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인삼 센터>
금산 장날 기억 여섯
기억 1: 나이롱 저고리 1300원 아마 그 날이 내가 중학생이 되고 처음 금산 장날이었을 것이다. 금산의 중앙시장 쪽으로 걸어 가는데, 여기저기 시끄러운 속에서도 한 남자가 유난히 박수를 치며 외쳐대는 소리가 바로 "나이롱 저고리 1300원"이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햇볕에 많이 그을린 그 남자는 윗 앞니가 두 개가 빠졌고, 나머지 이빨은 토끼 이빨처럼 길쭉하게 뻗어 나와 있었다. 머리에는 챙이 넓은 흰 모자를 썼었고, 윗옷은 블라우스 비슷한 옷을 입었으며, 허리 둘레에 형형색색의 수건을 차고 엉덩이를 돌려댔다. 그는 옷이 수북하게 쌓인 더미 한 가운데 서서, 발로 땅을 구르며, 침을 튀어가며 "나이롱 저고리 1300원~"을 연거퍼 외쳐댔다. 그가 얼마나 신명 나게 박수를 치고 춤을 추면서 "나이롱 저고리 1300원"이라고 외쳐대든지 나는 집에 갈 생각도 안 하고 그 난전(亂廛)앞에, 한 참이나 쭈그리고 앉아 침을 흘리고 구경했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 왜 이리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까닭은 모르겠으나 그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인 것 같았다. 그 당시 1300원이 지금 돈으로 얼마인지 짐작이 가지 않지만, 1300원이라는 싼 비용으로 나이롱 저고리를 입어보라는 것을 보면, 금액이 큰 금액은 아닌 듯 싶다.
나이롱이 나오기 전에는 무명으로 만든 옷뿐이었었다. 무명은 툭하면 찢어지고, 쉽게 닳고, 물이 빠져서 얼마나 불편한지 몰랐다. 아마 그 당시 육체 노동을 해야했던 시골 사람으로서는 나이롱 저고리만큼 좋은 옷이 없었을 게다.
기억 2: 신발을 입에 문 여인 그 사람 옆에는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밀짚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여자 앞에는 항상 검은 고무신이 놓여있었다. 그 당시 고무신도 조금 신으면 금방 닳아서, 새로운 것을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무슨 타이어 원료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 검정 고무신은 전의 고무신보다 훨씬 더 질기고 단단했다.
이 여자는 이 고무신을 이빨로 물고 장사를 했는데, 어떤 때는 자기 이빨로 고무신을 물고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이렇게 세게 물어 뜯어도 문제없는 고무신이라고 침을 튀기면서 큰 소리쳤다. 고무신을 입에 문 그 여자의 이빨은 시골 여자치고는 이빨이 성했고 색깔 또한 흰색이었다. 그 여자가 이빨로 고무신을 물고 있다가 침을 뱉으면 검은 침이 나와서 나는 저 여자의 이빨이 검어질까 지레 겁을 냈었다. 가끔 가다 그녀는 옆에 있는 양푼에 담긴 물을 입에 넣어 하늘을 바라보고 "뿌~"하고 공중에 내 뱉었다. 얼마나 신바람 나게 내 뱉는지, 태양을 배경으로 무지개가 보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이 모습이 마치 사형수의 목을 베기 전에 칼에 물을 뿜어대는 망나니와 연상되어서 그 여자 옆에 가는 것이 두렵고도 무서운 때도 있었다.
기억 3: 국화빵 거기에서 약 100미터 내려오면 금산 쇠전 다리가 나온다. 쇠전 다리 옆에는 국화빵 장사가 있었다. 국화빵 장사는 얼마나 솜씨가 좋던지, 실이 촘촘히 달린 막대기에 약간의 기름을 묻혀, 국화빵이 구워질 구멍 하나하나에 기름을 발랐는데, 그 막대기가 옮겨가는 속도가 마치 따발총 사격하면 표적에 팍팍 꽂히듯 그렇게 빨랐다. 묽은 죽처럼 생긴 밀가루 반죽을, 달구어진 빵틀 위로 부을 때에는 찔끔찔끔 붓는 것이, 조금 모자라지도 않고, 조금 많지도 않게, 마치 물수제비 연못 위에 떠 가듯 그렇게 살랑살랑 부었다. 아래가 구어진 빵을 다시 뒤집어 위쪽이 아래로 가게 할 때는 쇠꼬챙이로 착 찍어서 뒤집고, 또 착 찍어서 뒤집는 것이, 완전히 모이 쪼아먹는 닭이었다.
몇 번인가 그 앞에 서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사 먹는 것을 구경했지만, 나는 사 먹어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누가 사주었는지 어떤지 해서 한 번 먹어 본 적이 있다. 그 때의 그 국화빵 맛이란, 꿀 맛 중에서도 꿀 맛이었다. 학교고 나발이고 그만두고, 이 사람이 나를 조수로 쓰고, 나는 그 밑에서 국화빵이나 실컷 먹어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금산 인삼제>
기억 4: 고기 국밥 거기에서 조금 올라가면 국밥집과 국수 집을 동시에 하는 식당이 있었다. 식당의 이름은 잊었지만, 사람들은 그 집을 뚱뗑이네 집이라고 불렀다. 뚱뗑이네 집 주인은 배가 남산만하게 나온 아줌마로, 얼굴이 붉고, 주근깨가 많이 나 있었다. 배가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도 살이 쪄서, 작은 눈이, 한 번 웃을 때는 눈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녀 앞에는 밥과 고기 몇 점이 들어 있는 검은 질그릇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질그릇에 국수가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었다. 길 바닥에는 큰 가마 솥에 고기 국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대파와 각종 양념이 끓는 물에서 소용돌이쳤다. 이 붉은 소용돌이는, 휘몰아치며 나오는 김과 섞여, 바라보는 사람 누구든지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대고 다리를 큰 대자로 뻗고 있던 그 아주머니는, 손님이 오면, 천천히 뒤퉁뒤퉁 걸어 나와 반쯤 열린 솥을 확 열어 제친다. 그리고는 큰 국자로 휘휘 둬 번 젓고 난 후, 푹 퍼서 밥그릇에 얹어주고, 다시 자기 의자로 간다. 나는 몇 번이나 오가며 그 집 앞에서 멈추어 구경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창피하여 먼 데 서서 그 국밥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음식을 먹어보고 싶은 생각은 언제나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뚱뗑이 아줌마가 갑자기 병이 나서, 병원에 실려갔으면 좋겠다고도 몇 번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그 틈을 이용해서 훔쳐 먹어볼 생각이었었다. 그 당시에는 기름기가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소원인지라, 저 놈의 기름이 둥실둥실 떠 있는 국밥을 내 평생 먹어 볼 때가 있을까 반신반의 하다가 결국은 그것을 사 먹어 보지 못하고 금산을 떴다.
기억 5: 자장면 한 번은 학교에서 오다가 친구가 자장면을 먹어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자장면이 뭐냐고 물었다. 중국집에서 파는 것인데, 국수에다가 검은 조청 같은 것에 양파를 듬뿍 넣어 파는 음식이라고 했다. 그도 한 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같이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돈을 꾸어 줄테니 나중에 갚으라고 말하고 식당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주인이 국수 빼는 모습이 첫 눈에 들어왔다. 양손으로 몇 번 밀가루 반죽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그 다음에는 그 반죽을 바닥에 때렸다가 밀가루를 묻혔다. 그가 다시 하늘 위로 국수 뭉치를 쳐드니, 갑자기 국수 가락이 수 백 개가 나오는 것을 보고, 세상에 마술사도 저런 마술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장면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 오이가 몇 가닥 위에 놓여진 자장면은 그 오이 냄새와 더불어 나를 미치게 했다. 그 구수한 맛이라니! 젓가락에 면발을 돌돌 말아서 먹으면서 내 친구는 나도 그렇게 해보라고 했다. 나는 나무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먹으면 더 맛있는지 물었다. 내 친구는 나무 젓가락이 아니고 와리바시가 맞는 말이라고 했다. 하여튼 나도 그렇게 해보았는데, 하늘에 신이 있다면 신들이나 먹는 음식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맛있었다. 내 친구는 자장면이 맛이 있는지 나에게 열 번은 물어보았고, 나는 열 한 번은 맛이 있다고 대답 했다.
친구에게 자장면 값을 갚지 않은 채로 세월은 흘러갔다. "갚을 돈도 없는데, 이 놈이 돈을 달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날이면 날마다 나를 옥죄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장면 값을 갚으라고 했다. 친구는 아마 이제나 저제나 주겠지하고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 날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뜻 밖에도 선뜻 돈을 내 주었다. 나는 우리 어머니도 돈이 있는 날이 있구나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기억 6: 빨간 입술 쇠전 다리 근처에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선술집이 있었다. 선술집 앞에는 늘 그렇듯 술취한 아저씨들이 담배를 피워대며 술집 안을 힐끔힐끔 보면서, 선술집 아가씨가 자기 차례가 올 때를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특히 장날에는 소를 팔거나 인삼을 팔아 주머니에 두둑히 돈이 든 장돌뱅이들이 선술집 앞에 얼씬거렸다.
선술집은 보통 흰 천이나, 구슬 꾸러미 같은 커튼이 쳐 있어서, 안쪽이 보일락말락 했다. 아마 나도 그 때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절이었을 것이다. 나는 비록 술은 먹지 못해도, 그 선술집 안 쪽을 상당히 보고 싶었다. 딴 청을 피우는 척 하면서, 구슬 꾸러미 커튼을 제치고 나오거나 들어가는 어른 들 몰래 힐끔힐끔 쳐다 보았다. 머리를 둘둘 말아 뒤로 틀어 올리고, 시커먼 속눈섭을 그렸는지 붙였는지 했던 아가씨가 보통 한 집에 두 명 내지 세 명 있었다.
놀라운 것은 아가씨들의 빨간 입술이다. 나는 생전에 그렇게 빨간 입술을 본 적이 없다. 그 빨간 입술은 충격적이었고, 그 충격으로 나는 그 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될 수 있으면 그 앞을 지나다니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 발이 그 앞에 와 있었다. 그렇다고 도끼로 내 발을 내 칠 수도 없어서, 손 등과 손 바닥에 "술집 앞으로 다니지 말 것"이라고 써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그 입술은 대전으로 고등 학교에 간 뒤에도 생각이 났고, 서울로 대학교에 간 뒤에도 생각이 났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대학 재학 중 여름 방학을 맞아 그 선술집에 가봤다. 그 때에도 역시 술집 여자의 붉은 입술은, 술과 담배 연기와 야릇한 선술집 특유의 분위기와 어울려, 내 온 몸을 둘러 싸고 휘몰아쳐 감겨왔다. 거부하기 힘든 육욕과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자제감 속에서 애가 끓였다. 그러다가 나의 심장을 떼어 놓고 오는 심정으로 내 후임 손님에게 아가씨를 넘기고 자리를 떴다.
옛날이 그립다. 모든 것이 그립다. 사라진 모든 추억이 되살아난다. 금산의 골목골목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저고리 장사도, 국화빵 아저씨도, 자장면집 아저씨도, 국밥집 아줌마도, 술집의 아가씨도 모두 다시 보고 싶다. 그들 중에는 고인이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살았다 해도 그들의 나이는 나와 같거나 나보다 위일 것이다. 하지만, 유관순 언니가 지금도 "언니"이듯, 그들은, "아줌마와 아저씨와 아가씨"로 영원히 내 마음 속에 남아, 내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 줄 것이다.
(2008년 09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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