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12일 오전 8시 40분 출발하는 깐야꾸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 바르깔라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어시장 근처에서 본 걸인이 이곳에 또 나타났다. 그 걸인은 내 양심으로 도저히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여기에 언급을 할까말가 많이 망설이기도 했었다. 우리가 흔히 시골 동네에서 보는 100년 묵은 나무가 고목이 되어 반쯤 썪어서 껍질이 떨어져 나가고 겉이 너덜거리는
모습, 그 사람의 다리가 바로 그러했다. 다리에 여기저기 구멍이 벌집처럼 나 있었고, 고름이 나와 말라 비틀어져 누런 딱지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저러고도 사람이 살다니, 인간의 생명력이라는 것이 이리도 강한 것인가, 정말 신이 있는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 모진 인생, 끈질긴 인연, 하염없는 눈물이 마음 속으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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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기 9 "깐야꾸마리"
우리가 타게 될 기차의 좌석표를 보고 만약에 기차가 선다면 어디쯤 해당될 것인가를 한참 연구한 끝에 적절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차가 예상했던 곳과는 정 반대쪽에 우리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쪽으로 달려갈 시간이 없어서 일단은 기차에 타서 우리 자리를 찾아가야 했다. 약 300미터 되는 어둠 컴컴한 기차 속에서, 가방 두 개를 메고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은 사람 죽이는 일이었다. 기차는 달리지, 통로는 좁지, 배낭은 커서 툭툭 걸리지, 지나가는 사람과 교행하려면 또 옆으로 피해야지, 가끔가다 열려진 화장실문이 이마에 맞아 튕겨나가지, 땀이 나서 눈은 뜨기 힘들지, 하여튼 자리를 찾아가는 10분 동안,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을 다 겪는 듯 하였다. 그때 느낀 것 --- 기차를 기다릴 때는 플랫폼의 중앙에 서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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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바라본 모습>
우리 기차 칸에 젊은이 두 명이 타고 있었다. 허름한 옷 차림에 낡고 허접한 가방 하나만 갖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두 젊은이는, 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직장을 찾아 떠나는 중이라고 말했다. 포토 프린터로 사진 한 장씩을 빼주고 즐거워하는 그들에게 "직장을 얻고 돈버는 일은 어렵지만, 당신들 행동으로 보아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라고,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격려의 말을 건넸다. 고맙다는 말을 몇 번 반복하던 그들이 어떤 역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라는 바다로 처음 항해하는 저런 젊은이에게, 좌절보다는 행운이 따라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 서 있던 젊은이가 달리는 창을 통해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Thank you, sir. I will do my best. I will succeed." 말하는 그들의 눈빛은 다부진 결의로 차 있는 듯 했다. 한 손을 흔들어 우리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른 손에는 아까 뽑아준 작은 사진이 들려있었다 --- 지갑에
소중이 담겨진 채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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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야꾸마리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지 아예 살림을 차렸는지알 수 없는 인도인들>
8시 40분에 출발한 기차는 12시 30분에 깐야꾸 마리에 도착했다.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나가는데,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도인들이 잡담을 하며 줄을 서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더위에 저렇게 서 있다니, 저 사람들이 실성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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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말로만 듣던 깐야꾸마리 해변이 나타났다. 야, 드디어 인도의 최남단에 도달했구나. 한국의 최남단이 해남이라면, 인도의 최남단이 바로 여기 깐야꾸마리다. 여기가 바로 세 대양, 즉 벤갈만, 아라비아해, 그리고 인도양이 만나는 지점이란 말인가? 내 눈앞에 광활에게 펼쳐진 바다 물빛은 푸른 바다가 아니라 인도인의 피부와 옷의 색을 닮아 있었다. 조금은
누렇고 조금은 연두색의 빛을 띄는 그런 물빛이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으며, 아무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이 일듯, 알 수 없는 곳에서 파도가 일어 육지의 바위를 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정말 인도의 "희망봉"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지, 끝없이 바다를 응시하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도, 정말 여기가 인도의 끝인가 믿지 못하여 눈을 비비고 내 앞에 펼쳐진 바다와 섬위에 우뚝 솟은 타밀 시인 티루발루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비록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가보지 못하였지만, 인도의 3대양의 합일점인 희망봉에
왔구나. 무슨 큰 염원이 해결된 듯 가슴 한 구석에서 뿌듯한, 말못할 무엇이 솟구쳐 옴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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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와 쭉 뻗은 검은 팔이 내 시선을 끌었다.>
여기 바다 위에 떡 버티고 있는 티루발루바의 상은 인도의 자유의 여신상이다. 5000명의 석공에 의해 2000년에 완성된 이 석상의 높이는 정확히 133피트(40.5m)다. 이 시인은 133장짜리 Thirukural이라는 서사시를 썼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탑의 높이도 133피트로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시인이 너무 궁금해, 구글에서 그의 시를 찾아 보았다. 그의
시 133장중 첫장과 마지막 장만을 여기 번역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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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A, as its first of letters, every speech maintains;
The "Primal Deity" is first through all the world's domains
Explanation
As the letter A is the first of all letters, so the eternal God is first in the world
A라는 글자가 첫 글자이듯, 영원한 신은 이 세상의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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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장
A 'feigned aversion' coy to pleasure gives a zest;
The pleasure's crowned when breast is clasped to breast
Explanation
Dislike adds delight to love; and a hearty embrace (thereafter) will add delight to dislike
미움은 사랑에게 기쁨을 주고, 가슴에서 울어나는 포옹은 미움에게 기쁨을 더해준다.
<구글에서 인용: 여기 번역은 원문 밑의 해설을 번역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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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들에게 성스럽게 여겨지는 이곳 ---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장사꾼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 고등을 비롯한 장식품부터 목걸이나 팔찌, 또한 세련되지 못한 가방 옷가지 들이 펑퍼짐하게 여기저기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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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속에 있는 사람들은 파도가 심해서 멀리 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육지에 가까운 곳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고, 물장난을 치기도 하며, 자신이 이곳 3 대양의 물이 물결치는 곳에 자신이 왔음을 지신(地神)과 천신(天神)에게 알리려는 듯 발버둥쳤다. 우리가 갖다대는 카메라에 온갖 제츠쳐를 취해주고, 환호성을 울리며,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된 듯 하늘을 향해 양팔을 펼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손을 흔들고 미소를 보냈다. 태양빛은 얼마나 강한지, 내 다리와 팔이 순식간에 말라 땔감이 될 듯 했고, 날아간 모자를 다시 잡아 쓰는 몇초 동안에 내 머리가 아프리카 흑인처럼 곱슬머리로 변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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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기념관>
조금 더 가면 간디 기념관이 나온다. 사실 인도의 웬만한 관광지에 가면 간디 박물관이나 기념관 또는 간디 상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곳에 가면 맨발로 들어오라는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지만, 그날은 날이 너무 더워서 맨발, 신발, 뭐 족발, 개발 새발 가릴 일이 아니었다. 무조건 들어가고 보아야 했다.
인도인에게 뭔가 설명하던 젊은이가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즉각 중지하고 우리에게 달라붙어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설명을 했다. 그후 그는 우리가 팁을 줄 때까지 떠나지를 않았다.
잠깐 내부를 본후, 구경보다 휴식이 낫다고 생각하여 그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쉬고 있는 곳에,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한 노인이 나타나,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쳐서 모두 일으켜 세웠다. 그러더니 우리가 외국인임을 알고 우리를 죄인 다루듯이 끌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그는 젊은 안내인과 교대한 안내인 같았다. 그는 위엄을 부리며 인도인들을
다 내 쫒고, 또 알 수 없는 영어로 설명을 해댔다. 그도 우리가 팁을 줄 때까지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그의 태도가 얼마나 위압적이던지, 우리는 끽소리 못하고 팁을 지불하고, 죄인처럼 슬금슬금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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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기념관: "나는 바로 이 바다의 곶(cape: 툭 튀어나온 땅)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여기는 세 개의 수역이 만나는 곳이며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경치이다. 그 이유는 이곳은 배의 기항지가 아니고, 여신과 같은 처녀성을 갖고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건물 내부에 있는 안내글이다. 간디의 유해가 한 때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내용을 읽어 보면, "1948년 2월 12일 간디의 유해가 이 지점에 있다가 물에 뿌려졌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2008년도 1월 30일자 한국의 국민일보는 이런 기사를 전한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사진)의 유골이 암살 60주기를 맞아 30일 아라비아해에 해장됐다고 AFP통신 등이 보도했다. 간디 유족들은 뭄바이 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간디의 납골함을 개봉, 유골을 뭄바이 인근 아라비아해에 뿌렸다.납골함은 간디 가문과 친밀한 인물이 보관해 왔으며 지난해 그의 아들이 뭄바이 마니 바반 박물관에 기증했다. 간디의 증손자인 투샤르 간디는
"가족회의에서 유골을 전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정, 박물관에 반환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1948년 힌두교 광신도에 의해 암살된 간디의 유해는 힌두교 의식에 따라 화장된 뒤 추모행사를 위해 여러 개의 납골함에 나뉘어 인도 각 지역에 보내졌다.<국민일보 2008년 1월 30일자(인터넷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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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디 기념관 밑에 있는 "아라비아해"를 걷다가, "인도양"을 거처셔, "벤갈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오공의 축지법도 따라오지 못할 대단한 일이다. 아, 통쾌하고 신통방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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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한 사진사가 모델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벤갈만에서 바라본 섬은 두 섬으로 분명히 나뉘어져 있었다. 내 앞에 펼쳐진 해안에는 작은 고깃배가 빼곡히 놓여 적도의 햇빛을 받고 있었다. 원색의 고깃배는 보는 각도에 따라 붉은 빛과 노란 빛을 띄면서 만화경을 통해 보는 듯 내 자신이 몽롱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이 배들이 내뿜는 색깔은 언젠가 아프리카 사진전에서 보았던 원시의 자연 색감이었고, 고갱의 그림이 왜 여기와서 있지, 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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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는 동네 사람들이 나와 잡담을 하고 있거나 꼬마들이 장난을 치고 있었고 할 일 없는 아주머니들이 나와 장기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떤 골목에서는 신세 타령을 하는지 한 아주머니가 땅바닥에 가방을 내던지고 펑퍼짐하게 앉아 지나가는 나그네를 원망조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 어떤 골목에서는 무슨 잔치가 벌어졌는지 접시에 촛불과 과일을 담아 여인들이 떼거리로 몰려가고 있었다.
아, 여기는 또 다른 인도구나! 나는 인도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움켜 쥐었다. 알 수 없는 희열감으로 손바닥에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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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5시 20분발 마두라이 행 기차 속에서,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하거나 기대 이상의 장면을 만날 때, 우리는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는 말을 한다. 참, 내 오래 살아 이런 곳을 와보다니, 이곳에 오기 전에 이런 곳이 있다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인도양의 노란 빛 물결이 눈에 넘실거리고, 조각배에 부딪친 황금빛
햇살이 내 몸을 감싼 듯 하고, 골목에서 앉아있던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눈 앞에서 아롱거린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고, 추억은 쌓아 놓고 볼 일이며, 여행은 떠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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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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