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 제 9부(최종회)
"마닐라로 돌아오다"
1. 바나우이-본톡-사가다
본래 의도했던 바타드, 뿔라, 꾸바드를 한 바퀴 돌면서 계단식 논을 촬영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마닐라로 돌아가는 대신, 본톡을 경유하여 싸가다에서 1박하고, 다시 바기오로 가기로 했다. 싸가다의 동굴과 절벽에 걸려있는 관(haninging coffin)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조용한 곳에서 서늘하게 하루를 보내는 즐거움을 갖기 위해서다.
8시 반에 본톡행 출발 예정인 지프니는 시간이 되어도 출발하지 않았다. 9시가 되었는데, 지프니에는 나를 포함하여 세 명만 타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신문만 보던 운전수는, 최소 열 명이 되어야 출발하는데, 세 명뿐이 안 되니, 세 사람이 10명의 요금을 내라고 했다. 한 사람당 본래 150페소이니, 10명이면 총 1500 페소가 되고, 이를 3으로 나누면 일인당 500페소가 된다. 나는 좀 깎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나머지 두 사람이 500페소씩 내고 가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 두 사람은 약 20-25세 정도 되는 커플로 대학생으로 보였다. 젊은 사람이 그러겠다고 하는 것을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쪽팔리게 깎자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맹랑한 입장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도 그러겠다고 했다. 우리 돈으로 치면 약 4000원에 갈 수 있는 것을 12500원정도 내는 셈이다. 필리핀의 물가를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한 차이다.
<본톡으로 가는 지프니: 운전수가 떠날 생각을 안 한다.>
운전수는 웬 횡재를 만난냐는 듯이 휘파람을 불더니 지프니를 몰았다. 지프니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비 포장도로 진입했다. 차는 꾸불텅대는 길을 돌고 돌아 계속 올라갔다. 이런 비포장 좁은 도로를 차는 약 한 시간 정도 달린 후, 바나우이와 본톡을 경계짓는 산의 정상에서 잠시 멈췄다. 허름한 가게와 간단한 음식점이 중간에 있었다. 거기서부터 또 계단식 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600분의 1초로 맞추어 몇 장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1000분의 1초 정도는 되어야 괜찮은 사진이 나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흐릿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가는 도중 어디서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무시했으나 자꾸 소리가 나서 대낮에 무슨 귀신이 나왔나 했다. 잠시 뒤에 잠겨진 뒷문 밖에 위험스럽게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문을 열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빨리 문을 열고 노인을 도와 안으로 타게 했다. 노인은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했다. 돈을 조금 아끼려고, 중간에 잠깐 쉰 틈을 이용하여 목숨을 걸고 지프니 뒤에 몰래 매달려 왔던 것이다.
<본톡으로 가는 길: 구르면 뼈도 못추린다. 500미터 아래로 떨어진다.>
<나와 같이 간 젊은이. 나를 쪽팔리게 만든이들.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다.>
<본톡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계단식 논과 마을: 차를 타고 가면서 찍었다.>
약 40키로 떨어진 본톡에 도착한 것은 바나우이를 떠난 후 약 2시간 되어서다. 안내 책자에는 본톡이 교통의 중심지이며 특별히 볼 만한 것은 박물관과 계단식 논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이미 계단식 논은 많이 보았기에, 박물관이나 보기로 했다. 박물관을 물어 가는 길에 보라색 꽃이 높은 나무에 피어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나무 저 너머로 빨간 지붕의 건물이 주변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튀어 보였다.
10분 정도 걸어가니 박물관이 나왔다. 박물관에는 그 곳 선조들이 대대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설명하는 그림 자료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 이외에는 관람객이 하나도 없었다. 관리자인 젊은 여자는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안달이 난 듯이 보였다. 짐을 받아주고, May I help you?를 수 십 번은 말했다. 그러나 별로 인상적인 것이 없어서 15분 뒤에 박물관에서 나왔다.
<본톡에서 본 인상적인 건물: 태양이 이글거렸다>
<본톡 야외 박물관. 초가집 안에 있다. 실내 박물관은 촬영금지 구역이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밖에 나오니 살인적인 더위다. 날이 얼마나 더운지, 당장 내가 살아갈 일 즉, "먹고, 마시고, 몸을 식히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와서 중심가로 내려와 사람들이 모여있는 큰 나무 밑에 앉았다. 잠시 뒤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 도울 일이 없냐고 묻기 시작하더니,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적당히 대답을 하고, 그가 좋은 식당이라고 일러준 곳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나를 모두 쳐다보았다.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한 젊은이가 나에게 오더니 한국에서 왔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한국 사람에게서 한국말을 배웠는데, 연습해도 좋은지 물었다. 그가 한국말이라고 하는데, 전혀 알아듣지를 못했다. 이빨빠진 할아버지 허우적대는 말 같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몇 번 긁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나도 알아듣기 힘든 경상도 말을 하는 사람이 와서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았나 싶다.
사가다로 가는 지프니를 타기 위해 물어 물어 정거장으로 왔다. 지프니에는 6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10분이 되어도, 20분이 되어도, 이 차는 출발할 생각을 안한다. 몇 시에 출발하냐고 물으니 20명이 모두 타야만 출발한다고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이 정원에 차지 않으니, 한 할머니가 한국인은 부자이니 나머지 인원 요금을 내가 내고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Sorry. I'm not so rich."라고 말하여 공손히 거절했다. 오늘 아침에 500페소 낸 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80분 정도 기다리니 사람들이 가득 차서 출발했다. 어떻게 보면 참 원시적인 운송 체계지만, 자원을 아낀다는 점에서는 괜찮은 제도라는 생각을 했다.
<본톡 시내 풍경. 옛날 금산 장을 연상시킨다.>
Bontoc에서 Sagada에 가까워지자, 지프니는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쏟아 가파른 길을 헉헉 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절벽을 지나 계속 위쪽으로 올라간다. 나는 뒤로 밀리지 않을까 겁이 났지만, 굉음과 연기를 내뿜으며 지프니는 기어갔다. 드디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높이 올라왔기 때문이리라.
Sagada에 도착하여 중심가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보니, 모두 텅텅 비어있었다. 주인도, 손님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는 듯, 한 참 뒤에 나타났다. 400페소(10000원)를 주고 방 하나를 빌렸다. 오늘 오후에 할 일을 대강 생각한 후 동굴과 관을 보러 밖으러 나갔다.
지도상으로 분명히 동굴이 있어야 할 곳에 동굴이 나타나지 않았다. 안내 표지판 하나 없었다. 그 뒤에 내가 느낀 것은, 안내 표지판을 잘 만들어 놓으면 안내 가이드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많은 가이드들은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일부러 표지판을 만들지 않아 가이드를 데려가도록 한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하여튼 동굴이라고 예측되는 지점을 골라 절벽 사이를 지나 내려갔다. 한 참을 내려가니 무시무시한 숲이 나타났다. 분명히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으나, 진흙 밭에 소 발자국만 최근의 발자국으로 보였다. 진흙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시냇물이 바위 밑에서 내려왔는데, 그 바위 밑으로 동굴이 나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돌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와 버려 다시 돌아 나오기도 맹랑했고 또 싫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풀을 헤치고 진흙에 미끄러져가며 산 정상에 올라가니 마침 작은 길이 보이고, 저 멀리 큰 길이 보였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결국 이러다가 제 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보인 동굴: 물이 흐르고 이 동굴을 따라 들어가면 다른 동굴로 나온다고 되어있다.>
큰 길로 나와, 다시 사가다 쪽으로 들어와, 관을 보러 나갔다. 교회가 있고 그 뒤쪽으로 무덤이 있었다. 무덤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무덤을 지나 한 참 가니, 필리핀 사람이 나타났다. "I saw some hanging coffins."라고 그가 말했다. "Are you a Phillippino?"라고 했더니, "No, I'm a Canadian Phillippino"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 필리핀을 떠나 카나다에 갔다가 고향이 그리워 다시 방문하는 중이라고 했다.
한참을 가니 계곡 저 너머 바위 절벽에 관이 보였다. 시체를 묻지 않고 절벽같은 곳에 관을 놓아 두는 것이 이 지방의 전통 장례법이었다. 마침 그 앞을 모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멀리 보였다. 내가 큰 소리로 가르쳐 주니, 그들이 직접 관 밑에서 사진 찍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쪽 바위 중간에 관이 보인다.>
.
<이야기에는 없지만, 다음날 아침 길을 따라 약 3키로 갔더니 나오는 마을: 구름이 인상적이다.>
<다른 곳에 관이 또 보인다.>
<길가에 정차한 본톡-사가다 통근 버스: 타이어를 보라.: 필리핀은 재미있는 나라다.>
<길을 가다가 옹기 장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마네킹인지 실제 사람인지 가서 눌러 보니 실제 사람이었다.>
저녁이 되어 대나무 까페(bamboo cafe)라고 되어 있는 곳에 갔다. 젊은이 두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손님이 없었다. 얼마 뒤에 가이드로 보이는 현지인이 나타나서 내일 어디어디를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내가 가이드와 함께 여행을 하도록 최선을 다해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나는 그 다음날 다른 코스로 여행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을 걷지 못한 것이 조금은 후회도 된다.
2. 사가다에서 바기오까지(할세마 하이웨이): 최고의 구경거리
다음 날 아침, 바기오로 가는 버스가 8시에 있었다. 반쯤 태운 고물 버스는 아니나 다를까 10분을 지나더니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더불어 펑크가 나고 말았다. 운전수는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고, 조수가 자동차 뒷 부부에 매달려있는 타이어를 꺼내 교체했다.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했다.>
지금부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할세마 하이웨이를 6 시간 달리는 것이다. 하이 웨이는 본래 간선도로 우리나라로 치면 국도 정도가 되겠으나, 여기는 글자 그대로 높은 지대에 있는 길이다. 우리 나라는 대체로 산의 아래 부분에 도로가 나 있지만, 이곳 하이웨이는 산의 거의 정상 부분에 도로가 나 있다. 그 아래에 마을이 있고, 그 아래에 계곡이 있다. 다시 말하면 산 정상에서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6 시간을 달린다. 도로가 나 있는 높이는 해발 1000미터에서 2200미터까지 나 있다고 하니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기오 북쪽으로 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길을 가면서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감상하기 바란다. 필수 추천 코스다. 아마 강원도에 이런 곳이 4키로만 있어도 대한민국 최고의 환상 드라이브 코스가 될 것이다. 이런 길을 6 시간을 달린다는 것,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한 참을 가니 조그만 마을에 차가 잠시 멈춘다. 물어보니 약 10분간 쉰다고 했다. 장사꾼들이 머리에 음식을 이고, 버스에 죽기살기로 달려든다. 나는 한 아가씨에게서 부코 주스와, 그리고 다른 아줌마에게서 옥수수를 사 먹었다. 7분쯤 지났을 때, 화장실에 들렀다. 그런데 1분 뒤에 나와보니 내가 타고 갈 차가 없었다. 저 앞에 50 미터쯤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스톱이라고 외치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렸다. 길이 나쁜지라, 차는 빨리 달리지 못하여 차를 따라 잡았다. 차를 퉁퉁 치니 차는 멈추었다. 사람들이 헐떡이며 들어가는 나에게 박수를 보냈다. 나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벌건 얼굴로 내 자리에 앉았다. "필리핀에서는 필리핀 식으로"를 다시 마음에 새겨두었다.
<아줌마 상인들이 죽기살기로 달려든다.>
<버스 밖 풍경. 멀리 꾸불텅 거리는 길과 마을이 보인다. >
<중간에 잠깐 멈춘 마을의 정육점. 소머리가 충격적이다.>
이 후로 차는 몇 개의 도시에서 멈추고, 잠시 쉬고 또 계속 갔다. 어떤 곳에서는 20분 정도를 쉬었고 사람들은 식사를 하기도 했다. 내 옆에는 사람들이 계속 바뀌어 타고 내렸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말을 걸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모른 척 했다. 창 밖에는 끊임없는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버스는 구름 위로도 가고 구름과 함께 가기도 한다. 고산 지대에 사는 새가 따라오기도 하고, 구름이 앞을 가려, 버스가 지렁이 기어가듯 가야되는 구간도 있다. 이것은 마치 태백 산맥을 두 배로 쌓아올리고 그 정상에 길을 만들어, 해발 2000 미터 도로로 속초에서 부산까지 가는 셈이리라. 나는 6시간 동안 조금도 잠을 자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창 밖 경치를 보면서 갔다.
바기오에 도착하자 비는 사정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1분을 걸으면 몸이 다 젖을 정도다. 3시쯤 되었다. 오늘 마닐라로 갈까 하다가, 더운 마닐라보다는 하루라도 시원한 바기오에서 묵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약 2만2000원정도하는 호텔로 들어갔다. 역시 다른 객실이 모두 비어있는데, 주인은 인상이 중국인인 듯 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는 서울에 와 본 적이 있다는 등 자랑을 많이 했다. 돈을 꺼내 주니 역시 잔돈이 없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간신히 거스름 돈을 건네 주었다.
나는 약속한 2박 3일이 되었는데도 갈 수 없어서, 핸드폰으로 마닐라 하숙집에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웬지 통화가 잘 되지 않고 신호가 가다가 끊어졌다. 나는 그 다음 날 갈 것이므로, 통화를 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마닐라에 있는 하숙집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눈을 들어보니, 나의 머리가 긴 것이 거울에 보였다. 이발이나 해보기로 했다. 호텔 맞은 편에 이발소가 있었다. 가보니 손님은 없고, 이발사만 여섯 명이 있었다. 이발사는 영어 책에 나온대로" How would you like your hair cut?"(어떻게 머리를 깎아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갑자기 어떻게 깎아라고 할지 생각이 안났다. 나는 머리 아랫 부분을 가리키며, "Cut around here" 라고 말했다. 그리고 머리의 윗 부분을 가리키며, "trim around here."라고 말했다. 그는 1960년대 식 긴 가위를 가져오더니 내 머리를 깎기 시작했다. 큰 가위에서 나오는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흥미로우면서도 향수를 자아냈다. 능숙하게 머리를 털어내던 이발사는 털어내고 끝내려 했다. "I want to wash my hair"라고 내가 말했더니,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설거지를 하지 않은 설거지 통에는 그릇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는데, 바로 그 옆에서 머리를 감으라고 했다. 수도 꼭지를 틀으니 물이 아주 조금씩 졸졸 나왔는데,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 물로 머리를 감으면서 비눗물이 옆에 있는 그릇에 튀어 들어갔다. 나는 대충 그릇까지 씻어 놓고 나왔다. 머리를 감고 나오니 모든 이발사가 감탄을 했다. 필리핀인처럼 머리를 털고 가는 것만 보다가 말끔히 씻고 나오니 신기하다는 생각이든 모양이다.
마지막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섭섭한 법. 나는 어디 좋은데서 술 한 잔 할 수 있을지 여기저기 기웃거려보았다. 사실 집에 있으면 나는 술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 나오면 술을 즐긴다. 한 곳을 가보았으나, 몇몇 그룹이 와서 자기들끼리 술을 먹고 떠들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 혼자 산미구엘 맥주 두 병 마시고 나왔다.
<바기오에는 기후가 서늘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채소가 다 있다. 양배추가 보인다.>
호텔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종업원은 여자 대학생을 소개해 줄테니 5만원을 내라고 했다. 그와 이야기를 더 해 보니, 그것은 섹스 파트너였다. 호기심도 있었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그래서 근처에 맛사지나 받을 곳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호텔에서 받건, 그곳에 가서 받건 금액은 약 2만원이라고 했다. 나는 호텔로 마사지사를 오라고 했다.
나는 맛사지사와 정말로 한 시간 동안 내내 이야기했다. 지금 30살인 그녀는 어떤 남자를 너무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신을 했다고 했다. 남자에게 자신의 임신 이야기를 하니 남자는 겁이 나서 도망갔다고 한다. 지금도 그 남자가 생각이 나지만,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뒤로 맛사지법을 배워서, 맛사지사로 활동해 오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자기 어머니에게 맡기고, 어머니에게 얼마간의 돈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대단히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맛사지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많은지 물었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이 거의 다 그렇다고 했다. 그녀는 한국의 배우도 많이 알고 있었고, 한국의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런 저런 말은 많이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이 그렇게 그 날은 끝났다.
3. 마닐라로 돌아오다.
다음 날 바기오에 있는 호텔을 나선 것은 아침 7시였다. 마닐라에 있는 하숙집에 도착한 것은 2시 반쯤 되었다. 하숙집 1층 거실을 들어가는데, 도우미들이 이상하게 나를 쳐다 보았다. "We were worried about you,"라고 한 도우미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왜 내 걱정을 하냐"하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조용했다. 모두 어디 놀러갔나라고 의문을 가지면서 방을 보니 L 형이 책상에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곽선생. 살아왔구먼. 곽선생 때문에 우리는 초죽음이 되었다구." L 형은 눈물을 글썽였다. 잠시 뒤에 하숙집 아주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오더니 맨 손으로 나를 마구 때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하숙집 아저씨도 명이 3년은 감소했다고 말했다.
내용을 들어보니 기구했다. 내가 바나우이에 가서 12시간 산 속으로 사진을 찍으러 간다고 했는데, 오기로 약속한 어제 밤까지 돌아오지 않으니 분명히 탈이 났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날 바기오에서 핸드폰 전화를 하다가 끊긴 것이 더욱 의문을 증폭시켰다. "분명히 곽선생은 포로로 잡혀있다. 이런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부로 연락을 하려다가 발각되어 핸드폰을 납치범들에게 빼앗긴 것이다."라고 추측을 했다. 내가 분명히 어딘가에 지금 잡혀있거나 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밤 12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아, 모두들 모여 회의를 했다고 한다.
<바기오 시내의 도처에 뿌려질 광고물에 나올뻔한 나의 사진: L형이 인화하여 나에게 준 사진을 내가 스캐너로 읽어들여 여기에 올린다. L형은 이 사진을 영원히 기념으로 가지라고 했다.>
우선 L 형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의 사진을 모두 빼서, 좋은 사진 하나를 확대하여 사람찾는 광고회사에 맡겨, 사방에 방을 붙이기로 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닐라에 있는 한인 회장에게 이런 사실을 이미 알렸다. 일단 다음 날 12시까지 기다려보고 12시가 넘으면 인쇄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L 형은 자신의 카메라에 찍어 빼내온 140 여장의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 아래에 보이는 사진이 광고물에 붙여질 사진이다.
L 형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한국의 나의 아내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텐데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그 난감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전화를 받고 한국에 있는 나의 아내와 아들은 얼마나 놀랄 것인가? 왜 그런 위험한 곳에 가도록 내버려두었는지 원망을 들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어떻게 나의 아내에게 얼굴을 들 것인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찾아본다 해도 결국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국에 돌아갈 것인가? 더구나 시체가 되어서 온다면 그 시체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 있을 일들이 영화처럼 펼쳐져 보였다고 했다. 이런 일이 있기 일보 전에 내가 돌아왔던 것이다. "곽선생, 살아와 주어서 너무 고마워." 내 손을 덥석 잡으며 L형은 또 눈물을 글썽였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즉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사람 찾는 광고물 인쇄를 중단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리고는 간밤에 걱정했던 일을 또 이야기 했다. 그리고 내가 잠그어 놓고 간 나의 트렁크를 부셔서 내가 갔을 법한 곳을 추론하려고 했던 이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여행 갔다 온 것 같은 생각이 나에게도 들었다. 사실 Sagada 같은 산에서 누가 와서 나를 찌르고 돈을 다 빼앗아 가면 쥐도 새도 모른다. 내가 사가다에 간다는 이야기도 없었으니, 아마 시체를 찾는데 일년이 걸릴 수도 있고, KBS 방송국에 나의 실종 사건 방송이 한 번 나온 이후로,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양주 한 병이 날아갔다. 양주 한 병이 대수냐? 죽었던 사람이 살아왔는데. L 형은 시내에 있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생선회집에 가서 생선회와 소주를 샀다. 사실 걱정을 끼친 것은 나여서 내가 한턱 쏘아야 하는데, 나는 단지 죽지 않고 살아온 이유로 왕 대접을 받았다. L 형은 "정말로 아름다운 마닐라의 밤을 위하여"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뒤의 기억은 별로 없지만, 노래방도 가고 그러다가 아마 집에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곽영을 실종 사건'은 2일 천하로 종결되었다.
*여행기에 빠졌던 여행들
1. 수빅만
수빅만은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곳인데,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키로 지점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덩개리 해수욕장이 인상적이었다. 동물원에 가서 사파리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리고 정말로 예쁜 어떤 여자가 있었다. 우리 세 사람 모두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필리핀 최고의 미인이라고 생각되는 여자가 모형 헬리콥터를 타고 있다.>
<사파리>
2. 빌라 에스쿠데로 여행
빌라 에스쿠데로는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약 80키로 지점에 있는 개인 소유 유료 유원지다. 박물관이 있어서 과거의 필리핀인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을 보고 밖으로 나오면 경치가 빼어난 길을 따라, 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간다. 마차 뒤에 앉아있는 사람이 기타를 치면서 한국 노래를 해 준다. 인공폭포 아래서 발을 담그고 점심을 먹는 것이 특징이며, 호수를 중심으로 그 일대의 경치가 일품이다.
<폭포로 가는 중에 우산을 들고 가는 여인들이 환상적이다.>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뷔페식 점심을 먹는다>
3. 팍상한과 88 온천.
팍상한은 마닐라에서 동남쪽으로 약 80키로 지점에 있는 곳이다. 배를 타고 올라가 폭포를 보고 내려온다. 팍상한과 마닐라 중간 지점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88 온천이 있다. 88온천과 팍상한을 묶어서 다녀왔다. 88온천은 넓은 대지에 야외 및 실내 온천이 있고, 노래방 음식점 호텔 등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꾸며져 있다. 전자신문 기자와 마닐라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는 분과 차에서 만나 다녀왔다.
<88온천 리조트. 팍상한 가는 길에 있다.>
<팍상한>
*필리핀에 가기 전 내가 나에게 한 질문의 답이다.
1. 은퇴 이민 장소로 필리핀은 어떤가?
나는 한국에서 간 이민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 직접 관찰하지는 못했다. 단지 현지 신문 잡지, 그리고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최근 들어 필리핀의 물가가 올라가고 환율이 좋지 않아 돈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0만원이면 황제처럼 살 수 있다는 말은 옛날 이야기라고 한다. 또한 필리핀인들은 온화하고 경쟁적이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기를 좋아하므로, 이런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힘든 생활을 할 것이다. 생활방식과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므로, 일단은 현지에 가서 약 6개월 정도 살아보고 결정할 일인 것 같다. 특히 위도 상, 마닐라 이남 지방에서는 날씨가 더워 살기 힘들고, 바기오 위쪽 부분이 살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평생 그곳에 뼈를 묻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달 간은 그 곳에서 살아 볼 예정이다.
2. 패키지 여행이 아닌, 개별 여행으로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오래 전에 약 한 달 간 유럽에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고생을 너무 많이 했었다. 계속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연세가 지긋한 사람이라면 더욱 힘들 것이다. 사실 젊은 사람도 힘들다. 이번처럼 근거지를 정해두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나는 배낭 여행의 참 맛을 조금은 느꼈으므로, 더 늙기 전에, 이와 유사한 여행을 시도해 볼 것이다. 앞으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패키지 여행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여행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패키지 여행은 관광으로, 배낭여행은 여행으로 보면 될 것이다. 편안하게 잘 먹고 잘 놀다 오려면 관광을, 고생을 하며 갖가지 경험을 쌓으려면 여행을 가면된다. 여행을 하려면 기본 영어회화는 가능해야 할 것이다. 은퇴 이민을 하여 필리핀에 간다해도 영어는 필수일 것이다. 당장 운전수와 도우미와 말이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면서, 편안하게 잘 먹고 산다는 것이 과연 인생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 이국적인 장면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을까?
좋은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오래 동안 한 군데서 머무르면서 시간대나 날씨 또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담아야 하는데, 단지 며칠만에 다녀온 것이어서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오지 못했다. 물론 나의 기대치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항상 사진을 찍으려는 준비된 자세, 그리고 두둑한 뱃장이 좋은 사진을 촬영하는 기본 자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4. 나의 체력이 한 달 간 또는 그 이상의 여행에 견뎌낼 수 있을까?
덥지만 않다면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헬스클럽에 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별 문제가 없었다. 단지 이런 배낭 여행은 65세 이전에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더운 날씨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닌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 그것도 그렇지만, 65세가 넘어서 내가 이런 호기심을 계속 갖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다.
5. 필리핀이 위험하다고 하는데 정말 위험한가?
이 문제도 객관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 필요한 문제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위험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위험한 곳도 있겠지만, 서양인들이 혼자 잘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물론 돌아다니다 보면 위험한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무 무서워하는 태도가 정말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6. 여행의 중요한 부분인 현지인들과의 접촉은 원만히 될 수 있는가?
현지인들과의 접촉은 대단히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이런 부분이 없었다면, 그리고 단지 경치나 보고 사진만 찍으려 했다면, 이번 여행은 너무나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에 대해 대단히 호기심이 많고, 기쁘게 도와주려는 태도를 보였다. 잘난체하지 않고, 거들먹 거리지 않으며, 그들을 존중하고, 함께 동등하게 살아갈 마음만 있다면, 현지인과의 접촉은 필리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앞으로 다시 필리핀에 간다면 이점에 더욱 중점을 둘 것이다.
7. 필리핀 어학 연수는 보낼만한가?
분명 필리핀 어학 연수를 하면 영어가 느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하루 종일 영어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면 누구나 영어를 하고, TV를 틀어도 대부분 영어 방송이다. 학원비도 한국에 비하면 싸고, 설령 개인 교사를 쓴다 하더라도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싸다. 그러나 하숙비도 내야하고 개인 용돈도 써야하니 이것저것 따지면 상당한 돈이 든다. 내가 머물던 집에서 한 달간 학생을 받아 가르치는데 200만원을 요구했다. 이것은 하숙비와 개인 교수비 그리고 학원비를 포함한다. 알라방이라는 곳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개인 교습소에 가 본 적이 있다. 거기에서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개인교습 조건으로 250만원을 요구했다. 민도로 섬에서 만난 카나다인도 250만원을 요구했었다. 또한 필리핀인에게 있어서, 영어는 제2 외국어일 뿐이다. 발음이 미국영어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한국말 배우러 부산에 와서 한국말 배우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발음을 중시하는 곳이어서 특히 아이들의 경우, 필리핀식 발음을 하면, 한국아이들로부터 "동남아"라는 별명이 붙을 줄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현직에 있을 때 어떤 아이가 이런 별명을 들은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필리핀은 학원비나 개인 과외비가 싸다. 따라서 설령 정통 미국식 발음이 아니어도 영어를 배워 당장 써 먹기를 원하는 성인은 필피핀에 가서 영어를 배워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나 또는 정통 영어를 배워 고급 영어를 사용하기 원하는 성인의 경우에는 좀 더 신중히 생각한 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끝)
'World'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콩 여행기 2(Hongkong 2) (0) | 2012.07.29 |
---|---|
홍콩 여행기 1(Hongkong 1) (0) | 2012.07.29 |
필리핀 여행기 8 "바나우이"(Philippines 8: Banaui) (0) | 2012.07.28 |
필리핀 여행기 7 "바나이우이 가는 길"(Philippines 7: To Banaui) (0) | 2012.07.28 |
필리핀 여행기 6 "보라카이"(Philippines 6: Borakay) (0) | 2012.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