로 실력이 우수한 팀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뭐 하러 구태여 죽기살기로 싸우는가?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상위 팀끼리 경쟁을 붙여 우승자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그냥 FIFA 순위 1등에게 상을 주면 될 것이다. 항상 실수와 이변은 있게 마련이고,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골대를 맞추고도 들어가지 않는 골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심판의 오심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축구는 사람이 하는 일이며, 그것도 11명이나 되는 사람이 협동하여 싸우는 경기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북한이 브라질에 2:1로 패했다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아르헨티나와 무승부이거나 이길 수도 있는 경기가 아니겠는가? 일단 예선을 통과한 팀이라면 힘이 부치기는 하겠으나 어느 팀과도 싸워볼 만한 팀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여튼 우리는 아르헨티나에게 졌다. 그 이유가 허정무 감독의 작전 미숙, 선수 기용의 실패, 또는 불운의 결과인지 아무도 모른다. 지내놓고 보면 후회스러운 것이 많지만, 적어도 시합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며칠 있으면 나이지라아와 마지막 예선 전을 치루게 되어 있다. 그때 방어를 위주로 하는 전술을 쓸지, 적극적인 공격을 할지는 허정무 감독 결정에 달려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한국이 이겨 16강에 진출한다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에게 패한 것이 보약이 되었다. 그때 졌기 때문에 더욱 똘똘 뭉쳐 잘 싸웠다.라고.

 

 

그러나 졌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방어만 하다가 졌다면 지난 번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교훈도 얻지 못하고 똑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바보같은 허정무라고 욕을 해댈 것이다. 만약 공격적인 축구를 구사하다가 졌다면, 감독이라면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줏대를 갖고 임해야지 부화뇌동하는 저런 감독은 당장 사퇴해야한다고 핏대를 세워 말할 것이다.

 

 

지난 일을 논할 때는 누구나 전문가이고, 해설자이고, 심지어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축구만의 일이 아니고 이 세상사 모든 것이 다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유신 정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 유배생활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끝까지 군인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날을 누가 알랴.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하지만, 그것도 지내놓고 보면이라는 가정이 붙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역사를 참고 하여 판단을 내려도 잘 될 확률은 반이요, 그렇게 하지 않고도 잘될 확률은 여전히 반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재미와 사실과 판단의 자료를 주지만, 미래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열어보기 전까지는 귀신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죽는 사람이, 내가 이만큼 살았으면 잘 살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몇 배가 더 많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판단은 적어도 그 순간만은 인생 최선의 판단이라는 말이 있다. 잘 되고 잘 못되고는 나중에 일이지, 적어도 그때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그냥 굶어죽기보다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 당시는 그것이 최선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끔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며 후회를 한다. 그 때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내가 이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그 여자와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증권투자하여 재산을 날리지 않고 땅을 사두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가정법은 말을 연습할 때나 사용할 수 있는 어구이고, 흘러간 역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지, 현실 세계에는 가치가 없는 말이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고, 미래는 미래다.

 

 

며칠 있으면 허정무감독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긴다면 역시 허정무밖에는 없다는 찬사가 쏟아질 것이요, 진다면 저런 인간이 한국 감독을 하다니 라는 말이 서슴치 않고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것이다. 이긴다면 역시 좋은 작전이었다고 입에 거품을 품고 열을 올릴 것이요, 진다면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그런 작전은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쓴 소리를 퍼 부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 놈은 역적이요, 진 놈이 죽일 놈이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20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