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여행기 10(최종회)
- 장무, 그리고 네팔로 출국 -
<여행도>
<에베레스트에서 네팔로 여행 경로>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에서 네팔로 가려면 다시 띵르로 가야 한다. 그런데 트레킹 팀원들에 의하면, 트레킹 코스도 길을 잘 닦아 놓아 충분히 버스가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운전수와 띵주는 상의를 하고 또 숙고를 하더니 "그러면 산길로 가봅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제 가난한 아이들을 본 추억을 더듬으며 산길로 버스를 타고 간다. 자갈 밭을 지나가기도 하고, 모래 밭을 지나기도 하고, 산 비탈을 따라 가기도 한다. 개울이 나타나기도 하고, 강물의 흔적만 있는 메마른 강터를 따라 가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설산이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는가 하면, 자전거 여행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걸어서 이 황량한 들판을 걷는 사람은 단 한 명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우리 동료 네 명이 이 길을 걸어왔다니, 부럽기도 하고, 너무 황당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음에 회원들이 이곳에 온다면, 이 길을 또 걸어야 한다는 사람, 버스로 가야한다는 사람 등 의견이 분분했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차피 버스가 다닌다면, 걸을 부분은 걸어서
가고 그럴 필요가 없으면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도보와 버스 여행의 중간 형태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몇 시간을 걸쳐서 다시 도착한 것이 띵르다. 이미 점심 때가 넘었다. 어떤 식당에 들렀다. 식당 안에는 이미 미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택사스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장무로 가는 중이었다. 한참을 기다려 그들이 음식을 먹고, 마침내 우리가 먹을 차례가 되었을 때는, 이곳에 들어온지 거의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호텔은 컸으나
종업원 수가 적어서 그렇게 늦은 것이다.
|
주변을 돌아보니 한 때는 번성한 곳이어서 사방에 많은 빈방이 있는 큰 호텔이었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다 보니 이곳에 머무는 사람이 없어서, 빈 호텔 방 앞을 서성이는 것은 바람뿐이요, 호텔 방에 머무는 것은 티벳의 태양뿐이었다. 방 내부의 벽에 쳐진 휘장(揮帳)은 세월이 흘러 변색되고 때가 묻었지만, 한 때는 임금님이 묵었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방처럼 보였다. 침대 옆에 세수대야가 있었는데 수도도 없는 이곳에 왜 세수 대야가 있을까? 설마 부부 싸움할 때 머리에 뒤집어 쓰고 싸우라는 것은 아니겠지?
|
나지막한 늪지대 너머에 초원이 있고 초원 위에 말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너머로 푸근한 설산이 삥 둘러쳐 있다. 설산이라는 이불의 도움일까?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 사람들은 개울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빨래를 했다. 그 옆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라면을 끓여 먹는지 파릇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기도 했다. 이곳의 목가적인 풍경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나 보다.
|
한참을 가면, 이번 여행의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등장한다. 버스 타고 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곳이기에 여기가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티벳 최고의 설경을 볼 수 있는 바로 이 곳, 띵르와 장무 사이의 어떤 언덕이다. 장쾌하고 장엄하고 통쾌하다! 눈 앞에 쫙 펼쳐진 저 설산을 보라. 시야가 넓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카메라의 한 화면에 잡히지도 않는다. 보통의 경우
산의 아래 쪽에 서서 산을 올려다 본다. 하지만 여기 고개에서는 나와 거의 대등한 높이에서 설산을 본다.
흰산 봉우리와 흰 구름이 얼키고 설켜 어느 것이 산이고 어느 것이 구름인지 구별이 안 된다. 마치 꿈에서나 봄직한 몽환적인 분위기다. 자세히 보면 흰 산은 하늘로 치 솟기도 하고, 흰 고래등처럼 내 앞으로 뻗어 있기도 하고, 나를 포위하듯 둘러 싸기도 한다. 괴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야, 이 광경을 표현할 방법이 없네."이었다. 중국에서
최고의 산은 황산이요, 최고의 강물이 구채구라면, 최고의 설산은 바로 여기 저 산임에 틀림없다.
나는 사진을 좀 찍다가, 사진이고 나발이고 다 그만두고, 나의 맨눈에 저 설산을 넣어 영원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싶었다. 얼마나 오래 동안 넋 놓고 지켜 보았을까? 이제는 출발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외침에 몽롱함에서 깨어났다. 그들의 손에 이끌려 버스에 올라서야 비로소 가물가물한 정신을 차렸다. "돌담 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 갈 때 뒤돌아 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이라고 나훈아는 노래했다. "언덕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언덕길 올라 와서 뒤돌아 보며, 가슴에 묻어 두고 떠나는 너"라고 나는 노래했다.
|
<농부들이 타작을 한다.>
<안내자 띵주가 찬 물에 머리를 감고>
<장무로 가는 길>
티벳이 해발 4000미터, 장무는 해발 2500미터다. 도저히 길을 낼 수 없는 곳에 길을 냈기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깜짝깜짝 놀래며 가슴을 쓸어 내리며 가야한다. 아래로는 천길만길이요, 위로는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바위가 언제 굴러올지 모를 상황이다. 오른쪽으로는 폭포가 계속 이어져 비만 조금 왔다하면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길이 순식간에 사라질 그런 형편이다. 한숨을 쉬며 오금을 조리며, 의자의 손잡이를 으스러지도록 잡으며 그렇게 얼마를 왔을까,
손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
|
<장무>
드디어 장무인지, 김장무인지, 김장배추인지, 네팔에 인접한 국경도시에 도착했다. 산 비탈에 세워진 집을 보면 중국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내가 스위스에 온 것이 아닌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중국어를 못하고 영어를 했다. 반갑기는 하지만 이상했다. 영어를 잘 하면서 값싼 노동자를 네팔에서 불러다 쓰는 것이다. 음식도 비프스테이크를 포함한 서양 음식이 대부분이다. 발마사지도 중국의 다른 곳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싸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아도 "나는 잘 사네"라고 써 있다. 어제 보았던 티벳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그때 누가 말한다. "부모를 잘 타고 나는 것이 큰 복이듯, 태어난 장소가 사람에게는 중요한 법이구먼." 바로 전날 보았던 산 중턱의 사람들이 다시 떠 올랐다. "왜, 태어난 그곳에서만 그들은 살아야 할까? 왜 이곳에 와서 살지 않을까?"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본래 인간이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
<장무의 식당>
<장무의 풍경>
다음 날 아침 일찍 출입국 사무실로 내려갔다. 이미 많은 서양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그 옆에 있는 공안이 찍지 말라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여기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망각했던 것이다. 졸지에 쫄아든 나는 땅 바닥이나 찍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 둘러 싸여 개 한 마리가 잠을 퍼 자고 있었다. 역시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
운전수와 가이드 띵주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 동안 함께 한 세월 때문에 정도 많이 들었건만 헤어져야만 했다. 띵주도 운전수도, 왜 우리처럼 네팔도 가보고 인도도 가보고 한국도 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젊었을 때는 당신처럼 일만 했다. 이제 돈을 모아 세계 여기저기 다닌다. 당신은 내 나이 때에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국가에 다니면서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좋은 날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띵주, 건투를 빈다"라고 말하고 악수를 건넸다.
2011년 10월 6일 아침, 중국에 온지 16일만에 중국을 떠난다. 까다로운 출국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바라보면 답답한 중국 공안을 뒤로 하고 우정의 다리를 건넌다. 겨우 20미터나 될 듯 말 듯한 이 다리를 넘으면 바로 네팔이다. 다리 한 가운데, 국경을 표시하는 줄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다리를 건너 뒤를 바라 보았다. 중국 공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
<우정의 다리를 건넜다.>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영어,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 슬리퍼나 맨발로 걷는 사람들. 짐차가 들어올 수 없어 좁아진 길에 한 없이 이어지는 짐꾼들의 도보 행진. 우정의 다리를 건넌 후 5분이 마치 내 평생과 같은 길이의 시간인 듯 길게 느껴 졌다.
|
속박에서
|
→
|
해방으로
|
황량함에서
|
→
|
푸르름으로
|
추위에서
|
→
|
더움으로
|
질서에서
|
→
|
무질서로
|
가난함에서
|
→
|
찌들음으로
|
중국어에서
|
→
|
영어로
|
동양인에서
|
→
|
서양인으로
|
내팔에서
|
→
|
네팔로
|
|
|
|
(2011년 12월 6일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