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일간 중미 여행기 3: 파나마의 다비드 그리고 코스타리카로 출국
"보케테의 대 자연을 가슴에 품다."
파나마 시티의 우리가 묵고 있는 도미토리 방에 유일하게 함께 있는 외국인은 20대의 오스트리아인이었다. 그는 17일째 파나마에 머물고 있으며 앞으로 일주일을 더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결국 그는 24일을 파나마에서 머무는 셈이 된다.
우리는 본래 파나마 시티에서 1박하고 다음 날 밤에 코스타리카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온 젊은이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의 일정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필요했다. 어떤 사람은 24일간을 머무는데, 우리는 멀고도 먼 한국에서 파나마로 와서 단 1박만 하고 다른 나라로 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왜 파나마에서 1박하는가? 파나마에서는 파나마운하를 제외하고는 별로 볼 것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
볼 것이 없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볼 값어치가 있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우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 멀리 가면 사실은 모든 것이 다 볼거리다. 자세히 보면 모든 것이 자기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잡초보다는 장미 한 송이가 더 볼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미가 아름답기는 하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 볼품 없어 보이는 잡초도 그 나름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있다. 단지 사람이 자라온 배경과 환경, 전통, 역사, 습관, 편견 이런 것에 의해서 장미가 더 아름답다고 섣불리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경주가 역사 도시로 볼 것이 많기는 하나, 거기에 도착하기 전에 김천이나 칠곡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도시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
어떤 사람은 차를 타자마자, 커튼을 내리고 잠자기 시작한다. 그들은 목적지에 내려 관광 명소 이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차를 타고 가면서, 어쩌면 보나마나한 창밖을 몇 시간이고 계속 보면서 간다. 그 나무가 그 나무고, 그 산이 그 산이겠지만 계속 보면서 간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차를 타고 가면서 몇 시간이고 창밖을 계속 본다. 같은 그림이 끝없이 펼쳐지지만,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책도 보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창밖을 본다. 졸리면 어쩔 수 없이 자기도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졸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뭘 봤냐고 묻는다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할 말도 없다. 그래도 계속 본다. 지나가는 사람도 보고, 개울도 본다. 재수가 좋으면 황혼에 물든 사탕수수의 금빛 물결을 보기도 하고, 장작을 실은 나귀가 끌고 가는 수레도 본다.
하여튼 우리는 한 나라에서 최소한 2박 이상은 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 지도를 놓고 보니 코스타리카로 가는 길에 두 개의 큰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산티아고이고 다른 하나는 다비드였다. 국경을 넘을 것을 고려하여 파나마 제2의 도시 다비드에서 1박하기로 했다. |
1월 9일 자정이 조금 넘어서 다비드행 야간 버스를 탔다. 사람이 많지 않아 여기저기 빈자리가 많았다. 자리는 중국의 침대처럼 누워서 가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가는 보통 버스였다. 등받이를 약간 뒤로 젖힐 수 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후라, 모두들 곧바로 잠에 골아 떨어졌고, 버스는 어둠을 밝히고 서쪽으로 달렸다. 6시간 반이 지나서 다비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들의 호객행위가 도를 넘을 정도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여행객에게 죽자살자 달아붙어 자기 차를 탈 것을 주장했다. 막상 어떤 숙소로 가야할지 몰라, 로운리 플래닛에 나온 한 곳을 가기로 했다. 차 한 대당 3-4천원에 기사와 합의를 보고, 3대가 동시에 출발했다. 채 10분도 걸리지 않아 목적지에 왔으나, 마침 빈방이 없었다. 다른 곳으로 약 500미터 가다가 호텔이 있어 멈추고 짐을 내렸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했다. 기사들은 두곳을 거쳐왔으니 택시 요금을 두배로 내라고 떼를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말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사 중에 인상이 좀 고약한 사람은 핏대를 올리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경찰을 불러라, 뭐하라, 호텔 앞은 난장판이 되었고, 급기야 건네 준 돈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사태까지 가고 말았다. 결국 1-2천원 더 주는 선에서 사건을 간신히 종결했다.
타기 전에 좀더 구체적인 조건에 합의를 하고, 그 조건대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못 했던 것이다. 그날 오전 10시경 보켓이라는 곳으로 함께 투어를 떠나면서 일행 중 한명이 말했다. "아까 그 기사들 생각이 짧은 거예요. 아침 택시 요금을 깎아주고, 오늘 하루, 자기 차를 타고 관광을 하자고 했었어야지요. 그까짓 3천원이 아니라 6만원을 챙기는 것 아닙니까? 당장 눈앞에 놓인 이득만 생각했지, 조금 앞을 내다보면 돈이 벌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평생 저렇게 사는 겁니다." |
<보케 마을 거의 다와서 택시는 잠깐 쉬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아침 식사를 했다. 여행사에 가서 봉고차를 한 대 빌려 로운리 플래닛에 나와 있는 주변 명소로 관광을 갈 생각으로 근처의 여행사에 들렀다. 그러나 왜 그런지 빌려줄 차가 없다는 것이 여행사 직원의 대답이었다. 두 군데 가서 허탕을 치고,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빌려 가기로 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한 대당 6만원에 3대를 빌렸다. 이것은 전날 파나마에서 봉고차 한 대에 30만원에 비하면 훨씬 싼 셈이다.택시와 렌트카와 노선 버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저렴한 교통 수단인지에 대해 우리는 점점 눈이 떠가고 있었다. |
<참고: 위 사진이 우리가 다녀온 곳인데, 이 도시 이름을 잊어 버렸다. 여행기를 쓰기 위해 스마트폰에 매일 기록을 해 놓았는데, 그 일기장에 도시명이 적혀있지 않았다. "밴드"를 통해 다른 분께 물었어도 대답이 없었다. 여행기는 써야지, 갔다온 장소도 모르지 난감했다. 인터넷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구글 어스를 사용해보라는 글을 읽고, 그 당시 찍어 둔 사진을 구글 어스(Google Earth)에 넣어보니 촬영한 장소가 표시되었다! 일행 중 한 명인 권일님의 사진이 정확하게 지도에 꽂혔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가 다녀온 곳이 보케테임을 확인했다. 보케테는 휴양도시로 은퇴한 외국인이 많이 와서 거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
보케테 시내를 지나 차는 가파른 길로 치솟아 올라갔다. 그런데 막 커피 농장에 접어들려고 하는 데, 고목이 쓰러져 자동차가 지날 수가 없었다. 운동이 부족했던 우리는 기꺼이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사람과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연두색 이끼로 가지런히 덮혀 있었다. 조금 올라가니 길 양쪽으로 커피나무가 눈에 띄었고, 비를 맞아 열매에 물방울이 싱그럽게 맺혀 있었다. 멀리까지 뻗어 있는 커피 나무를 보면서 발걸음 가볍게 걸었다. 한 가지 이상했다. 커피 나무에서는 커피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
길 아래로는 멀리 보케테 시내가 아스라히 펼쳐져 있었고, 길 양쪽으로 아름드리 나무가 이끼를 축 늘어뜨린 채 가랑비를 맞고 있었다. 길 끝에 있는 근사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는, 벽이며 탁자에 갖가지 소품이 놓여, 이 집이 숙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근처에 하얀 빛이 도는 나뭇잎을 가진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끌었다. 또 다른 나무 위에는 난초과의 식물이 기생하여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
<커피 농장에 장대비가 내린다.>
곧 비가 억수처럼 퍼붓기 시작했고, 열대의 소나기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하늘에서 고드름이 떨어지듯 빗줄기는 선을 그리며 초록의 도화지에 흰줄을 뿌리고 있었다. 비덕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오랜만에 서로 충분한 대화를 나눈 것은 비가 대지와 인간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은혜라고 여겼다. |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Explorador라는 개인 정원이다. 입장료가 5000원이나 되어서 망설여졌다. 그러나 로운리 플래닛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에 전원이 입장하게 되었다. It's like something out of Alice in Wonderland, with no shortage of quirky eye-catching displays.(이상하게 눈을 사로잡는 전시물이 많아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Alice in Wonderland라! |
이 사설 정원의 가장 큰 특징은 자그맣고 옹기종기하고 예측을 빗나가게 여기저기 각종 구경거리가 산재해 있다는 것이다. 정원이 한창 전성기인 4-8월에는 앙증맞도록 귀여운 정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열대의 겨울로 접어든 11월이었다. 사람이나 식물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세월가서 늙다보면, 볼품없는 쭈구렁 망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다운 경치도 아니고, 이상한 나라도 아닌 흰둥이 개였다. 그 개는 입장하자마자 우리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앞장서기도 하면서 충직한 안내 역할을 했다. 사람들에게 아양을 떨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사랑을 받던 이 개는 너무 힘들었는지 시냇가로 가서 물을 벌떡벌떡 핥아 마시더니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
보케테 시내에 와서 한 식당에 들렀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다른 한 쪽에 우리 택시 기사들도 자리를 잡았다. 어쩐 일인지 늦게 들어온 기사에게 음식이 먼저 배달되었다. 기사들이 식사를 먼저하고 차로 돌아가도록 배려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기사들이 식사를 끝내고, 한참을 잡담을 해도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기사들과 차별 있는 음식이 나오나보다. 음식만 잘 나온다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 뭐 대수인가,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음식은 계속 나오지 않고 시간은 갔다. 옆에 앉은 택시 기사들은 지겨워 죽겠다는 듯 온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일행 중에도 배고파 죽겠다는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식당에 온지 한 시간이 지났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 지겨움, 괴로움에 체면이고 뭐고 내려놓고, 웨이터를 불렀다. "왜 음식이 안 나옵니까?" 놀랍게도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당신들이 아직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메뉴를 보고 "나는 이것을 먹는다, 너는 저것을 먹어라", 라고 말은 많이 했지만, 막상 아무도 주문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
<보케테 시내>
다음 날 즉 11월 10일 아침 7시 30분에 버스 터미널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푸론트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택시가 왔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짐을 싣기 사작했다. 나는 (1)큰 배낭, (2)작은 배낭, 그리고 물이나 일상용품을 넣어 두는 어깨에 메는 (3)쇼핑 가방이 있었다. 여행가기 전 동대문에서 3만원 주고 구입한 쇼핑백이다. 분명히 큰 배낭과 쇼핑백을 들고 밖으로 나가 자동차의 트렁크에 실었다. 옆에 있던 K형이 다른 짐은 없는지 물었다. 그래서 호텔 로비로 가서 마지막 남은 작은 가방을 들고 와서 택시에 탔다.
택시를 타고 오면서, 쇼핑백은 어디있는지 옆에 있는 사람이 물었다. 나는 트렁크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버스 터머널에 내려 트렁크를 여니 분명히 있어야할 쇼핑 가방이 없었다.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와서 머물렀던 로비와 호텔 방을 찾아보았으나 분명히 있어야할 가방은 행방이 묘연했다.
잃어 버린 쇼핑 백에는 로운리 플래닛 책, 셀카봉, 안경 닦는 수건, 그리고 기억할 수 없는 물건 한 두 가지가 더 들어 있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돈과 여권을 잃어 버리지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네."라고 내가 말했다. "뭐라? 가장 중요한 책 로운리 플래닛을 잃었는데, 뭐가 다행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이후로 셀카봉은 사려고 했으나 파는 곳이 없어서 결국 구입하지 못했다. 로운리 플래닛은 미리 잃어 버릴 것을 알았는지, 전자책으로 따로 핸드폰에 다운받아 둔 것이 있었다. 안경 닦는 수건이 그렇게도 중요한지는 이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 부분에서 촬영한 사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찍음>
8시 30분에 다비드 터미널에서 국제 버스를 타고 코스타리카 국경에 도착했다. 9시에 수속을 받고 국경을 통과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서 코스타리카 입국 수속을 마치니 10시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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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동안 끝 없이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
이후 버스는 들판을 달렸다. 열대지방이라 길 옆에 높은 나무가 시야를 가려서 그 너머 평야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계속 창밖을 주시 했다. 장승처럼 서 있는 나무만 보였고, 가끔가다 듬성듬성 보이는 빈 공간으로 잡초만이 무성했다.
모든 사람이 피곤하여 잠을 자는데, 바로 내 뒤에서 한쌍의 부부가 끝없이 이야기를 해댔다. 사실은 여자가 계속 이야기 했고, 남자는 추임새만 넣었을 뿐이다. 지칠만도 한데, 몇 시간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댔다. 한 마디로 질릴 정도였다. 카메를 뒤로 돌려 한 장 사진을 찍고, 지금 여기서 이 여자의 모습을 나도 처음 본다. 참 대단한 여자다! |
<우리가 타고 갔던 국제 버스>
<중간의 휴게소>
이후 우리 차는 중간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한 번 섰고, 그리고 또 한 번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이후 고도를 높여 굉음을 내면서 위로, 위로 달렸다. 내가 갖고 있는 시계의 고도가 1000미터 이상임을 보여준다. 한줄기 소나기가 내리더니 하늘이 말끔해졌다. 잠시 후 버스는 산호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1월 10일 오후 4시 40분이었다. |
<산호세에 도착했다.>
*11월 8일 숙박: 버스 안 *11월 9일 숙박: 다비드 뿌에르따뗄 호텔. 2인 1실: 45,000원 *11월 9일 자동차 렌트비: (택시 한 대당) 60,000원 × 3대 ÷10명 = 일인당 약 18,000원
(2015년 1월 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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