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고생은 늙어서도 한다.
고생(苦生)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쓴 생활"이라는 뜻이다. 苦는 "쓸 고"인데, 이 한자의 위쪽에는 풀초(艸)가 있고, 아래에는 옛 고(古)가 있다. 고(古)는 음을 나타내고, 실제의 뜻은 "풀초(艸)"가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풀이 쓴가?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알겠지만, 60-70년대에는 여름만 되면 왜 그리 밥맛도 없고, 힘도 없어서, 어디서 뒈지게 몽둥이로 맞고 온 듯한 느낌이 종종 들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여지없이 들판에 있는 익모초를 뜯어다가 "확독"이라는 돌로 된 항아리 비슷한 곳에 썩썩 간다. 그러면 시퍼런 물이 조금 나오게 되고, 어머니는 이 놈을 삼베로 싸서, 양쪽에 막대기를 휘감아, 양쪽 볼이 쏙 들어가도록 힘을 주면서, 눈물어린 인상을 써가며, 젓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나머지 익모초 액을 짜내게 된다. 그러면 시퍼런 물이 사발에 반쯤 고이고, 그 위에는 알 수 없는 한 줄기 흰 거품이 일게 마련이다.
그런 다음 "이것을 먹으면, 밥맛도 있고, 머리도 좋아져서 공부도 잘 하게 될 터이니 무조건 마셔라."라는 명령과 함께, 어머니는 한 손에는 회초리, 또 다른 손에는 박하 사탕 하나를 들고 계신다. 지금까지 먹어본 약 중 가장 쓴, 약도 아닌 약이 바로 이 익모초다. 익모초를 먹다가 그만두고 도망치다가 잡혀서 다시 먹어야 되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잡힐 때마다 하는 수 없이 코를 움켜쥐고, 재빨리 입에 털어 넣은 후, 박하 사탕을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삶이란 고생길이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가 사는 것이 고생이라면, 만약 익모초 같이 쓴 것이라면, 그 괴로움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삶은 행복이요,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방학이나 휴가를 싫어하지 않는 것을 보면, 괴로움의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래도 삶은 괴로움 쪽에 무게가 실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 고생은 사사도 한다."라는 말을 수 없이 많이 들었다. 젊었을 때는, 정말 멀쩡한데도 일부러 익모초를 사서 매일 마시는 것처럼 그런 고통을 일부러 감내해야 할까?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몸을 학대해 가며 참고 또 참아가며 책을 들여다 보아야 할까?
내가 학교에 있을 때, 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무조건 참고 해봐, 그러면 언젠가는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종종 들었다. 나도 뾰죽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말을 들은 학생은 대체로 "예" 하면서 대답을 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무조건 참고 해보면 언젠가는 된다"라는 말을 믿고 공부한 학생 중, 학년 말이 되어서 정말로 괄목할 만하게 성적이 나아진 학생을 과연 몇 명이나 보았는가? 쓰디쓴 익모초를 먹듯이, 그저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 보면 공부가 잘 되는가?
우리가 공부한다고 하는 행동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어떤 두 학생이 한 시간 동안 책을 보았다고 하자. 한 시간 동안 책을 보았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하고 그저 머리만 득득 긁으면서 한 시간만 보낸 학생이 있다. 또 다른 학생은 이미 밑받침이 되어 있어서 자기가 가진 이전의 지식에다가 금방 읽은 지식을 덧붙여 그만큼의 성과를 올린 학생이다. 첫 번째 학생은 공부한 것이 아니라, 한 시간 동안 "자신을 괴롭힌 행동을 했을 뿐"이고, 두 번째 학생은 바로 고생은 고생이었지만 "한 시간 동안 학습이 된 학생"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학생에게 말해왔다. "네가 지금 생각하는 공부라는 것이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면 바로 그것이 공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책만 잡고 있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너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하는 행동이 공부인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물어도 그 사람이 너에게 답을 해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은 바보 중의 가장 멍청한 바보이다. 열심히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라. 열심히 하되 학습이 되는 공부를 해라."
나는 강남의 중국어 학원에 넉 달 다녔다. 넉 달 동안에 여러 종류의 학생을 보아왔다. 공부하는 방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학생이 있는 반면, 무엇이 공부인지를 모른 채, 그저 한 두 달 다녀보다가, 그만 두는 학생도 보아왔다. 사실 공부를 하는 것과,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의 판별법은 아주 간단하다. 읽어서 또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이해가 되면 공부요, 모르면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다. 알 듯 모를 듯 하는 것도 공부가 아니다. 알 듯 모를 듯한 것은 설령 지식으로 쳐준다 해도 써 먹지 못할 지식이다. 이런 학생은 빨리 수준을 낮추어서 공부해야 한다. 어려운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공부를 해야 한다. 내가 고 3이건, 고2이건, 10년 이상 공부를 했건 안 했건, 읽어서 알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에서 학원에서 수 많은 학생이 "젊어서 고생은 사사도 한다"라는 말만을 믿고, 알지도 못하면서, 졸면서 깨면서, 공부하는 척하며 시간을 보내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책을 잡고 있으면 언젠가는 되겠지, 되겠지 하면서 밝은 앞날을 꿈꾸며 살 것이다. 어떤 외국인이 쓴 글이 있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척 하지 말고, 학생은 배우는 척 하지 말아라." 이 말은 "학생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선생님 혼자 떠들고 있지 말라. 학생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눈만 껌뻑이고 있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충고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다니는 체육관 원장이 한 말이 있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몸에 좋으면 운동이요, 몸에 좋지 않은 것은 무조건 노동입니다. 아무리 하루 종일 서서 어떤 일을 해도, 또는 바쁘게 왔다갔다 해도 노동일 뿐, 그것이 운동은 아닙니다. 올바른 운동을 할 때,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몸에 이로운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아무리 이해가 되는 노력을 한다 해도, 그것이 목적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 교수법을 배우면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영어책을 공부한다고 할 때, 영어로 쓰여진 미국 전화번호부를 가지고 공부한다고 쳐보자. 매일 미국 사람의 이름과 주소만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공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교재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아무리 이해가 잘 되는 책이어도, 그것이 목적에 합당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네 인생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내 나이에, 내 성격에, 또는 내가 원하는 삶에 합당하냐는 것이다. 내 나이 62세에, 중국어 공부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여행을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재미있는 영화나 TV를 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애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쳐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동네 아이들에게 무료 영어 강습을 해주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아니면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를 갈 것인지, 매일 체육관에 가서 보디 빌딩을 해야할 것인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다.
중국어 학원에 다닐 때, 60세 이상인 사람들이 몇 사람 오는 고급반이 있었다.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거기에 오는 사람들의 목적이 다양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문화를 배우기 위해서 오고, 어떤 사람은 중국 여행을 하기 위해 오고, 또 어떤 사람은 중국 문화도 배우기 싫고 그렇다고 중국 여행 갈 것도 아니고 마땅히 할 것이 없어서 시간 때우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공부건 일이건 내가 하는 행동은, 그 행동이 "목적"과 "방법"이 적절할 때, 공부가 되는 것이고 노력의 대가가 나오는 것이지, 이 두 가지가 적절하지 못한 것은 자신을 괴롭히며 허송 세월만 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서 노력을 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할 짓이지 제 정신인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이런 것은 특히 젊은이들이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젊어서 고생은 늙어서도 하게 된다."
사진: 홍대 앞 중국음식집 "샤오훼이양"
(2010년 7월 22일 아침,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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