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충남 여행기
* 2023년 4월 10일부터 4월 12일까지 3일간 대전, 완주, 논산, 공주, 예산, 안면도에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교통 수단은 자가용을 이용하였으며, 1인 여행이었습니다.
<대둔산>
2023년 4월 10일, 아주 오래 묵혀 둔 숙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대전을 향해 차를 몰았다. 코로나로 인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몇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친구를 만나야 했던 것이다.
친구가 입원해 있다는 대전의 J 병원에 도착하니, 주차장이 없었다. 병원 주위를 맴돌다가, “주차”라고 써 있는 간판을 보고, 별 생각없이 어떤 건물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그런데, 차를 몰고 들어간 곳에서 바로 주차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다시 좁은 자동차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가야만이 주차가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나는 이런 주차는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문이 열려있는 세개의 공간 중, 첫번째 구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건물 관리인이 나타났다. “여기에 들어가면 안되는디, 왜 들어왔슈? 여기는 경차가 들어가는 곳인디, 월레, 이거 큰일났네!” 느린 충청도 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천히 백미러를 보면서 뒤로 빠꾸해봐유. 잘못하면 자동차 양쪽 다 나가니깨 조심해서 나와유!”
조심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자동차가 뭔가에 스치는 느낌이 났다. 어쩔 수 없이 그냥 후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와보니, 자동차의 앞 범퍼가 손상을 입고 옆구리가 튀어나오고 긁혔다.
가슴이 철렁했다. 싯푸른 익모초를 마신 듯 입맛이 씁쓸했지만, 기왕에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었다. 소리 질렀던 아저씨는, “거기 들어가지 말라고 그렇게 큰 소리쳤는데, 왜 들어갔슈? 이거 큰일 났네.” 라고 말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괜찮아유.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유, 뭐.”라고 내가 말했지만, 이거 수리하려면 몇 십만 원은 들 거라는 생각과, 그 돈이면 소주가 몇 병인지 생각하니,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항상 왜 이리 병신 같은 짓만 하고 살지. 나는 뒈져도 싸지!”
병원에 도착하여, 면회 수속을 밟고, 2층 면회실로 들어갔다. 입원해 있던 친구가 이미 면회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게 너냐? 너 왜 이리 늙었냐? 내가 누구인지 알겠냐?”가 나의 질문이었다. 친구는 별말 없이 눈만 멀뚱멀뚱 뜨고서는 한 마디 내 뱉었다. “너구나! 영일이 아니냐?(어렸을 때 내 이름은 “영을”이 아닌, “영일”이었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한 말 전부였다.
그 뒤로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에 아주 간단히, “응, 아니” 중 한 가지로만 답했다. 그와의 짧은 대답 중에 벌려진 그의 입술 너머에, 그의 썩어 문드러진 이빨과 듬성듬성 이빨 빠진 빈 공간이, 마치 박쥐가 나오는 음침하고 습기찬 동굴의 어둠처럼 먹먹하게 내 가슴을 쳤다.
그렇게 아주 서먹서먹하게, 마치 이혼한 전 아내를 삼심년만에 만난 남편처럼, “다음에 또 올께”, 라는,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허공에 날리고, 나는 병원을 떴다.
바람 한점 없는 하늘은 흐리고 찌뿌듯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는, 내가 졸업한 대전고등학교와, 학교에 다닐 때 소풍으로 갔었던 대전 보문산 공원을 꼭 가보려 했었다. 그러나 친구의 처참한 상황을 보고서는 그런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고향인 금산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본래 지금도 금산에 사는 고향 친구와 저녁 식사나 함께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원에서 본 친구의 초췌하고 초라하고 수척한 모습이 생각나, 금산에 갈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에 대한 생각을 잊고자, 등산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산과 완주 사이에 놓인 대둔산으로 차를 몰았다.
대둔산에 도착하여 중턱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어떤 40대로 보이는 부부와 어린이 둘, 그리고 젊은이 몇 사람이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내가 걸을 수 있는 시간은 딱 1시간이었다. 다시 말하면 30분 올라가서 30분 내려올 시간만이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숙달된 조교처럼, 아니 조건 반사에 길들여진 동물처럼 가파르고 험한 등산길을 올랐다. 등산길 바닥은 대부분 돌로 되어 있었고 울퉁불퉁하여 걷기가 쉽지 않았다.
중간에 계곡을 연결하는 대형 철제 다리가 있었다. 또한 작은 바위로 오르는 작은 사다리가 몇 군데 있었다. 하여튼 이런 저런 바위를 올라가 보고 내려와 또 다시 위로 향했다.
그러다가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100여미터 눈앞에 두고 나는 뒤돌아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시간이 30분이 지났기 때문이다.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올라올 생각조차 않고, 출렁다리에서 알짱거리더니, 이내 발길을 뒤로 돌리는 모습이 멀리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도 내가 평소에 등산을 꾸준히 했기에 오늘 이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나름으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해는 서서히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까마귀가 까악까악 소리 내며 날고, 이름 모를 작은 새들이 자기집을 찾는지 자기 짝을 찾는지, 이리 저리 날았다.
석양에 비친 대둔산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면 병풍 같은 바위가 싯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도열을 하고 있었고, 그 앞으로 연초록 나무들이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며 뭉글뭉글 꿈틀대고 있었다. 초록 잎 사이로, 벚꽃이며 매화가 흰색과 분홍색으로 조화를 이루며, 공작새 꼬리처럼 자태를 봄내기도 하고, 수줍은 듯 얼굴을 드러냈다가 또 감추기도 했다.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친구와의 면회 장면에 대한 기억이 많이 해소된 것은 바로 대둔산 덕분이었다. 역시 산은, 수 많은 고민자들을 달래주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존재였다. 죽어가는 사람을 “산” 사람으로 만들어 주어서, 산이 산인지도 모르겠다.
대둔산에서 차를 몰아 논산으로 향했다. 탑정호 출렁다리가 볼만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탑정호 출렁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마지막 해가 나무 사이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다리에는 분홍빛 전등이 켜지고, 무심한 새 몇 마리가 하늘을 휘젓고 날아다녔다.
호수 주변을 훑어보니, 돈맛과 돈 냄새를 귀신처럼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멀쩡한 산과 논, 그리고 밭을 사들여, 불도저로 부수고 돌을 쌓아서, 호화로운 커피숍과 음식점을 지어 놓고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논산의 어떤 모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먹는 집이 횟집, 갈비집 등 두 사람 이상이 쌔려먹는 “호화” 식당이었고, 간단하게 혼자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찾기 힘들었다. 그리고 저녁이라 그런지 술집만이 붉은 등불을 내걸고, 그림자조차도 없는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찾다가 어떤 한식 식당에 들어갔다. 한 쪽에 노인 몇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자기들 친구로 생각되는 사람을 흉보고 욕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술 마시면서 아무나 닥치는대로 입에 올려놓고 욕하는 것이 취미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듯 하다.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혼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지 식당 아주머니에게 문의했다. 주인은 그냥 백반을 먹으라고 했다. 보통 손님이 둘 이상이면, 주문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다양하지만, 혼자서는 그냥 백반을 먹어야 하는 것이 나홀로 여행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백반을 먹고 있는데, 어떤 젊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제가 술을 한잔 꼭 먹어야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여기 돼지두루치기 2인분 이상이라고 써 있는 것, 1인분만 시켜 먹어도 될까요?”라고 말했다.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리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나도 안 되면 말고, 말이라도 해 봤으면, 그날 저녁을 소주 한 병에, 돼지 두루치기 한 접시, 기분 좋게 하루를 끝냈을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라는 그 말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그건 그렇고, 그 젊은이가 오늘 꼭 술을 먹어야할 일이 무엇일까? 나는 애인과 헤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잠시 추억에 잠겼다.
<둘째 날: 4월 11일 화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모텔 근처에서, “아침 식사 됩니다”라고 써 있는 어떤 식당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손님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후줄근한 식당에서 할머니 두 사람이 TV를 보고 있다가, 손님인 나를 보고 허둥지둥 몸 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그들은 나의 의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백반이지요?”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과 미역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이 나왔다. 나는 새로운 식사가 나오면 늘 그러하듯, 핸드폰으로 음식을 촬영했다. 한 할머니가 왜 촬영하는 지 물었다. 나는 아내에게 보내려고 촬영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면서, “아이구, 나는 음식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어서 신고하려고 촬영하나 싶었어유”라고 대답하며 하하 웃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식당 할머니와 나는 갑자기 친한 친구가 된 듯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때 마침 식당 TV에서 가수 임영웅이 기부를 많이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심심하기도 해서, 가수 황영웅을 아는지 식당 주인에게 물었다. 그들은 정색을 하면서, 자기들은 임영웅도 좋아하지만, 황영웅은 더욱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묻기도 전에, 황영웅이 폭력 전과가 있다고 하는데,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요, 젊었을 때 한두 번 폭력 안 쓴 놈이 어디 남자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말하면서 입가에 거품을 품고 침을 튀기면서 황영웅을 감싸고 돌았다. 이 대목에서 황영웅의 단점을 이야기 했다가는, 밥상으로 나의 면상을 후려칠 것 같았다. 나는 끽 소리 안 하고, 두 노인네의 행동을 좌우로 살피며, 숨을 죽이고 식사를 끝냈다.
공주 마곡사로 가다
논산을 떠나 공주 마곡사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가 되기 직전이었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재가 된 마곡사는, 오래 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주차장부터 근처 식당 그리고 마곡사로 가는 길이 많이 업그레이드 되었다고나 할까?
수 많은 자동차와 버스가 사찰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유치원 학생으로 보이는 수백명의 어린이들이 노란 버스에서 내리는 장면이었다. 스님과 선생님이 앞장을 서고, 중간 중간에 다른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보호하며 어디인가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들이 여기서 무엇을 할지, 과연 부처의 말 한 마디라도 이해가 될지 의아해 하며, 나는 가던 길을 재촉했다.
경내에 있는 몇 가지 걷는 코스 중, 나는 “백범 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백범이 한 때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했다.
대한민국 임지정부 주석으로 독립운동을 했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된 후, 현역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오래 전에 백범일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백범은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빼앗긴 것에 대한 분하고 원통한 것이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해서, 백범일지 중에는 백범이 일본인을 때려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어렸을 때, 무슨 일을 잘 못 하면, “저런 때려 죽일 놈”이라고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었는데, 사람을 때려 죽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는, 백범이 일본인을 때려 죽이는 장면을 보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백범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터질 것같은 느낌도 들고, 하여튼 멍멍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 오른다.
그러면 백범이 일본인을 때려죽이는 장면을 보자.
<아래, 백범일지에서 인용>
나는 때가 왔다 생각하고 서서히 일어나, “이놈!”하고 소리를 치면서 발길로 그 왜놈의 가슴 한복판을 걷어찼다.
“어이쿠!” 그는 비명을 지르며 거의 한 길이나 되는 계단 아래로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나는 잽싸게 쫓아 내려가 왜놈의 모가지를 밟았다. 그와 동시에 삼간 방문 네 짝이 일제히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나는 몰려나오는 무리를 향하여 소리쳤다. “누구나 이 왜놈을 위하여 감히 내게 범접하는 놈은 모조리 죽일 테니 그리 아시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내 발에 채이고 눌렸던 왜놈이 어느 틈에 몸을 빼쳐서 칼을 빼어들고 내게 덤볐다. 나는 내 앞으로 떨어지는 그의 칼날을 피하면서 발길로 그의 옆구리를 힘차게 걷어찼다.
“어흑!” 왜놈은 다시 거꾸러졌다. 그러자 나는 칼을 잡은 왜놈의 손목을 부러지라고 내리 밟았다. 그 순간 칼이 스르르 언 땅에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나는 그 칼을 들어 그 왜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난도질을 했다.
2월의 추운 새벽이라 빙판 위에 피가 샘솟듯 흘러 붉게 물들었다. 나는 손으로 그 피를 받아 마시고 또 왜놈의 피를 내 얼굴에 발랐다. 그런 다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까 왜놈을 위하여 내게 범접하려던 놈이 누구냐.” 하고 호령하였다.
<이상 백범일지에서 인용>
백범 길을 걸으며 백범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몇 번 젓고,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등산을 마치고 해탈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해탈이라! 굴레에서 벗어난다! 누가 굴레를 씌워준 것도 아닌데, 거기에서 벗어난다! 벗어나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인 이상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겹겹이 쌓인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 습관이 어떻게 버려질 수가 있겠는가? 만약 해탈을 한다면, 나를 죽이고 다시 나를 탄생시켜야 할 텐데,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70 중반이 되어 죽을 날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도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는 인터넷 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 얼마 남지 않은 세월, 살아온대로 살다가 가면 좋으련만! 쇠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인터넷에 나와 있는 글대로 살아보려고 해도, 나는 조금도 바뀌지 않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사찰 한 가운데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위에 수 많은 인공 연꽃이 바람에 이리 저리 움직이다가, 흩어지고, 흩어지다가 또 모여들었다.
그때 마침 비바람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연꽃의 방향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던 사람들이, 몸을 피할 장소를 훑어보더니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거기가 바로 여행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었다.
상점에서 허름한 비닐 우의를 2천원에 구입하였다. 그때 내 옆에 한 서양 노인과 상점 주인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듯 했다. 상점 주인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그 외국인과 통역원을 연결을 해 주었다. 전화에서 들려오는 통역원의 영어는 내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상점 주인에게, “제가 잠시 저 외국인과 이야기를 해볼까요?”라는 말했다. 그 노인과 이야기를 해본 즉, 그 노인은 체코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그는 1960년생인데, 자기 띠, 즉 쥐띠에 해당하는 기념품을 사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사는 기념품에 쥐가 그려져 있거나, 쥐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념품을 원했다. 나는 진열대에서 “rat”라는 글자가 새겨진 조그만 기념품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모래에서 금을 발견한 듯 “와우”하면서 기뻐했다.
쥐를 왜 “mouse”라고 표기하지 않았지”, 라는 의심이 들었다. 본래 쥐는 집 주위나 시궁창 주위에서 사는 동물이다. 이것이 rat이다. mouse는 같은 쥐라도, 좀 작고 귀엽운 느낌을 준다. 그래서 컴퓨터의 입력장치도 rat가 아니라 mouse이다.
나는 여기에서 두 가지에 대해 놀랐는데, 하나는 1960년생인 체코인이 왜 이렇게 늙었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보다 열 살이나 더 많은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과연 나를 몇 살로 볼까? 하여튼 인간은, 남의 단점은 귀신처럼 알아내고, 자기의 단점은 모두 장점으로 인식하는 괴상한 동물임에 틀림없다.
두번째 놀란 것은, 내가 그 노인과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상점 주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는 것이다. “너 같은 늙은이가 무슨 영어를 하겠다고”라고 생각했다가, 그럭저럭 통역사보다는 잘 하는 것을 보고, “고놈 그런대로 쓸만한디!”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 상점 종업원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이것도 묻고 저것도 묻고 상당한 호기심을 보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내가 전직 영어교사라는 것을, 그 종업원이 어떻게 알겠는가?
관음전이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큰 건물 마루에 아까 보았던 유치원 꼬마들의 가방과 신발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방에서는 사람 소리와 음악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떤 여자의 확신에 찬 강의 소리 뒤에, 어린이들의 “예” 소리가 문틈으로 힘차게 새어 나와 하늘을 관통하고 우주로 뻗어나가는 듯 크게 들렸다. 저 유치원 아이들이 부처님의 무슨 말씀을 이해하고 저렇게 큰 소리로 “예”를 연발할까? 나에게는 그 “예” 소리가 공주를 떠나서 “예산”으로 가라는 신의 계시처럼 들렸다. “공주에서 공주처럼 잘난 체 그만하고, 빨리 예산으로 가서 예산을 좀 아끼라!”
<예산으로 가다>
예산군과 백종원이 협의하여 조성했다는 예산 백종원 거리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딘가 봤더니, 몇 년 전, 코로나 이전에 예산에 사는 친구를 따라서 돼지국밥을 먹으러 왔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 당시 넓어 보였던 광장은 이제 주차장으로 변해 수 많은 자동차가 차지 하고 있었고, 광장 너머에 있던 건물이 바로 백종원씨가 계획한 시장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크고 칙칙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상점이 있으리라고 짐작했는데, 대부분이 텅빈 방으로 보였고, 통로에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가 백종원 식당이란 말인가?
좀더 안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 몇 사람이 땅바닥에 앉아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빈 상점 몇 개를 더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와! 실내 공연장으로 짐작되는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불판 위에는 삼겹살을 비롯하여 갖가지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고, 고기 옆에는 막걸리와 소주가 몇 병 씩 놓여 있었다.
아, 여기가 백종원이 설계한 핵심 지역이리라. 대부분의 고객은 젊은이들이었으며, 손님들의 표정과 행동으로 보아 그들이 먹는 음식은 입에 쩍쩍 들어 맞는 듯 보였다. 술이 몇 잔씩 들어간 듯 분위기는 들떠 있었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내가 별데를 다 와서, 별 사람들과, 별 것을 다 먹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도 거기에서 음식을 먹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참으로 신기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도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차를 몰아야 해서 미련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떴다.
밖에 나와서 몇 년 전에 와서 먹었던 짚으로 된 지붕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돼지국밥이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뿌연 국물에 나온 돼지 국밥! 나는 옆에 놓여진 새우젖통에서 새우젖을 반숫갈 넣고, 다대기를 한 숫갈 넣어서 얼큰하게 조절한 뒤, 밥을 사발째 국그릇에 부어서 푹푹 떠 먹었다. 혀에 척척 감기며 감미롭게 흐르는 구수한 돼지국밥의 맛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몽롱한 상태로, 땀을 펄펄 흘리며 순식간에 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웠다. 그래 이런 맛에 여행이라는 것을 하는 거지!
예산에서 국도를 거치고 또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나는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보령해저터널로 향했다. 보령 IC에서 나와 대천해수욕장을 향하다가 대천항으로 가는 길에 바로 터널 입구가 있었다.
해저터널 입구를 통과한다. 미술 시간에 배운 소실점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길고 긴 해저 터널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운전하다가, 액셀에서 발을 떼어 보았다. 자동차는 점점 가속을 하며 제한 속도를 넘기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 내가 통과하는 지점이 평평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자주 브레이크를 밟아서 제한 속도를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중간 지점을 통과하자 이번에는 계속 액셀을 밟아야, 원하는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터널 전체는 V자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후, 터널이 끝났고, 내차는 원산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원산도의 끝 무렵에 안면도의 영목항으로 가는 원산안면대교가 나타났다. 대교를 지나 영목항에 도착하였다.
영목항에 도착하여 차밖으로 나오니, 차고 습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내 시야에 보이는 것은 젊은 남녀 두 사람뿐이었고, 그들은 찬바람을 맞으며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 추위에 무슨 낚시? 낚시나 골프나 중국어 공부나, 뭐,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팔자가 되었고, 팔자대로 살다보니 습관이 되어서 빼도 박도 못 하고 사는 것이 이놈의 인간이다.
쓸쓸한 영목항을 떠나, 옛 추억을 더듬어, 바람아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바람아래 해수욕장은 전에 두번 갔었는데, 갔을 때마다, 사람이나 동물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 개 두 마리가 나타나서 멀리도 아니고 가까이도 아닌 곳에서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을 주시하다가 게임이 끝나지 않아, 내가 그 개들에게 다가 가니, 끝까지 버티던 개가 2미터 앞에서 뒷걸음질 치며 몇 발자국 물러섰다. “너희들 여기 심심할 걸. 나와 이야기해보자!” 개는 말하기를 “아자씨가 인간이라는 동물인가? 여기 왜 왔슈? 이 허허 벌판에!” 결국 내가 더 다가가자, 개는 슬금슬금 뒷걸음쳐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멀리 할미 바위가 마치 한 점처럼 작게 보인다. 도망간 말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할머니의 전설이 깃든 할머니 바위. 망원렌즈로 보니 할머니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머리에 해당하는 바위가 바람이 불면 물속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오똑하게 바위 위에 놓여져 있다. 마치 마술사가 돌 하나를 절벽에 세워놓은 느낌이다. 역시 자연의 교묘함은 인간을 능가하는 듯 하다.
어느 덧 밤이 되어 모텔을 잡아야 했다. 본래 꽃지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방포항에서 모텔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늦어서 그런지 방포항에 있는 모텔은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안면 시내로 가기로 하고 시내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훤하게 불이 켜진 몇 개의 모텔이 보였다. 숙박하기에 참 좋은 곳인데, 문제는 아무리 찾아도 저녁 식사를 할만한 곳이 없었다.
안면읍내로 들어가야 했다. 안면 시내에서 딱 한군데 불이 켜져있는 모텔이 있었는데, 한 마디로 구닥다리였다. 전에 “여관”이었을 곳이, 팻말만 “모텔”로 바꾼 것으로 보였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침대방은 이미 다 나갔고, 온돌방만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침대방을 원하면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하면서 앞장서서 걸어갔다. 따라가보니, 무슨 콘테이너 박스 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어둡고 습기차고 좁아서 숨이 막힐 듯 했다. 아이구, 온돌이라도 좋으니 2층을 달라하여 2층으로 갔다. 오래전, 그러니까 “장미 여관”의 이미지가 풍기는 방바닥이 누런 그런 온돌방이었다.
방바닥과 벽에서 담배 냄새가 찌들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담배를 피운 듯 했다. 조그만 TV하나에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는 냉수와 캔 커피 두 개 들어가면 가득 찰 정도로 작았다. 바닥에는 전기 장판 연결선이 길쭉하게 나와 있어서 이 방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듯 뽐냈다. 그 옆에 개여져 있는 요와 이불 그리고 베개가 대학 다닐 때 내가 썼던 것과 비슷했다. 이 상황에서 따지면 무엇하나?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나는 아주머니에게 4만원을 지불했다.
아주머니는, “요즘 여기에 큰 공사 일이 터졌어유.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막 들이닥쳐유. 방이란 방은 씨도 없어유. 아자씨도 운 좋은 줄 아슈. 조금 있으면 금방 꽉 차유!” “깅가밍가” 하면서, 아주머니의 말을 신뢰하기로 했다. 조금 늦게 오면 국물도 없겠구나!. “아줌마, 구라 좀 그만 치셔! ”라는 말이 입술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아마 밤 9시쯤 되었을 것이다. 밖에 나와서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술집 몇 곳만 있을 뿐 식당이 없었다. 몇 곳에서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만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어떤 치킨 집에 들어갔다. 젊은이 8명이 이미 곤드레 만드레가 된 상태에서 계속 맥주와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그러더니 그들의 음성이 점점 높아지고, 급기야 여기가 옛날 금산 장터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듯, 큰 소리와 웃음이 내 귀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 옆에 앉은 나에게 종업원이 메뉴를 가져왔다. 메뉴는 닭과 맥주 그리고 소주만 있었다. 나는 반반 치킨과 맥주 500미리를 시켰다.
치킨 너 본지 오래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나는 나도 모르게 싱글벙글하며, 맥주 한 모금에, 치킨 한 조각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먹을 수 있는 데까지 먹었다. 어는 덧 500미리 생맥주는 바닥나고, 치킨은 그래도 상당히 많이 남았다.
남은 음식을 포장하여 모텔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500미리 맥주로는 어림도 없었을 나의 주량이, 그날따라 그 정도면 된다고 판단되었다.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길가의 네온 사인이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 없는 이 발길” 흔들리는 가로등 사이로 내 노래가 아스팔트를 따라 흐르다가 이내 하늘로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모텔 앞이었다. “지금 모텔 방이 다 찼을까”, 그 생각이 퍼뜩 났다. 아줌마 구라친거 아냐? 모텔 현관문에 들어서니,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오늘 빈방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와! 충청도 아줌마가 거짓말은 안 하네. 나는 나의 방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빈방에 누워,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 없는 이 발길”을 몇번 반복했다. 그리고 나의 노래 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을 몽롱하게 느꼈다.
(3일 째: 안면도)
셋째 날 아침, 어제 치킨만 먹었기에, 아침은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식당에 들어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내가 너무 일찍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아주머니도 아니고 할머니도 아닌 대충 60대 여자 두 명이 한참 식사 준비에 바빴다.
나는 소머리 국밥을 시켰다. 어제 점심은 돼지 국밥, 오늘 아침은 소머리 국밥, 그러면 오늘 저녁은 장국밥이 되려나?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어딘가에서, 흰 액체가 들어 있는 비닐 봉지를 꺼내더니, 가위로 구멍을 내어 냄비에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것이 내가 먹을 소머리 국밥일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큰 솥에서 한 사발 푹 퍼주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상상이 순식간에 산산 조각이 났다.
잠시 후, 몇 가지 반찬과 함께 밥 한 공기, 그리고 팔팔 끓는 뽀얀 국물의 소머리 국밥이 내 앞에 차려졌다. 나는 밥을 반쯤 말아서 먹기 시작했다.
잠시 뒤, 내 옆에 어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뭐, 드릴까?”라고 방에 있는 아주머니가 물었다. “쇠주 한병!”이라고 그 손님은 나즈막하게 말했다. 부엌에 있던 아주머니가, 진로 소주 한 병을 건네 주면서, “안주는?”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응, 생 오이 썰어주면 돼”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 손님은 전에도 자주 아침부터 이곳에 와서 생 오이 안주에 소주를 마시는 듯 했다.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마시던 그 손님은 가끔 창밖을 보기도 하고 한 숨을 쉬기도 했다. 잠시 후 그는 내 옆에 있는 부탄가스가 장착된 후라이팬으로 갔다. 어디서 달걀 하나를 꺼내더니 자기가 알아서 후라이 해서 접시에 담아갔다.
부엌 아주머니가 나에게 와서, 부탄가스 후라이팬을 가리켰다. “우리 집은 알은 셀푸!” 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말을 하던 부엌 아주머니의 노란 금 이빨 몇 개가, 아침 햇살에 반사하여 내 눈이 부셨다. 잠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그렇게 매일 아침마다 술만 먹으면 몸 상한다고. 그러지 말라고.”라고 소리쳤다. 손님은 아무 말이 없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또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초췌한 모습의 그 손님이 아침부터 생 오이 안주에 소주 한 병 까는 삶은 어떨지 잠시 생각하면서 나는 그 식당에서 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살고 싶은 대로 산다고 할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대로 살아가는 듯 하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 방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간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지금 살고 있는 방식이 자기에게 주어져 있기에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가 선택한 것이든, 주어진 것이든, 우리는 어쩌다가 어떤 인간이 되었고, 거기에 맞다고 여겨지는 그런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이론적으로는 수 많은 선택지 중에서 자기가 골랐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몇 개 안 되는 선택지 중에서, 그래도 자기에게 적절하리라고 생각되는 또는 어쩔 수 없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결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내 나이와 비슷한 여자가 수 만명이 있었을 것이다. “수 만명 중에서 자유롭게 나에게 맞는 한 여자를 택했다”, 라고 자신을 위로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극소수의 사람 중에, 또는 어떤 중매쟁이가 소개한 몇 명의 결혼대상 중에서 한 사람을 배우자로 택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선택된 그 여자와 평생을 같이 산다. 그리도 또, 그 여자 한 사람을 보고, “세상 여자들은 다, 이러이러하다”라고 섣불리 판단하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이다”, 라고 스스로 만족하며, 또 불평하며, 평생을 그렇게 살다 간다.
내가 서 있는 바닷가에서 약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갈매기 한 마리가 돌인지 조개인지를 물었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떨어진 것을 또 물었다가 떨어뜨렸다. 부리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 촬영 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 결과가 여기 보이는 두 장의 사진이다. 그건 그렇고, 왜 저 놈은 끊임없이 물었다가 떨어뜨리고, 또 입에 물고 또 떨어 뜨릴까?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왜 그런 장면을 촬영하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할까? 그놈이나 나나 둘 중 하나는 이상한 놈인 것은 분명한 모양이다. 본래 세상은 90%의 쓸데 없는 일과, 10%의 쓸데 있는 일로 구성이 되어 있으니 어쩌겠는가? 지금 내가 쓰는 이글도 쓸데 없는 일이다. 괜히 사람들의 시간만 빼앗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2023년 4월 12일) 아침 9시가 바로 안면도 튜립전시회 시작하는 날이다. 나는 기왕에 일찍 전시회장 입구에 왔으니, 맨 처음 입장자가 되고 싶었다. 9시부터 판매하는 입장표 대신, 그 옆에 있는 자동 판매기에서 입장표를 구입하여 들어가는 줄의 맨 앞에 턱 버티고 서 있었다. 9시에 입장하는데, 8시부터 줄을 서서 있었던 것이다.
막 9시가 되자 출입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뚜벅뚜벅 보무도 당당하게, 마치 내 군대시절 의장병이 걷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입구로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바람처럼 나타나 내 앞에 휘이익~ 소리를 내면서 먼저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맨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마치, 여러 동물들에게 달리기를 시켰는데, 소가 맨 처음 들어올 순간에, 소 머리 위에 앉아있던 쥐가 폴짝 뛰어서 결승선에 도착했다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의 이야기를 방불케 했다. “빌어먹을, 나는 소고, 저것들은 쥐네! 쥐새끼 같은 놈들!”
넓디 넓은 전시장에는 갖가지 형태의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런 아름다운 색과 모양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여! 정훈희의 “꽃밭에서”, 라는 노래 가사가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꽃으로 무늬를 만들기도 하고, 꽃으로 형체를 만들기도 하고, 꽃으로 상상 속의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기도 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의 지휘하에 하나의 교향악이 연주되듯, 넓은 전시장은 알맞은 곳에 알맞은 꽃이 알맞게 장식되어 관람자의 시선을 끌었다.
사실 전시장의 모습이나 거기에 있는 꽃을 묘사한다는 것은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직접 한번 가 보시라, 라는 말 이외에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 가지 좀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구경꾼이 핸드폰으로 사진 촬영을 하는데, 나 하고 어떤 한 사람만이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촬영을 했다. 핸드폰 촬영자들은, 그들의 핸드폰을 나에게 건너면서, “작가님, 저좀 잘좀 찍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소위 전문 사진사라고 하더라도, 나중에 집에 가서 컴퓨터로 사진을 봤을 때, 잘 나왔다, 잘 못 나왔다,를 판단하는 것이지, 현장에서는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사진을 촬영할 때 몇 개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화면 3등분이라든지, 햇빛의 방향, 구도, 카메라의 심도, F 값, 셔터 시간, ISO 값 등이 있지만, 결국은 찍은 사진을 나중에 컴퓨터로 확대해서 보아야만이 잘 찍었다, 못 찍었다,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전문가가 무엇인가? 부동산 전문가가 “아파트 값이 계속 오른다”고 말했는데, 반대로 떨어지고 있다. 입시전문가가 “어느 대학 어떤 과의 커트라인이 얼마다” 라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주식전문가가 삼성 전자 주식이 오른다, 라고 했는데 떨어진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 우리 인생사에 흔히 있는 일이다. 전문가를 무시하지는 말되,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전시장에서 손님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가 있었다. “제가 찍는 사진은 작품 사진이요, 예술 사진입니다. 일반사진이 아닙니다” 라고 외쳐대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사진사가 외쳐대는 사진이 정말 예술 사진이 될 수도 있고, 잘 해봤자 이발소에 걸어둘 사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말에 사람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이것은 전문가가 그렇다고 했으니, 그렇다”라고 판단하게 된다.
로버트 치알디니 교수의 “설득의 심리학”이라는 책에 보면, 다른 사람을 설득할 때 사용하는 여섯 개의 법칙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권위의 법칙이다. “권위의 법칙: 인간은 전문가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여러분도 어떤 말을 할 때,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이거 말이야, 미국 하버드 대학 ‘날나리대머리개구리’ 교수가 말한 거야. 틀림없이 맞아”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하고 넘어갈 것이다.
천리포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은 1945년 미국 정보 장교로 입국한 Carl Ferris Miller가 설립한 수목원이라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그는 1979년 민병갈이라는 한국명으로 한국에 귀화했다. 그는 1921년에 태어나서 2002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이름에 “갈”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 특이한데, 나는 여태까지 자기 이름에 “갈”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름에 “얀”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사람도 있다. 여자 배구 선수 중에 “전세얀”이라는 사람이 있다. 참고로 한자 중에 갈이라는 글자는 많아도(예를 들어, 葛<칙 갈>, 渴<목마를 갈>), “얀”이라는 한자는 없다.
천리포 수목원은 천리포 해안을 끼고 돌면서 조성되어 있는 수목원이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호수가 있고 호수를 둘러싸면서 또 해안선을 따라서 넓은 대지 위에 갖가지 나무와 꽃이 자라고 있다.
호수 뒤쪽에 노란 집 두 채가 있는데, 사무실 및 전시실로 사용되는 듯 했다. 노란 두 집이 그 앞에 있는 호수에 비치는 모습이 압권이다. 또한 갖가지 나무가 호수에 비쳐보이는 모습이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데, 계절에 따라 풍경이 바뀔 때마다, 물속에 비춰진 모습이 환상적인 느낌을 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건성건성 보아서인지, 천리포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발견하지 못였다. 아직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어서, 4월 중순 이후나 5월이 되어야 비로소 볼 만한 꽃이 더 있을 지도 모르겠다.
천리포 수목원을 나오면서 특히 눈에 띄는 그림이 하나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이다. 사진에는 5월(May)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흰 강아지가 앉아서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바라보고 있다.
짧지만 긴, 2박 3일 여행의 종착점에 왔다. 4월이라 그런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는 춥다. 피천득 선생님의 말대로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인 5월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다시 “불현듯 밤차를 타고” 어딘가를 갈 것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피천득 “오월” 인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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