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Beautiful the Nature is! - Albatross

Essays

걸어 온 것이 너무 아까워서

Albatross(곽영을/郭泳乙) 2012. 10. 10. 12:45

 

 

 

 

지나온 것이 너무 아까워서 ---

 

 

날씨가 화창한 오후 5시, 나는 서울의 잠실 대교 북단의 산책길을 걸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코끝을 간지럽히고 머리를 헝클어 놓더니 아차산을 향해 머리를 돌리더니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조용한 물가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갔다. 약 7키로 정도 걸어갔을 것이다. 내일이 "구리시의 날"이라고 하여 넓은 강변 공터에 무대를 설치하고 수천개의 의자를 배열하고 있었다. "박강성, 박남정"등 이미 한물간 가수들이 내일 출연할 것이라는 광고문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조금 더 가니 거대한 코스모스 단지가 나타났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가고 있는데 김상희가 불렀던 코스모스 노래가, 사방에 세워져 있는 스피커에서 처량하게 흘러나왔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나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김상희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날이 어두워져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간다면, 오늘 걸은 거리는 14키로는 될 것이고, 그때는 이미 밤 8시는 될 것같았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시내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팔고 있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굴다리를 지나 구리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가면 아치울 마을이 있으니 거기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다.

 

 

구리의 코스모스 들판에서 굴다리를 지나 아치울 마을로 가는 비포장 도로는 폭이 좁고 길 양쪽에 무성한 잡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날은 어두워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길인지 뭔지 "깅가밍가"했다.  서울이나 구리에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도 후미진 곳이 있으리라고는 나는 전에 상상도 못했던 곳이었다.

 

 

 

 

한참을 가다가 아차산 쪽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걸었다. 그러나 가다보니 길이 끊기고 말았다. 다시 온 길로 돌아가자니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생각을 한 후, "나는 어려운 역경에 처하면 더욱 힘이 나는 대단한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계속 앞으로 갔다.

 

 

저 멀리 아차산 아래에 나 있는 큰 길로 많은 차들의 불빛이 보였다. 사방은 적적하고 개 새끼 한 마리 짖지 않는 들판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 동안 희미하게나마 보였던 길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고, 길은 끊겼다. 사방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덤불만이 나를 가로 막고 있었다. 50미터만 더 가면 버스 정류장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럭저럭 풀을 헤치며 밟고 간다 해도 혹시라도 풀 속에 뱀이나 다른 해충이 있을지도 몰라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너무 아까워 돌아갈 수는 없었다. 50미터만 가면 되는데 다시 2 키로를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겉으로 보아 풀의 높이는 비슷했지만, 땅은 울퉁불퉁해서 비칠거리며 몇 번은 넘어지며 걸어갔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짜 난관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외관상으로도 정말로 푹 들어간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지금까지도 왔는데 어찌 돌아가랴.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너무 아깝지 아이한가?

 

 

나는 푹 들어간 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물컹거리면서 무릎까지 물이 차올라왔다. 거기가 바로 도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물이 없는 낭떠러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물이 차오르니 지금까지와는 여러 차원 다른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아니 지금까지 왔는데, 어찌 돌아가나? 나는 더 가보기로 했다. 아니 그럴 도리밖에 없었다.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마다 점점 빠져들더니 이제 배꼽까지 물이 차 올라왔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풀뿐이었고, 나는 지금 황천길을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은 모래 속으로 조용히 파묻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물이 배꼽까지 올라오니 뒷머리가 쭈뼛이 서며 등골이 오싹했다. 물속에서 거대한 물뱀이 나와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 아니 더 걸어가면 머리까지 물 속에 잠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누군가가 이곳에 전기를 흐르게 하여 감전사할지도 모를 일이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보니 중국 무술을 할 때 나는 이상한 소리의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고, 먼데서 개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찾아 나서겠지. 마누라와 아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사방을 돌아다니겠지. 그러나 나를 찾지는 못할 거야. 그러면 경찰에 알리겠지. 경찰은, 외교통상부에 연락하여 내가 해외로 나갔는지 알아보겠지. 그런 일이 없으니 평소에 자주 다녔던 아차산 주위를 이 잡듯이 샅샅이 조사하겠지. 결국 하는 수 없이 나를 찾는 일을 포기하겠지. 나의 일은 신문과 TV를 타고 전국에 알려지겠지. 나를 아는 사람은 놀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라고 무릎을 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러는 중에도 세월은 가겠지.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고 풀이 고개를 숙이면 나의 시체가 물위에 떠오르겠지. 그러면 해골만 남은 나를 국과수에 넘겨 내가 누군 줄 알아내겠지. 그런 다음 나의 사망원인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수사가 시작되겠지. 그 과정에서 아내와 아들은 노상 경찰서에 불려가 무슨 불만이 있었는지, 문제가 있었는지, 교우관계가 어떠했는지, 여자 관계는 어떠했는지, 빚을 많이 지고 있는지, 최근에 정신 질환이 있었는지 등등 온갖 질문에 시달리겠지.... 단 몇 초 사이에 나는 머리 속으로 끝없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개그 콘서트의 "비상대책 위원회"의 김원효처럼.

 

 

 

 

천만 다행으로 물은 배꼽 이상 차지 않았다. 나는 기사회생하여 밖으로 기어 나왔다. 아, 감개무량하다. 나는 비칠비칠 큰 길을 따라서 걸어갔다. 그 순간 나는 '쪼다'같다는 생각과 '대단하다'는 생각이 겹쳐지면서, '한심하다'는 생각과 '과연 나답다'는 생각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왼쪽 바지에 있는 신용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른쪽 바지에 있던 핸드폰과 돈도 젖어 있었다. 속옷은 젖어서 몸에 쩍쩍 달라붙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였으나 핸드폰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쌀쌀한 밤바람에 젖은 바지가 펄럭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참으로 이상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서 전우를 다 잃고 혼자 살아 돌아오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시궁창 물인지 똥물인지 뭔가 고여진 물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바로 내 옷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상태로 버스에 타면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고 그렇다고 걸어가자니 멀기도 하거니와 지칠대로 지친 나에게 그런 힘도 없는 형편이었다. 걸어갈까, 버스를 탈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버스를 탔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코를 움켜쥐고 서서히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운전수도 이상하다는 듯이 문을 확 열어 재끼더니,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람들의 눈치만을 살폈다. 내우외환이랄까? 이제 몸은 슬슬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몸의 도처에 이물질이 달라붙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거머리가 달라붙었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다리를 벅벅 긁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왜 이리 시간이 가지 않을까? 구리 아치울 마을에서 강변역까지 오는 버스에서의 10분간이, 내가 살아온 10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오늘 재수 없이 똥 묻은 거지가 버스에 타서 기분 잡쳤다."라고 할 것이다. 또 내가 탔던 자리에 아무 것도 모르고 털석 주저않은 사람은, "어떤 거지 새끼기 버스 좌석에 오줌을 갈기고 내렸어"하면서 재수에 옴 붙었다고 투덜댈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궁금해요?" 라고 나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면 그가 그렇게 물을 것이다. "궁금하면 500원"이라고 그는 덧붙일 것이다. "그 사람 그냥 거지 아니예요. 꽃 거지예요. 구리 코스모스 꽃 거지요."라고 말을 이어 갔을 것이다.

 

 

 

 

집에 와서 사실이야기를 하니 마누라는 그러기에 뭐 하러 오밤중에 그런 들판을 헤매이고 다니냐면서 나에게 "쿠사리"를 주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저지른 이런 행동은,  결국 나 자신에게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걸어 온 것이 아무리 아깝다 하더라도,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말을 새겨들어야 했을까?   이런 상황이 또 닥치면  오늘 일을 거울 삼아 뒤로 돌아가야할까? 난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이런 일이 또 발생한다면 나는  오늘 내가 취한 행동과 비슷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게 나니까 나도 어쩔 수 없다.

 

 

구린내 나는 구리에서의 구라같은 추억이다. 바로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에 실린 사진은 2008년도 구리 코스모스 축제 때 촬영되었습니다.  

 

(2012년 10월 1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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