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화재 발생일: 2023년 4월 11일
현장 방문 일: 2023년 4월 24일
강릉에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초속 30m의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이것을 시속으로 계산해보면 30m Ⅹ 3600초 = 108,000m, 즉 시속 108km의 속도의 바람이 분 것이다. 고속도로 달릴 때, 보통 시속 100km이니까, 그 위력은 감히 상상을 초월한다.
처음 찾아간 곳은 경포호수 바로 옆에 있는 경포대였다. 뉴스로 듣기에는 경포대가 간신히 화마를 피했다고 했다. 현장에 가보니, 과연 경포대 건물 바로 앞 약 20미터 공간 덕분에 경포대 건물은 재난을 피했다. 이 공간이 없었던들 수백년 대대로 내려온 경포대는 지금 내 눈 앞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주위의 빈 공간은 항상 필요한 듯 하다.
경포대 뒤쪽으로 가면 곧 소나무 군락지로 연결된다. 대부분의 소나무가 시커멓게 불에 타서 마치 지옥으로 들어가는 듯한 음산한 기운이 온몸에 감겨왔다. 거의 모든 소나무들은 회생이 불가능할 것이다. 모두 베어내고 다시 심는 도리밖에 없어 보였다. 좀 더 들어가 보려고 하였으나, “현지 주민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발걸음을 되돌렸다.
불에 탄 소나무 군락지에서 돌아오면서 약 15미터 아래 쪽에 두 사람이 찬 바람을 맞으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얇은 돗자리를 깔고 얼굴을 반쯤 내놓고 웅크리며 자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이번 화재를 당한 사람들이라고 직감했다. 그들에게 말을 걸거나 카메라를 들이댈 엄두가 나지 않아 먼 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비극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하는 운명 같은 것인가?
경포대를 나와서 차를 타고 해변을 향해 간다. 오른쪽으로 경포 호수가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 듬성듬성 건물이 보인다. 건물들은 다행히 불을 피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건물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의 소나무는 듬성듬성 갈색으로 변한 것으로 보아, 부분적으로 화마를 당한 것으로 보였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려고 하였으나, 이재민들에게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멀리서 훑어보고, 계속 해변 쪽으로 갔다. 빨간 불이 지붕에서 뱅뱅 도는 경찰차가 곳곳에 주차되어 있었고, 시설물 복구 용품으로 보이는 물건을 싣고 달리는 트럭이 어딘가로 분주히 달리고 있었다.
경포대 해수욕장에 왔다. 경포대 해수욕장 길을 따라서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데, 여기에 있는 소나무도 부분적으로 화상을 입었다. 여기 소나무에 불이 붙으려면, 산에서 내려오는 불길이 큰 길을 건너야 하는데, 바람이 워낙 세어서, 10m 정도의 아스팔트 길은 쉽게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동해안을 따라서 북쪽으로 차를 몰고 간다. 왼쪽으로 듬성듬성 화마의 흔적이 보인다. 화를 당한 건물은 대부분 커피숍이나 모텔로 보였다. 아마 서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건물 뒤쪽을 보면 훨씬 더 심각한 화재 장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도 외부인은 출입하지 말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사근진 해변에 왔다. 해변과 맞닿아 있는 건물들 대부분은 민박집이나 서민들의 집이다. 여기도 역시 강풍 속의 불길을 피할 수가 없었나 보다. 시멘트나 철근을 제외하고, 탈 만한 것은 모두 시야에서 사라진 처참한 장면이었다.
사근진 해변과 순긋 해변이 화마를 입었느냐, 입지 않았느냐의 경계선으로 보였다. 즉 사근진은 당했고, 순긋은 멀쩡했다. 사근진은 "삭았고", “순긋”은 정말 글자 그대로 “pure good”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큰 재난이나 사고가 났을 때, 어른들이 울면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죽은 사람은 죽더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제!” 불타서 폐허로 된 집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민박집이 있었다. 마당에는 눅눅한 이불이 빨래줄에 걸려 있었다. “주말에 손님을 받아야 목구멍에 풀칠을 하제”, 물어보나 마나 주인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 옆에 걸려진 빨래줄에서는 바람에 날려 없어지고 남은 미역 한 줄기가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기쁠 때도 춤을 추고, 슬플 때도 춤을 춘다. 전자는 축제의 춤이고, 후자는 위령제라는 이름의 춤이다.
그 옆에는 빛 바랜 붉은 우체통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우뚝 홀로 서 있었다. 아니 우체통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기야 우체통이면 어떻고, 드럼통이면 어떻하냐?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버텨온 것만도 대단하지 않은가?
가까이 그리고 멀리 펼쳐진 바다는 이처럼 잔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분노한 마귀처럼 해변을 할퀴고 물어 뜯는다. 인간 세상이 그러하듯, 바다는 영원한 평화도 없으며, 영원한 분노도 없다.
갑자기 날씨가 돌변하여 세차게 바람이 분다. 멀리서 신랑, 신부의 웨딩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찬 바람과, 높게 물결치는 파도 속에서, 오직 꿈과 희망만이 저 연인들의 가슴에 가득 차 있으리라. 바이런은 일찍이 말했다. 폭풍이 지난 들에도 꽃은 피고, 지진으로 무너진 땅에도 맑은 샘은 솟고, 불에 탄 흙에서도 새싹은 돋아난다. 저 신혼부부가 희망에 가득 차듯, 이재민들의 가슴에도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고, 그 씨앗이 봄과 함께 싹이 터서 힘차게 하늘로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순긋 해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순포 습지가 나온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출렁이는 것은 바다나 호수나 마찬가지다. 바다가 휘몰아치는 파도라면, 순포 습지는 잔잔한 흔들림이다. 흔들림 속에서 헤쳐 나오는 인생이라야 인생이 무엇인지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끝.
(2023년 4월 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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