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7일 오전, 어제의 술판에서 오는 피곤함 때문인지 파나마 행 비행기를 타자마자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세 시간 정도 지난 후, 누군가가 "경치 기가 막힌다"라는 말에 창문을 여니, 이미 배행기는 파나마 시티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열대의 삼림과 푸른 바다 위로 뭉게구름이 박격포 발사 뒤의 연기처럼 꿈틀거렸다. "저 바닷물에서 수영을 하고, 저 숲속에서 몸의 피로를 풀고, 저 마을에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에서는 경험해보기 힘든, 꿈 같은 일정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8시 40분 휴스턴을 출발한 항공기는 약 4시간 뒤에 파나마 시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막상 내려보니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망막했다. 열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호텔 예약도 없이 덜렁 이국 땅에 도착했으니 어디부터 손을 써야할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경험은 모두 처음이었기에 일단은 뿔뿔이 흩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봉고차를 빌려서 10명이 모두 한 차에 타고 짐도 다 실었다. 그리고 일단 파나마 시티의 구 시가지 근처에 가기로 했다.
<파나마에 도착하기 직전 촬영됨>
옛 시가지인 카스코 비헤오 근처에 차를 잠시 멈추고 몇 사람이 근처의 호텔 몇 군데를 알아보았으나 우리가 원하는 가격대의 호텔이 없었다. 다시 차를 타고 더 들어가서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루나스 캐슬 호스텔의 단체 숙박실(도미토리)이 그래도 제일 낫다는 판단을 했다. 문제는 근처에 디스코장이 있어서 밤새도록 시끄럽다는 것이었는데, 시끄럽건 말건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파나마 시내>
루나스 호스텔 (아래 지도의 1번) 다인실에 들어가니, 넓은 방을 한 사람이 차지 하고 있었고, 이 사람도 어디 구경을 나갔는지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모두들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밖으로 나가 호스텔 여기저기 다니면서 시설을 살폈다. 스페인 식민지식 건축물로 보이는 이 호스텔에는 우리 이외에 많은 젊은 여행객들이 음식을 먹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북적거렸다.
<우리 숙소 루나스 캐슬 호스텔>
호스텔 뒤쪽을 보니 허름한 집에 한 남자가 윗통을 벗고 책을 읽고 있었다. 너덜거리는 창문과 벽지, 손상된 벽, 그리고 시멘트 바닥에 깔아 놓은 침대,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옷가지가,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고달픈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희희낙낙하고 밤새도록 디스코 추고, 한쪽에서는 땅 위에서 잠자고 책을 읽는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호스텔의 앞쪽에는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이런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즐기면서 맥주잔을 기울이는 젊은이가 보였다. 옥상을 개조하여 야외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파나마를 떠나기 전에 저 집에서 맥주 한 잔 반드시 마시겠다고 맹서했지만, 결국 그러지도 못하고 파나마를 뜨게된 것은 아쉽기 그지 없는 일이다.
우리 호텔에서 옛 스페인 식민지의 건물을 바라보며 골목을 돌고돌아 해변을 따라서 프란시아 광장(위지도의 2번)으로 향했다. 비수기라 그런지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길 위에 차려진 노점상도 적극적으로 손님을 끌 의사가 없는 듯 했다. 탁 트인 바다와 나무에서 짖어대는 까마귀를 닮은 새들의 울음 소리만이 한적한 오후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어느 새 날은 저물고 여기저기 불빛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붉은 등불 아래 고색창연한 골목을 지나는 것은 소금기 묻은 습기찬 바닷 바람뿐이었다. 가끔가다 골목을 지나는 자동차의 불빛에 일렬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짧아졌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길어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근처에 근사한 식당도 있었고 허름한 식당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예상 밖의 이방인 손님을 맞아, 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댔다. 닭다리와 밥이 들어있는 음식이 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노란 쏘스에 묻혀진 음식과 콜라를 먼저 시킨 사람에게 음식이 전달되자 사람들은 다짜고짜 묻기 시작했다. "먹을 만혀?" "먹을 만혀!" 질문하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같은 말에 억양만 달랐을 뿐, 그 말이 그 말이었다.
식당 문에서는 한 남자가 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고 뭐라고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바쁜 아주머니를 도와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남편이 아닌 듯 싶었다. 그렇다고 거지도 아닌 폼이었다. 아마도 식당 아주머니를 좋아하는 돈 없는 건달로 보였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팬케익이나 부쳐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당. 위지도의 (3)번 자리>
성당 앞에 있는 정자에서는 노인들이 밤이 되어도 집에 가지 않고 무슨 이야기를 끝없이 해대고 있었다. 이런 노인들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그 옆에는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여름 논에 메뚜기처럼 뛰어 다녔다. 내가 카메라를 갖다 대기만 하면 검은 하늘에 박쥐 날 듯,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아이들은 이미 수 많은 관광객이 들이대는 카메라에 신물이 났는지도 모른다.
밤이 깊었다. 그냥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카메라를 메고 혼자 멀리 아름답게 채색된 환형(環形) 다리로 향했다. 파나마 시티 앞바다를 감아 돌아가는 자동차 다리다. 그곳으로 향하는 중, 길 옆에 듬성듬성 서 있는 장사꾼이 무엇인가를 팔면서 나보고 사달라는 시늉을 했다. 다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색찬란한 이 다리는 부메랑처럼 하늘로 치솟다가 다시 내게로 다가오는 듯 했다.
이런 찬란한 하늘 밑에 왜 사람이 없을까? 눈을 크게 떠보니 부메랑 다리 근처 여기저기에 포옹을 하고 키스를 나누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왜 젊은이는 저러는데 늙은이라고 못 할까? 사회적 분위기일까? 아니면 옛부터 내려온 전통일까? 좀더 생각해보니, 젊은이들의 포옹은 내부에서 솟아나는 참을 수 없는 생리적 욕구의 분출이고, 노인의 그것은 상대방을 배려해서 감정없이 해주는 억지 춘향이란 생각이 들었다. 공부라는 것도, 해야만 해서 하는 놈이 좋아서 하는 놈을 당할 수 없듯이, 억지로 손을 잡아주고 포옹을 한다고 해서 사랑이 싹트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돌아오다가 일행 두 사람을 만났다. 맥주 몇 병을 사서 바닷가에서 마셨다(위 지도의 4번). 깊은 밤도 아닌데, 왜 이리 사람도 없고 적막할까? 그때 어디서 시커먼 복장을 한 두 사람이 나타났다. 깜짝놀라 바라보니, 야외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게 되었으니 실내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경찰이 야외 술단속을 나온 것이었다. 아무 데서나 술 마실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 좋은 나라다!
<11월 8일 새벽의 노을>
다음 날 새벽 바닷가 광장을 다시 찾았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오는 길목이었다. 하늘을 물들인 선연한 노을이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도 어두움이 밝음으로 바뀌는 순을 포착할 수는 없다. 얼마나 신비로운 시간인가? 헬렌켈러는 "내가 삼일간 눈을 뜰 수 있다면"에서, 밤이 어떻게 해서 낮으로 바뀌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어물쩍 거리다가 우리네 인생이 늙어가듯, 붉은 노을이 청색과 백색의 싸늘한 공간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치 TV의 한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듯이 그저 한 순간에 하늘이 바뀌었다.
<사람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상품을 전시하기 시작한다.>
<7월 8일 소형 버스를 빌려 다녀온 곳: 파나마 운하(미라 플로레스)와 포르토벨로 >
우리는 일당 30만원에 차를 빌려서 파나마 운하에서 배가 통과하는 장면과 옛 도시 포로토벨로를 돌아보기로 했다. 파나마 시티 근처의 허접한 민속 박물관과 이름없는 몇 군데를 거쳐 파나마 운하로 향했다.
<미라플로레서 운하 전망대>
파나마에는 왜 가나? 파나마 모자를 사러가나? 파나마 모자는 사는 사람이 없으니 파나마나다. 우리가 파나마에 가는 것은 파나마 운하를 통해 배가 어떻게 통과하는 지를 보기 위해서다.
파나마 운하라!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외웠던 운하 두 곳: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다. 드디어 오늘 그 장면을 바로 이곳 파나마에서 내 두눈으로 보는 것이다!
일년에 13,000대의 배가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고 이로 인해 파나마는 20억불의 운송료를 챙긴다. 세계의 조선업자들은 파나마 운하를 통과시킬 생각을 염두에 두고 길이 305미터, 폭 33.5미터 이하의 배를 만든다. 배 한 대의 통과료는 평균 30,000달러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통과료를 낸 배는 Norwegian Pearl이란 배로 1회 통과에 376,000불을 지불했다. 가장 적은 통과료를 낸 것은 겨우 0.36불이었다. 그것은 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1928년 수영을 해서 건넌 그는 바로 Richard Halliburton이었다. <로운리 플래닛에서 발췌하여 필자 번역>
<전망대에서 구경꾼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몸싸움을 한다.>
파나마 운하를 통해 배가 통과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은 몇 군데가 되는데 우리가 간 곳은 Miraflores Locks라는 곳이다. 파나마시티 외곽지역에 있으며 자동차로 20-30분이면 도착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전망대에 모여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이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조금도 비켜주지 않으려고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어서, 키가 큰 사람이라야 겨우 얼굴을 내밀 자리만을 얻을 수 있었다.
사진 찍는 사람들: "에이, 사진도 안 찍으면서 좋은 자리 차지하고, 참 내 어이가 없네."
사진 안 찍는 사람들: "에이, 눈으로 보는 것도 어려운데 사진기가 좋은 자리 다 차지하고, 참 내 어이가 없네."
<배가 대서양 방면에서 서서히 진입한다.>
배는 서서히 대서양 쪽에서 태평양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양쪽에 4대의 자동차가 았었는데, 겉모습은 자동차지만 레일 위로 달리는 일종의 기차였다. 레일은 스위스 고산 위로 올라가는 기차처럼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이런 레일 위로 체인을 단 자동차 바퀴의 구멍이 맞물리면서 자동차는 전진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배는 강철 밧줄로 4대의 자동차에 매여서, 마치 앙을대며 대들던 며느리 고약한 시에미에게 머리 끄뎅이 잡혀 안방으로 끌려가듯 끽소리 못하고 도크로 끌려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뒤쪽 수문이 내려와 도크를 막아 버렸다. 순간 물이 소용돌이 치는 것으로 보아 물속 어딘가에서 물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였다. 태평양쪽에 있던 상부의 물과 수위가 같아지는 데는 불과 몇분 걸리지 않았다. 배가 있는 쪽의 수면과 태평양 쪽의 수면이 같아지자 마침내 태평양쪽에 있던 수문의 가운데가 꺾어지면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열린 문으로 배는 자동차에 의해 견인되어 서서히 끌려갔다.
난생 처음보는 장관이다! 무척 감격스럽다! 인위적인 신비도 자연의 신비만큼이나 감격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말로만 들어오던 파나마 운하로 배가 통과하는 장면을 바로 여기서 내 두눈으로 목격하다니!
멀리 구름이 용트림을 하듯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던 들판의 갈대가 바람에 춤을 추며 울렁거렸다. 땅도 흔들리고 하늘도 으르렁거렸다. 바로 이곳 파나마 운하 현장에서!
<배가 들어오고 뒤 수문이 잠겼다.>
<수문이 잠기자 어디서인지 모르지만 사방에서 물이 나와 수면이 상승했다.>
<두 곳의 수위가 같아지자 수문의 중간이 꺾이면서 열린다>
<활짝 열린 문으로 배가 통과한다>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려면 이런 과정을 또 한번 겪는다>
Portobelo(포르토벨로)
아름다운 항구라는 뜻의 Portobelo는 컬럼버스에 의해 명명되었는데, 그는 1952년 신대륙을 4번째 방문할 때 이 마을에 들렀었다. 그 이후 이곳은 200년 동안 스페인 항구로 사용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보물 루트로 사용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영국 제독 Edward Vernon은 1739년 Portobelo를 파괴해 버렸다. 1751년에 다시 복구되었으나 예전의 명성을 얻지 못하고 폐허로 남아있다. 가장 뛰어난 성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뜯겨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국립 공원과 역사적 명소로 남아있다.
<Lonely Planet에서 발췌하여 필자 번역>
우리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날이 흐리고 해는 이미 상당히 기울었다고 생각되는 늦은 오후였다. 몇몇의 관광객이 옹기종기 모여 사진을 찍거나 무너진 성벽을 걸어보고 있었다. 성벽 너머로 종이배같은 어선들이 조어를 멈춘 채, 살랑거리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시조가 생각났다. "성벽은 무너지고 포신(砲身)만이 애처롭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마을 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또 다른 성벽이 있었다. 윗머리는 다 날아가고 듬성듬성 포신만을 몸에 품은 채, 말 없이 철석거리는 바닷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곳까지 길게 뻗어 있는 성벽 위에 동네 아이들 몇 명이 나와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올 것을 걱정한 것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찾아온 관광객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이들은 바다를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성벽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성벽 위를 넘다가 신발이 미끌어지는 날에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법도 한데,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우사인 볼트처럼 재빠르게 겅충겅충 갈라진 성벽을 뛰어넘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곳에 있는 한 교회(Iglesia de San Felipe)에는 실물 크기의 흑인 예수 상이 있다. 1776년에 지어진 이 교회의 예수상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면 왜 흑인 예수상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을까?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콜롬비아를 향해 출발하려던 배가 강력한 폭풍이 일어나 출발할 수가 없었다. 배는 거의 부서지고 사람들은 혼미한 상태가 되었다. 여섯 번째 출항때는 배 위에 있던 무거운 박스를 바다 위에 내 던지고 항해를 했는데 별 문제가 없이 순항을 하게 되었다. 며칠 뒤 그 지역에 사는 어부들이 무거운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흑인 예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곳에 있어야할 흑인 예수를 훔쳐가는 자들을 벌하기 위해 폭풍이 쳤다고 할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흑인 예수를 설명하기에는 옹색한 변명이다.
하기야 본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처음 생겨났다고 한다. 그들은 아프리카에만 머물지 않고 서서히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그 당시는 대륙의 모습이 지금과는 달라서 아프리카와 유럽 사이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아니라 개울물 건너듯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바다가 있었다고 한다. . 확실한 것은 아프리카에 있던 우리의 조상은 여러 대륙으로 활동무대를 넓혀나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흑인을 조상으로 둔 끈끈한 혈맹의 후손들이다.
우리는 중간에 콜론이라는 도시에서 잠시 멈추었다. 우리는 다시는 못올 이곳을 대충이라도 한바퀴 둘러보고자 했다. 그러나 운전수는 위험하다며 우리가 차밖에 나가는 것을 말렸다. 그러고 보니 시내가 어둡고 흑인들이 많았으며 뭔가 을씨년스런 기운이 맴도는 것 같았다. 누구 하나 그 말을 듣고 감히 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번 중미 여행중 "위험하다, 조심해라, 같이 다녀라, 밤에 나가지 말아라" 등등의 말을 낮이나 밤이나 진절머리가 나도록 들었다. 사실 위험하지 않은지, 아니면 우리가 조심했기에 그런지, 우리는 별 문제없이 이번 여행을 끝마칠 수 있었다. 단지 몇 가지 물건을 잃어 버린 사건이 있었지만, 물건잃어 버린 것을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가볼 곳을 좀더 많이 가봤으면 하는 생각이 지금 이 시간에 드는 것은 오직 나만 그럴까?
<10초 동영상: 파나마 게스트 하우스>
11월 7일 파나마시티 숙박소: Luna's Castle Hostel. 도미토리 침대 1인당 약 16,000원
자동차 1일 렌트비: 1인당 약 30,000원
*써 놓고 보니 너무 길게 썼습니다. 쓰기도 힘들고, 읽기도 힘든 이런 일을 왜 하는지 반성하면서. 다음부터는 짧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