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 2>
<사진설명: 하숙집 옥상에서 바라본 마닐라 동쪽 하늘- 비행기가 지나간다>
우선 마닐라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서울특별시에 광진구, 강남구, 도봉구가 있듯이,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것을 Metro Manila라고 하고, 광진구, 강남구 등 구에 해당하는 것을 City라고 한다. 예를들어 Metro Manila에는 Makati City, Manila City, Paranaque City 등 열 몇 개의 City가 있다. 따라서 한국의 수도가 종로구가 아니고 서울시이듯, 필리핀의 수도는 Manila City가 아니라, Metro Manila라가 된다. 하지만 필리핀의 수도는 보통은 그냥 Manila라고 한다.
교통 수단은 1)지프니, 2)트라이시클, 3)시내버스, 4)택시, 5)합승택시, 그리고 6)3개 노선의 전철이 있다. 이상하게도 시내버스는 구경하기 힘들다. 시내버스를 제외한 모든 교통 수단을 이용해 보았다.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이 가장 흔하고, 버스와 합승 택시가 가끔 지나가며, 전철은 3개 노선이 있는데 대단히 붐빈다. 비싼 운송수단으로는 택시가 있다. 비싸봤자 한국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1) 지프를 개조해 만든 약 20명이 타는 지프니의 최소 요금은 8페소(약 200원) 정도이고, 보통 City와 City를 연결하기도 하고, 동일 City내에서 움직이기도 한다. 항상 뒤로 타고 뒤로 내린다. 나중에 타는 사람은 돈을 꺼내 앞 사람에게 전달하여 운전수까지 전달하고, 운전수는 거스름돈을 뒤로 전달, 전달하여 승객에게 전달한다. 지프니는 신물이 나도록 타봤다. 사실 두 번만 타면 신물이 난다. 매연에다가 소음, 열기가 사람 죽인다.
<사진설명: 바기오의 뒷 골목 시장에서 사람과 지프니가 공존하고 있다>
2) 트라이시클은 오토바이에다가 궤짝같은 칸에 바퀴를 부착한 것으로, 두 명이 타는 것이 보통이나, 놀랍게도 6명이 타기도 한다 (잘 아시겠지만 트라이시클이라는 말은 바퀴가 세 개인 자전거라는 뜻이다. 트라이=3, 시클=바퀴) 보통 동일 city내의 일정한 구역을 운행하며, 최소 17페소(약 400원)이고 거리에 따라 요금이 다르다. 대단히 편리하고 훌륭한 교통 수단이다.
<사진설명: 바나우에 있는 트라이시클이 순서대로 손님을 기다린다>
3) 시외버스는 많으나 시내버스는 거의 구경할 수 없어서, 타보지 못했다.
4) 합승택시는 택시 지붕 위에 metered taxi라고 써 있고 우리돈 약 500원부터 시작한다. 이 합승택시는 대체로 카니발처럼 생겼다. 정거장이 있으나 아무데나 손을 들면 세워준다. 의자에 6명, 뒤에 있는 짐칸을 개조하여 4명, 운전수 옆에 2명까지 태운다. 승객이 더 있으면 더 태울 것이다.
5) 우리나라의 택시와 똑 같은 마닐라 택시는, 우리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미터를 꺾고는 잘 가지 않으며, 얼마를 달라고 흥정한다. 집 주인으로부터 "택시를 탈때는 끝까지 미터기를 꺾으라고 요구하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리라"는 말을 들었으나, 실제로 그렇게는 잘 안되었다. 그래서 보통은 택시 기사가 달라는대로 요금을 주고 다녔다. 하지만 한국에 비하면 쌌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6) 전철은 노선이 다양하지 않아 3개 노선밖에 없다. 마닐라 교통에 큰 도움은 못주는 것 같다. 두 번을 타 보았으나 좌석이 좁아, 체격이 작은 필리핀 사람에게 알맞을 정도다. 등치가 큰 우리나라 사람이 타면 한쪽 다리는 서로 겹쳐서 타야할 것 같다. 이런 경우 여자가 옆에 있으면 환상적일 것이다. 항상 붐빈다. 바기오 가는 길에 아침에 지나가면서 봤는데 출퇴근 시간이라 전철 역을 들어가지도 못하고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마치 쇠고기 촛불집회 군중과 같았다.
마닐라에 사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잘 사는지라, 자가용을 타고 다닌다. 그래서 위의 교통수단 중 택시를 제외하고는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 했다. 모르면 몰라도, 위의 내용을 나만큼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내가 잘 못알고 있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나의 경험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다. 사실 이국에서 새로운 교통 수단을 이용해 본다는 것은 스릴과 서스펜스를 동반한다. 나도 그랬다.
<사진설명: 침대가 두 개인 내가 머물던 방-혼자 이용했다.>
화폐는 페소를 쓰며 약 40페소가 1000원이다. 지난 2월에 갔을 때, 50페소가 1000원이었으니까, 한국인의 입장으로는 많이 불리하게 되었다. 물가도 물품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것은 거의 한국과 비슷하게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신 인구가 많아서 임금은 저렴하다고 생각되었다. 보통 자가용 운전기사의 봉급이 우리돈 20-30만원, 가정부의 임금이 10만원 또는 그 이하다. 음식값은 보통 우리돈으로 1000-3000원정도 한다.
마닐라의 기후는 3, 4, 5월이 가장 더운 달로, 3개월 동안 방학이다. 6월부터는 우기라고 한다. 그러나 올해는 태풍이 와서 심하게 비가 온 것이 한 차례, 그리고 소나기 한 두 차례가 내가 겪은 우기의 전부였다. 우리나라의 마른 장마와 같다고 할 것이다. 10월부터 서늘해지기 시작하여 12월 - 1월이 아주 지내기 좋은 계절이라고 한다. 여기까지가 마닐라에 관한 일반적인 기초 상식이다.
<사진설명: 거실 겸 식당- 사진 속의 여자아이는 주인 아주머니를 "고모님"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내가 가지고 간 물건을 잠깐 소개하고자한다.
1. Sony 알파 700 DSLR 카메라와 16-80미리 칼짜이즈 렌즈, 및 100 미리 Sony 매크로 렌즈를 가져갔다. 예비로 소형 Sony compact 카메라와 Sony 소형 비디오카메라도 챙겼다. 이것을 합치면 무게가 약 2키로 정도 될 것이다. 모든 것을 sony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옛날부터 sony 제품을 이용하여왔기 때문이다.
2. 도시바 노트북을 가져갔다. 빈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사진을 저장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컴퓨터에 꽂기만 하면 나의 노트북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무선 랜 장치를 준비했다. 주인집 컴퓨터에 꽂아 내 방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휴대용 60기가 저장 장치도 준비했다. 장기간 여행시 노트북이 무거워 가져갈 수 없을 때, 휴대하기 위함이다. 이 정도면 수 만장 또는 수십만장의 사진을 저장할 수 있을 것이고, 아마 6개월은 사진을 찍어 저장할 수 있을 장비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찾아보려고 전자사전을 21만원주고 사서 가져갔다.
3. 등산복을 중심으로 긴바지와 반바지, 티셔츠 그리고 내의를 준비했다. 장기간 머무는지라, 혹시 오페라도 볼지 몰라 정장도 한 벌 준비했다. 슬리퍼와 막신는 구두를 가져갔다. 물론 , 선크림이나 로션을 빼 놓지 않았다. 또한 안경이 깨지면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 되는지라 안경 하나를 더 가져갔다. 비상약은 진통제와 소화제를 가져갔다. 그리고 공부를 한답시고 영어 소설 한 권과, 기초 일본어 회화책을 한 권 가져갔다.
4. 돈은 하숙비(60-70만원)를 포함하여 한 달 여행비로 200만원을 계산하여 달러와 페소로 준비했다. 왕복 항공료가 약 45만원이니까 전체 비용은 약 250만원으로 계산했다. 만약을 대비해, 현지에 있는 현금인출기에서 찾아쓸 수 있는 신한은행 직불카드를 준비해갔고, 신한은행 통장에 200만원을 한국에서 넣어 놓았다. 결국 왕복 항공료를 포함하여 한 달 총 여행비로 최소 200만원에서 최대 450만원을 잡았다. 만약 이 범위를 벗어나면, 현지에서 노가다 일을 해서 벌어 쓰든지, 영구 불법 체류를 하기로 했다.
<사진설명: 한 달간 근거지로 정한 집- 빠라냐케 시티의 BF Homes 지역에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6시였다. 간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밤 12시 반에 공항에 도착하여 집에 도착하니 1시반이었다. 한대지방에서 갑자기 열대지방으로 온 기분이었다. 에어콘이 있었으나 구식에다가 소리가 심해서 작동시키기가 겁이 났다. 밤새도록 선풍기를 틀어놓고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올리가 없다. 더구나 선풍기에서는 더운 바람이 나왔다. 마치 한국의 자장면집 주방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같았다.
밤새도록 개는 왜 그리 짖어대는지 모르겠다. 개 짖는 소리에 잠이 들기도 어려웠고, 혹시 잠이라도 들면 여지없이 개짖는 소리에 또 깼다. 나중에 알고보니 옆집에 개 두 마리, 뒷집에 개 두 마리가 있었다. 옆집 개는 포인터 종류로 좁은 철망 속에서 이리 날뛰고 저리 날 뛰었다. 뒷집 개는 똥개로 하늘을 보고 그냥 짖어댔다. 이방인의 냄새가 그 개의 코에 자극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개들은 한달 내내, 24시간 동안 짖어댔다. 하루 종일 짖어도 개는 목이 쉬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게되었다. 개의 성대(聲帶)를 연구하면, 인간의 목이 쉬지 않게 하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어디에선지 모르지만 닭도 울어댔다. 필리핀에 싸움닭이 많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어떤 닭이 그렇게 울어대는지 알 수 없지만,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이닭 저닭, 온갖 잡닭이 새벽만 되면 울어재꼈다. 그 순간, 정월 초에 연날리기를 하는데, 연이 여기저기 올라가니, 어떤 왕이 "여기, 저기, 온갖 잡년들이 다 올라가네."라고 말했다는 농담이 떠 올랐다. 연이 두 개가 공중에 올라가니 "저런, 쌍년도 올라가네." 라고 했다던가?
하여튼, 한 달을 지낼 일을 생각하니, 내 인생이 한심했다. 대낮인데도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저런 씁쓸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어디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Sir, eating."이라는 말이 들렸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니 키가 작은 도우미였다. 식모를 이 글에서 나는 도우미라고 부르겠다.
<사진설명: 집 앞의 거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대리석 바닥의 넓은 거실에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식탁이 있었고, 식탁에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치가 일품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주인집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식당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도 음식 솜씨가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 반찬을 만들어 팔기도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보통 사람이 이렇게 음식을 정갈하게 할 수는 없을거야. 아마 첫날이니까 이렇지, 며칠이 지나도 이렇게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최고의 음식을 대접받고 왔다. 배불리 먹으면 온갖 걱정이 눈녹듯이 사라지는가? 지난 밤의 닭이고, 개고, 모기고, 모두 잊고, 먹을 수 있는 양보다 조금 더 먹었다.
날이 얼마나 더운지 시험삼아 밖으로 나가봤다. 1분을 밖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려고 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내가 열대 지방의 여름을 너무 얏잡아 보았었나보다. 하루 종일 집에서 죽쳤다. 기왕에 돈 주고 왔으니 하루라도 더 뭘 봐야겠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들었다. 날이 덥기도 하지만, 한 달이라는 기간이 나에게는 "영원(永遠)"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희망보다 걱정이 앞섰다.
이 집에는 운전수가 한 명, 여자 도우미가 네 명이 있었다. 운전수는 우리가 자주 볼 수 없지만, 도우미는 항상 우리 주위에 맴돌았다. 이들의 생활, 주인과의 관계가 궁금했다. 도우미는 주인 아저씨와 나에게는 항상 말끝마다, "Sir"라는 말을 사용했고, 아주머니에게는 항상 "Ma'am("맘"이라고 발음했다)"이라는 존칭 호칭을 사용했다. 필리핀에는 대학에 "가정부 학과"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서 배운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주인을 글자 그대로 "종이 상전 모시듯"했다.
<사진설명: 집앞 거리-아기 두 명은 집 주인의 친척. 여자 두 명은 도우미. 흰 옷입은 초등학생은 집주인 아들, 그 옆에는 아들의 친구, 앉아 있는 사람은 운전수>
주인 아저씨는 도우미의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부엌에서, 거실에서 항상 도우미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영어와 따가로그를 사용하여 그들과 의사소통을 했고, 여의치 않으면, 또는 혼낼 때는, 영어, 따가로그를 쓰다가, 급기야는 한국말을 본인도 모르게 사용하는 것 같았다. 한국 돈과, 딸라, 그리고 페소가 혼용되듯, 따가로그와 영어와 한국말이 뒤범벅되어 지금 하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이해가 됐다. 아주머니가 아무리 혼내도 그들은 그냥 "하하하"하면서 웃기만 했다. 그러고보니, 현직에 있을 때, 내가 학생들에게 화를 내면, 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도우미 중에는 30이 넘은 여자도 있었지만, 20살이 안 넘은 여자도 있었다. 특히 온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19살 정도의 조날린이라는 귀여운 아이가 있었다. 키가 크고, 눈이 둥그랗고, 머리를 뒤로 묶은 날씬한 아이였는데, 근사한 옷을 입히면 모델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빨래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듯이 보였는데, 어느 날 다림질을 하고 있을 때, "You are very beautiful, Jonalyn." 이라고 했더니, 수줍어 고개도 못들고, "Thank you."라고 말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마 내 나이 20이었다면, 조날린의 손을 잡고, "I love you, Will you marry me?"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Jane이라는 아이는 시커먼 얼굴에, 헐렁한 옷을 주로 입었다. 황소 눈처럼 보였고, 청소 담당이다. 비로 대강대강 쓸은 뒤에 항상 발로 걸레질을 했다. 필리핀에서는 걸레를 항상 발로 끌고 다니는 지는 모르겠으나, Jane은 한 달 내내 발로 걸레를 끌면서 청소했다. 그녀는 손에 물하나 묻히지 않고, 걸레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봉급받고 살았다. 귀신 잡는 해병처럼, 도우미의 잘못을 여지없지 질타하는 아주머니는, 발로 청소하는 것만큼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신기한 일이다!
부엌 옆에 조그만 방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음식을 따로 요리해서 먹었다. 젊은 여자들이 모여서인지 그 방에서는 웃음과 노래 소리가 끝일 줄을 몰랐다. 어떤 날은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같으면, 이 좋은 세상에 식모살이나 하고 있다고 자조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련만, 그들은 항상 행복해 보였다. 매일매일, 순간순간이 행복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Sir, we are always happy whatever we do."라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진 설명: 어느 날 아침 밥상- 이 사진에서는 단촐하게 나왔다!>
저녁에는 우리를 환영하는 파티가 열렸다. 세부에서 소주를 1만원에 사 먹었는데, 마닐라에서는 수퍼마켓에서 2000원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 보쌈에 소주라. 너 본지 오래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 나왔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보쌈이다. 사실 우리 집사람도 이런저런 재료를 넣어 돼지 고기는 맛있게 삶아서, 항상 나에게 칭찬을 받는다 (솔직히 말하면, 음식을 잘하건 잘못하건, 나는 항상 맛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면 마누라는 정말 그런줄 안다.) 그런데 무슨 한약재를 넣어서 만들었다고 하는 이 보쌈은 겉이 약간 노릇노릇하고 안쪽에 약간 기름기가 흘렀다. 먹기도 전에 침이 한 사발은 목으로 넘어간다.
한국과 필리핀의 묘한 분위기가 반반씩 섞이면서,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했다. 점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고, 샹들리에 불빛이 봄바람에 연분홍치마 휘날리듯 흔들거렸다. 경직된 한국인들의 얼굴이 펴지기 시작하고, 목청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난 지 몇 십년이 된 것처럼 이제 한국에 대한 생각은 추억으로만 아롱거렸다.
모두 잊어라. 과거도, 미련도, 한국도, 더위도, 그리고 나 자신도, 모두 잊어라. 끈끈한 전우애는 아니나, 우리는 피같은 술을 나눈 의형제가 되었다. 단 하룻만에 반 필리피노, 반 꼬리아노가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이 외쳤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이런 기분 가질 수가 없는게야, 부라보!" "아름다운 마닐라의 밤을 위하여, 부라보!" 소리가 얼마나 큰지, 말한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놀랬다. 서로 바라보는 눈과 눈, 그리고 서로 부딪치는 유리 잔에서 불꽃이 튀었다.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을까? 옆집 개, 뒷집 개 네 마리가, 세상에 종말이 온 듯, 또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너희들도 밥값을 해야지." 술기운에, 개에 대한 지난 밤의 증오(憎惡)가 자비(慈悲)로 바뀐다. 나는 자비가 다시 증오로 바뀌기 전에, 이 층 내방으로 올라왔다. 반쯤 담은 보릿자루 비칠비칠 너머지듯, 나는 이내 침대에 고꾸라졌다.
필리핀에서의 첫 날은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반전하며, 한치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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