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 1>
명예퇴임을 한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전에도 내 나름으로는 자유롭게 산다고 살았지만, 명예퇴임을 하면서 10년간은 정말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보자고 결심했었다. 이제 9년 남았다.
필리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5월 29일부터 6월 27일까지 정확하게 30일간 필리핀에서 머물렀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글의 목적은 필리핀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경험은 그야말로 너무 보잘 것 없기에("너무 일천하기에"라고 쓰려고 하다가 글이란 쉽고 명료하게 써야된다는 철칙에 따라 풀어썼다.), 감히 필리핀에 대해 정확한 기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인생사를 되돌아 보아도 인생에서 정확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카메라가 아니기에, 본 것보다는 본 것을 근거로 나의 느낌을 더 중시하여 글을 쓰고자 한다.
지금까지 나의 글이 그랬듯이, 나는 항상 첫 느낌을 중시한다. 사물이나 풍경, 인물 등의 첫 인상에서 나는 많은 것을 판단하고 그 느낌을 기록한다. 따라서 나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곳을 다녀와도, 나름으로 글을 쓸 수 있다. 느낌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등산기를 몇 편 썼지만, 사실을 기술한다면, 등산에서 쓸 글거리는 많지 않다. 그냥 "가만히 있는 산에 내가 갔다가 왔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금 더 자세히 쓴다면, "몇 시에 어디를 출발하여 몇 시에 어디에 도착하였다"라는 말 이외에는 별 할 말이 없는 것이 등산기다. 이런 등산기를 쓰고 싶지도 않고, 이런 등산기를 읽기 원하는 독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느낌을 중심으로 상상력을 자극하여 이야기를 쓰게된다. 같이 등산 간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사실인지 창작인지 헷갈리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남은 여생을 어디서 살 것인가를 많이 생각해왔다. 우선 외아들인 준영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리고 아내가 직장을 그만둘 때까지는 서울에서 살 도리 밖에 없을 것이다. 세월이 좀 흘러, 위 두 문제가 해결되면, 서울에 살지 않기로 했다. 설령 서울에 적을 두더라도, 많은 세월을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기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서울에서 살지 않기로 생각한 첫 번째 이유는, 공기와 물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전부터 느꼈던 일이지만 시골에 갔다가 서울 근처에 오면, 눈에서, 폐에서, 아니 온 몸으로 이곳은 내가 살 곳이 못됨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나의 하루 생활이다. 여행을 제외한 보통의 하루는, 대부분을 독서를 하거나, 컴퓨터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거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체육관에 가거나 등산을 가는 것이 나의 생활의 기본이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라면, 국내건 국외건 더 좋은 조건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많을 것이다.
왜 필리핀인가? 왜 그런지 필리핀에 대해 나는 호감을 갖고 있었다. 우선, 홍콩과 더불어 동남아에서 영어가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아닌가 한다. 두 번째는 그들의 인상이 좋다는데 있다. 동남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들은 항상 낙천적인 듯이 보였었다. 재산이 없어도, 배운 것이 없어도, 몸이 불편해도 항상 즐거운 그들이 부러웠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은 아닐지 모르지만, 행복이 인생 목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서 배울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에 관심이 있었다.
1. 많은 한국인이 필리핀에서 은퇴하여 산다고 하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가?
2. 패키지 여행이 아닌, 개별 여행으로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3. 이국적인 장면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을까?
4. 나의 체력이 한 달간 또는 그 이상의 여행에 견뎌낼 수 있을까?
5. 몇몇 책을 읽어보면, 필리핀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정말 위험한가?
6. 여행의 중요한 부분인 현지인들과의 접촉은 원만히 될 수 있는가?
올 초 시험 삼아 패키지 투어로 며칠 세부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패키지 투어는 개인적인 자유가 없이 가이드의 지시대로 하는 관광이다. 이 관광에서 필리핀에 대한 느낌은 새로웠지만, 많은 행동의 제약을 받았었다. 결국 필리핀이 이국적이라는 것 이외에는 그 나라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재미있게 놀다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껍데기의 즐거움이니, 내적인 즐거움은 못되었다. 아쉬움이 남았다.
또한 이전에 서울의 덕수궁 옆에 있는 필리핀 전문 여행사인 락소 여행사에서 주최하는 필리핀 은퇴이민 설명회에도 다녀왔었다. 그런데, 실제를 보지 못한 상태로 말만 듣는 것은 그저 뜬구름 잡는 격이어서, 나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장기 필리핀 여행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모임에서 필리핀에서 한 달간 묵을 수 있는 집을 소개 받았다. 마침 나와 같이, 한 달간 머물고 싶은 분이 두 분 있어서 함께 가기로 했다. 가기는 함께 가지만, 상황에 따라 또는 목적에 따라, 활동은 같이하기도 또는 따로 하기도 할 것이다.
서점에 가서 필리핀에 관한 책을 3권 샀다. 나는 본래 어디를 갈 계획이면, 안내 책과 지도를 산다. 돈은 좀 들지 몰라도, 그만한 값은 뽑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두 권은 한국 사람이 쓴 책이고 한 권은 외국인이 쓴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패키지 여행을 따라다닌다면 어떤 책이건 상관없지만, 자유 여행이라면, 위 사진에 나온 Lonely Planet Series인 Philippines(p. 492)가 내가 아는 한 최고로 좋은 책이다. 나는 여행에 관한 책 중 이렇게 좋은 책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마닐라 이외의 지역을 여행할 때, 이 책을 중심 으로하고, 인터넷의 도움을 조금 받았다. 이 책은 영문판도 있고, 한글 번역판도 있는데, 정확한 발음이나 철자를 원한다면 영문판이, 영어가 좀 힘들면 번역판이 좋을 것이다. 나는 영어 공부도 할 겸, 31,000원을 주고 영문판을 샀다. 그리고 며칠 그 책을 읽고, 내 스스로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한 5월 29일 가장 값이 저렴한 세부항공을 이용하여 마닐라로 출발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