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3일 아침 7:30분 마지막 여행지인 갈레를 향해 출발했다. 지도상으로 보아 남쪽으로 곧장 빠진다면 금방 갈레에 도착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남부는 험한 산이 있어서 길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지 지도와 버스 가는 방향을 맞춰보았으나 버스는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결국 버스는 거의 캔디까지 돌아와서 서쪽으로 꺾었다가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버스 밖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고, 가끔 나타나는 대나무 공예품이 눈길을 끌었다. 아마 이쪽에 대나무가 많아서 이런 종류의 수공업이 발달한 것으로 보였다.
점심 때가 되어서 "실라시 빵집"이란 간판이 있는 식당에서 차를 세웠다. 이 집에서는 빵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먹기에 마음에 썩 드는 것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근처에 있는 집으로 구경 갔다.
반갑게 맞이하는 여자 주인을 따라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스리랑카에 가면 어디를 가나 반갑게 맞아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부엌에 가니 바닥도, 벽도, 솥도 모두 시커멓게 검댕이 잔뜩 끼어 있었다. 주인은 자꾸 사진을 찍으라는 시늉을 했다. 마당에 나무가 쟁여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이런 장애물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보였다.
큰길로 나오니 노점에 과일 몇 개를 올려 놓고 파는 남자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한참 이야기를 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참 뒤 버스에 타려고 하는데, 그 과일 노점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카메라를 놓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막 뛰어 가보니, 한 젊은이가 내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돌려주려고 했는지,아니면 가지고 달아나려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그 카메라가 없어졌다면, 아마 이 여행기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 버스는 왕복 4차선의 고속도로에 진입했고, 이 고속도로는 한국의 고속도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도로에 자동차가 한국만큼 많지 않다는 것과, 고속도로 옆에는 산도 없고 경작지도 없이 그저 평범한 잡초지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갈레에 도착하여 호텔에 배낭을 놓고 호텔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갔다. 식당이 해변에 있어서 탁 트인 조망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바로 내 앞에서 러시아 사람이 자기가 주문한 음식을 사진 찍고 있는 장면에 시선이 갔다. 식탁 위에는 바다가재 요리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재에서 나오는 김이 하늘로 올라가며 맛 있는 냄새가 나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마 입안의 침이 한 말은 목구멍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이들을 보면서, 오늘 저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바다가재 요리를 먹어보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관광 명소인 성채(城砦=성과 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어부들이 잡아온 고기를 해변에서 팔고 있었다. 무슨 고기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구미를 당기는 물고기는 아니었다. 단지 잡아온 고기를 처리하는 그들의 칼솜씨가 놀라웠을 뿐이다.
성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실제로 별로 볼 것도 없었다. 단지 스리랑카의 최남단인 도시에 와봤다는 것이 의미라면 의미있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는 관광객도 많지 않았고,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한 모퉁이에서 한 스리랑카 젊은이가 "니혼까라 기마시다까?(일본에서 왔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캉코꾸까라 기마시다(한국에서 왔습니다)"라고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유창한 일본말로 한참을 떠들었다. 나는 스리랑카 사람이 일본어를 그렇게 잘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려고 하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진땀만 났다. 차라리 아무 말이나 말걸, --- 후회가 몰려왔다. 결국 일본어를 못한다고 고백하고 말았다.
사실 전에 혹까이도에 사는 미찌꼬와 왕래를 할 때는 그런대로 일본말을 할 수 있었으나, 중국어를 배우면서 일본어를 멀리했더니, 기본적인 단어조차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설익은 일본어와 설익은 중국어를 함께 배우니, 서로 헷갈려서, 중국어가 어느 정도 내 머리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아예 일본어를 하지 않겠다고 맹서했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일본어도, 중국어도 무엇하나 잘 하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항상, "일본어 기다려라. 중국어가 어느 정도 되면 내 너를 찾아오마"라고 다짐을 해본다.
해변에서 일몰을 감상하고 있었다. 내 앞에 한쌍의 연인이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던 두 연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벌어진다면 남녀 중 누가 먼저 수작을 거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질 찰나, 여자는 먼저 남자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남자에게 서서히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엉겁결에 당했을까?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이 보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양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두 사람은 열정적인 키스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바로 내 앞에서 벌어지는 LIVE였다. 그때 젊음, 사랑, 낭만, 순수 이런 단어들이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있었다. 나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며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서정주: "국화 옆에서" 인용)을 회상하며, 잠깐 상념에 젖었다. "아, 옛날이여!"
그 날 밤, 러시아 연인들의 바다 가재가 생각이 나서 우리도 식당에 가서 메뉴를 보고 낮에 보았던 그림과 같은 종류의 가재를 시켰다. 그러나 지글거리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재가 아니라, 조금은 덜 맛있어 보이는 약간은 검은 가재였다. 조금 실망을 했지만 그러나 막상 먹어보니, 너무 맛이 있어서, 옆 사람이 더 먹을까봐 감시를 해가며 먹어야 했다. 물론 얼음에 담긴 맥주도 한잔 "딱".
그런데 같이 간 일행 중에 몇 사람이 60-70센티는 됨직한 천연색 물고기를 가지고 다니며 흥분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고기의 몸통에 상처가 난 것으로 보아, 그물이나 낚시로 잡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말을 들어보니, 어떤 외국인이 작살로 잡은 고기를 현장에서 사왔다고 했다. 그날 밤 그 물고기 맛이 어떤지 좀 따라가서 얻어 먹어볼까 했었지만, 이미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라, 배부른 사자 노루 바라보듯, 멀뚱멀뚱 구경만 하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아마 회 떠 먹고, 매운탕 끓여 먹고, 그래도 남아서 튀겨 먹고, 또 남아서 동네 개에게 포식을 시켰을 것이다. 나도 모른 척하고 그들에게 달라붙어 좀 얻어 먹을 것을 잘 못했나 보다. 역시 놓친 열차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다음 날 새벽 외다리 낚시로 유명한 아한가마로 출발했다. 사실 갈레에 온 것도 바로 이 낚시 촬영을 위해 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는 갈레에 이런 낚시터가 있는 줄 알았으나, 실제 가보니 3륜차를 타고 약 한 시간 정도 가면 아한가마라는 곳에 가야 볼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벽에 사방이 캄캄하고, 3륜차 잡기도 어려워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차를 탈 수 있었다.
정확한 거리는 모르지만 서울에서 수원정도되는 거리가 아닌가 싶었다. 새벽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 말할 수 없이 상쾌하였다. 운전수도 예상치 않은 시간에 장거리 손님을 맞이하여 목돈을 받아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디서인지 동네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전에는 이곳에서 실제로 낚시를 하였지만, 지금은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 전통의 모습만 갖춘 채, 관광객이 오면 전통적인 낚시 방법을 보여주고 그 대가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들과의 흥정이 끝나자(내가 적은 메모에 한국인 한 사람당 약 6,000원 지불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들은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외다리 막대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에 그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서 배웠던 낚시 동작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우리가 강에서 하는 낚시법과 거의 비슷했는데, 낚시줄을 힘차게 던진 다음 계속해서 낚시대 끝을 흔들어 물고기를 유인하는 방법을 썼다. 그들 곁에는 포대 자루가 있었는데, 이것은 잡은 고기를 넣어두는 그릇이었다.
이들의 전통적인 낚시 시범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그러는 중 태양이 뜨고 붉었던 바다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변해 있었다. 바람도 없는 해변에 철석거리는 파도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크게 들렸으며, 가끔 가다 바로 옆에 있는 도로를 지나는 차량이 통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가 곧 사라졌다. 생각보다 이런 낚시질은 좀 싱거웠지만, 옛날부터 이 낚시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내 언젠가는 갈레에 가서 꼭 낚시 사진을 찍어보리라" 했던 나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기뻤다.
이들에 대한 사진 촬영이 끝나자 그 사람들은 담배 한 대씩을 힘차게 빨았다. 그리고는 우리를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집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아주머니 둘이 운영하는 찻집이었다. 아주머니들은 우리를 위해 포즈도 취해주고, 부엌도 구경시켜주는 등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애썼다.
이집 바로 옆에 또 다른 집이 있었는데, 식당인지 개인 집인지 모르지만, 아주머니가 큰 칼을 이용해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보다. 아주머니가 던져 줄 고기를 먹으려고 까마귀로 보이는 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거나 옆에 세워둔 기둥에서 시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아주머니는 싱글벙글 콧노래를 부르며 칼을 휘두루는 모습이 조금은 으스스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하였다.
무형 문화재라는 것이 있다. 형태는 없지만 문화재라는 뜻일 것이다. 이런 낚시 시범도 무형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우리 이외에도 앞으로 끊임없이 이들을 촬영하러 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들 것이다. 원주민들은 계속해서 이를 이용해 돈을 벌 것이고, 또 그들의 자손이 이 일을 이어갈 것이다.
전에 어떤 외국인에게 한국에서 재미있게 본 것을 말해 달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엿판을 메고 큰 가위를 들고 쩔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가장 신기하다고 말하면서, 세계 어디를 가도 그런 것은 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민속촌에나 가야 있든지, 아니면 가끔 등산 중, 산 위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 좋은 전통을 이어갈 방법을 연구하면, 그 나름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그들에게 많은 금전적 수입을 올리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갈레로 돌아왔다.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관광지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갖가지 기념품 상회와 식당 숙박소 상점 그리고 배를 빌려주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삼륜차 운전수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기 차를 타라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어떤 곳에 한 노인이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듯 옆에 지팡이가 있었고 한쪽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늙었으면 몸이나 성하든지, 몸이 성하지 못하면 젊기라도 해야할텐데, 그는 불행스럽게도 늙고 힘이 없고 병이 있어 보였다. 그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는 지팡이와 자기 다리 그리고 배를 만지고 손을 벌리는 것으로 보아, 사진을 찍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였다. 약간의 돈을 주고 사진을 찍기는 찍었지만,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사진기를 내 팽개치고 싶었다.
배가 고파 죽으려고 하는 아이 옆에 큰 독수리 한 마리가 있다. 그 독수리는 그 아이가 죽으면 시체를 먹으려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런 장면을 찍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아이를 도와주기는커녕, 죽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사진사는 큰 비난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만, 내가 이 노인을 사진 찍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노인의 표정이 너무 그늘져 있었다.
우리 호텔 가까이에 한 식당이 있었다. 탁자 위에 나무 그림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의자와 쿠션이 색색으로 놓여져 편안함 느낌을 주었다. 인도에 이어 스리랑카 여행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그저 저 의자에 앉아 편히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 위에 있는 야자수 나무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한 무리의 새가 다가오면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일부는 가고 또 일부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노래를 불렀다. 새들은 "너 언제 갈레?"라고 나에게 말하는 듯이 보였다. "우리는 곧 콜롬보로 간다. 너희들은?"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안 갈레. 그냥 갈레에서 살래."라고 대답하는 듯 했다. 새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부르는 노래가 안단테 칸타빌레가 아닐까 생각했다. "안단테 칸타빌레", "노래하듯이 천천히"라는 뜻이지! 나는 노래하듯이 휘파람을 불면서 콜롬보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현장 촬영 비디오: 아한가마 낚시: 상영시간 1분 7초 (배경음악 Eros, Eros)
*우리는 그날 즉 2014년 1월 24일 낮 12시 콜롬보로 출발하였다. 콜롬보 도착 후 몇 시간을 시내에서 보내다가 다음날 새벽 2시경 홍콩으로 출발하였다. 우리 비행기는 싱가포르에서 잠깐 쉬고 다시 출발하여 25일 낮 12시쯤 홍콩에 도착하였다. 홍콩에서 1박하고 26일 오후 2시경 인천 공항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