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이 바로 그 사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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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저녁 8시 25분에 KBS1에는 "너는 내 운명"이라는 연속극이 방영된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잠깐 설명하면 이렇다. (A) 강칠복(현석)은 로하스 사장으로 호세라는 잘 생긴 아들이 있다. (B) 김대구(강석우)는 구청장으로 아름다운 딸인 수빈이가 있다. (C) 김대진(장용)은 이삿짐 센터를 하며, 새벽이라는 딸을 양녀로 삼고 사는 대가족이다. 이 극에서 호세는 처음 수빈이를 좋아하여 약혼까지 한다. 그 뒤에 새벽이라는 고아를 사랑하게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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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에서 (A), (B) 두 집안 식구들의 피를 말리는 협박, 부탁, 애걸에도 불구하고 결국 호세는 수빈이와 파혼하고, 재산과 가족 배경의 면에서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새벽이에게 사랑을 호소한다. 이 연속극을 몰고 가는 힘은 누가 뭐라 해도 호세의 고집이다. 이것을 보기에 따라서는 사랑이라고도 보겠지만 나는 고집으로 보고 싶다. 모든 것을 양보해도 새벽이는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고집이다. 그는 따귀를 맞고, 비난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면서까지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 고집 하나로 조용해야 할 여러 집안이 난리 법석을 피우고 회사에서도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잔잔한 강물이 평화롭게 흘러가다가 호세의 고집 하나로 폭풍우를 만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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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속극에서, 다음과 같은 대본 딱 한 문장이면 이 연속극은 그 시간을 끝으로 종영하게 되어 있다. 즉, 호세가 "예, 부모님 말씀대로 수빈이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면 연습하던 배우들과 스탭들은 짐 싸들고 집으로 가야한다. 작가인 문은아씨 자신도 당장 직장을 잃고 집에서 방콕해야 한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이 드라마의 원동력으로 호세의 고집을 잘 활용하고 있다. 호세의 고집 때문에 모든 집안에 분란이 일어난다. 시청자들이 열기를 갖고 TV 앞에 모여든다. 연기자와 스탭 기타 많은 방송국 사람이 직장을 잃지 않게 된다. |
사전에 따르면 고집이란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이다.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않고 버틴다는 것은 당사자가 일부러 그런다기 보다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고, 상대방에 동조하는 것은 아무나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꾸는 것도 종류가 다양할 것이다. "저기 오는 사람이 김철수라고 생각한다"는 1, 2분 후에는 쉽게 바뀔 수 있다. "현석이가 미남이냐 강우석이가 미남이냐"라는 생각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그런대로 바뀔 수 있는 의견이나 생각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에게 불교가 옳으니 불교의 생각을 받아드리라고 하면, 아마 이루기 힘든 소망 사항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과 아들을 버리고 단지 "옳다는 생각" 때문에 북한으로 월북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고집(넓은 의미의 생각, 사상도 포함될 수 있겠다.)은 목숨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자기 남편이 얼마나 고집쟁이인지 모르겠다고 나에게 하소연하는 여자를 나는 알고 있다. 30년 동안 그 고집을 꺾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그 놈의 똥고집은 바뀌지 않는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될 사실은 이 여자의 고집이 남자의 고집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웬만하면 자기의 고집을 꺾고, 남편이 하는 대로 내 버려 둘 것이지 왜 남편의 고집을 끝까지 꺾으려 하는가? 내가 이런 투로 그녀의 고집에 대해 넌지시 말해주니 그 여자는 지금까지 자기가 고집을 부렸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의 "고집"을 끝까지 꺾으려 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의 고집을 꺾는단 말인가?
고집은 꺾고 꺾이는 대상이 아니다. 아니, 바뀔 수는 있지만 그 고집이 바뀌는 사람의 수는 극소수다. 우리는 그럴 경우 "어, 사람 변했네."라고 한다. 새 사람이 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고집을 버리려면,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만큼 고집을 버리기는 어렵다. 교직에 오래있다 보면 전근을 여러 번 가게 된다. 그러면 흔히 교장실을 걸치게 되는데, 대부분의 교장실에는 근사한 큰 족자가 하나 걸려있다. 그 족자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생각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윌리암 제임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이 명언은 처음 들으면 너무나 그럴 듯 해서, "나도 한 번 해봐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과연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백 명 중, 한, 두 명만이 이 좁은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 줄에 있는 "생각이 바뀌면"이 불가능한 것이니, 그 뒤에 있는 것은 수 만 문장이 나온다 해도 다 "나가레"가 되는 고스톱이다. 마치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123×327×980×-------------× 0" 하면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6살짜리 꼬마뿐만 아니라, 3살짜리 꼬마도 그 놈의 고집은 꺾이질 않는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고집이 센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오래 전에 개를 기른 적이 있다. 어떤 상황이 되면 고분고분한 개도 주인에게 대드는 고집이 있다. 한 번은 "내가 너에게 먹을 것을 주고, 또 그렇게 "사랑"해주는 데, 나를 물다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굴복할 때까지 때려주기로 나도 고집을 피웠다. 결국 그 개는 나에게 굴복하는 대신 기절하고 말았다. 동물애호가들이 들으면 한심한 작자의 이야기겠지만, 그 개나 나나 고집이 센 것은 마찬가지였다.
고집은 엄청난 폭발력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 고집 때문에 그 사람이 산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고집이 바로 삶의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할 때, 고집이 세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집하는 것과 같은 등가물(等價物)을 그에게 제공하면 혹시 그는 자연스럽게 그 고집을 버릴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컴퓨터 게임을 못하게 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 컴퓨터 게임을 하려고 하는 고집을 다른 일, 예컨대,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하도록 물길을 돌려 놓아주면, 그 아이는 게임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컴퓨터만을 못하게 한다면, 결국 그 아이는 우리집 강아지가 그렇듯, 기절 이상의 극단적인 상황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마라. 너의 고집이 꺾임을 당하지도 말라. 고집과 전쟁을 벌이는 날이, 바로 누군가의 종말이 되는 날인지도 모른다.
지난 주에 등산 갔다가 "당신 멋져"라는 말을 들었다.
좋은 이야기다. 져주면서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즉 져주기 싫어하는 자신의 고집을 쉽게 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한 번 두 번은 져주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쌓이게 되면 결국 자신이 폭발하여, 잿더미가 될지도 모른다. 그 잿더미는 자신 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그 잿더미 속에 휩싸이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고집을 꺾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공자님이나 맹자님이 할 일이지, 평범한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고집을 꺾지 말라. 고집과 함께 살라. 왜냐하면, 고집이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2008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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