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여행기 1
—중국 "장무"에서 네팔의 "카트만두"로—
"아, 삶의 무게여!"
2011년 10월 6일 목요일, 무사히 중국과 네팔의 국경선을 넘은 우리는, 네팔 비자를 받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앞 사람의 뒤꿈치만 보면서 묵묵히 걸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지 한 참을 걸어가도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일반적으로 외국인이 자국으로 들어오면, 일렬로 세워서 여권이나 비자 검사를 하고 들여 보낸다. 그러나 여기서는 들어오라는 사람도 없고, 나가라는 사람도 없다. 부처님 말씀이던가?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去者不追 來者不拒:거자불추 내자불거)".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다. 자기가 자기 앞날 신세 생각해서 비자를 받든지 말든지 해야 한다.
앞 사람을 따라서 들어간 네팔의 이민국은 무슨 일일 노무자 채용 사무소 같았다. 보통 교실의 반의 반만 한 방에 여행객이 득시글 거렸다. 안내자도 없고, 안내문도 없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따라서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하고 비자를 받아야 한다. 서류를 작성했어도 먼저 손을 내미는 놈이 임자요, 그 놈을 밀치고 먼저 나서면 또 그놈이 먼저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 사람의 비자 서류를 갖고 있으면 그 뒤에 있는 사람은 다른 줄에 있는 사람이 빠져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열만 팍팍 받는 도리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무질서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한 서양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이런 데서는 소리친 놈만 바보요 푼수지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관습을 따르는 법, 이제 나도 네팔의 관습을 빨리 배워 익숙해져야 한다.
간신히 비자를 받고 버스를 탔다. 중국에서 이미 예약해 놓은 버스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세 버스 안 에는 운전수 이외에도 세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안내자였는데, 나머지 젊은 청년 두 명은 무엇하러 거기에 왔는지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젊은이 한 명은 카트만두 시내에서 내렸고, 또 한 명은 허드렛 일을 도와주며 팁을 요구했다. 그때 네팔은 인건비가 싸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 올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티벳의 추위에 떨던 우리는 어느새 더위를 걱정해야 했다. 한 시간을 채 못 가서, 티벳이 그립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한다. 해발 4000미터의 티벳에서 해발 1400미터의 카트만두로 가야 한다. 초록색 산이 마치 오월의 산처럼 싱그럽다. 산에 드문드문 박혀있는 허름한 양철집이 가난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낭만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길옆에 늘어선 집들의 초록색 대문과 그 앞에 널려있는 빨래 그리고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화분이 "여기가 네팔입니다"라고 말한다.
계속 버스는 아래로 내빼고 내뺀다. 자동차 길이 계곡 중턱에 위치해 있다. 아래로는 계곡물이 여름 장마처럼 흘렀고, 깎아지른듯한 산은 초록색 향취를 풍기며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어느 계곡에 다다르니, 번지 점프를 한다는 팻말이 나타나고, 춘향이가 생각나는 그네도 보인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느낀 네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길 양쪽으로 수 많은 트럭이 늘어서 있다는 것이다. 왜 그리도 많은 트럭이 길가에서 잠을 자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트럭을 피해서 두 차가 교행(交行)이라도 하려면, 운전수는 진땀을 빼며 10분 이상 속을 끓여야 했다. 트럭의 바퀴는 수십년을 써 먹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맨들매들 닳아서 맨땅에서도 미끄러지기 쉽게 되어 있다.
얼마를 가서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갔다. 네팔의 메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는 가장 전형적인 음식은 "달밭(dal bhat)"을 시켜 먹기로 했다. 달밭이라! 어떤 음식인지 모르지만 이렇게도 멋있는 이름이 있을까? 옛날 시골에서 여름 밤에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은 그야말로 "별밭"이었다. 마당 옆에는 "텃밭"이 있었고, 그 한 쪽에 "꽃밭"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네팔에서 "달밭"을 먹는다!
<달밭(dal bhat): 밥과 나머지 재료가 함께 나오고 손으로 먹는다>
두근 거리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나온 달밭은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밥을 제외하고는 먹기가 역겨웠다. 색깔이며, 향이며, 모양 모두가 나에게 맞지 않았다. 김에 싸서 밥만 몇숟갈 뜨고 숟가락을 내려 놓았다. 다른 탁자에서는 네팔 사람들이, 이 반찬 저 반찬을 손으로 오몰조몰 섞더니, 그 손으로 먹고 있었다. 우리가 상추쌈을 손으로 싸먹으나 그들이 손으로 비벼 먹으나 뭐 그게 그것이겠지만, 새로운 식사 문화에 적응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아래 층에 가보니 초등학교 2-3학년 쯤 될듯한 꼬마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사방에 널부러진 음식과 그릇, 벽에 아무렇게나 뿌려진 페인트, 그 아래 지저분하게 놓여진 각종 컵, 꿈에라도 나오면 기겁을 할듯한 그런 장면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 꼬마가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나도 그를 보고 씩 웃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비누를 묻혀서 그릇을 닦고 있는 아이를 보고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동 노동 착취"니 뭐니 그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네팔과 인도에서 닥칠 수 많은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마침 네팔의 다샤인 축제 기간이어서 전통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고, 여기저기서 이마에 빨간 물감을 바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으며, 어머니 또는 아주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꼬마에게 무슨 말을 하면서 이마에 빨간 점을 찍고 나서는 우리나라의 세뱃돈 비슷한 돈을 주는 것이 흥미로웠다.
<한 꼬마가 다샤인 축제일을 맞아 곱게 차려입고 포즈를 취한다.>
버스 위에 앉아서 가는 사람들을 보니 여기가 정말 네팔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위에서 장시간 가면 얼마나 뜨거울까, 사고나 나면 어떻게 할까, 버스 위에 탄 사람과 버스 안에 탄 사람은 요금이 같을까, 여자들은 어떻게 버스 위로 올라갈까 등등 궁금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멋있어 보였다.
여행자 거리로 알려진 카트만두의 타멜 지역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할 때였다. 축제 기간이어서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문을 연 일부 상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상점 주인이 우리를 보면 "중국 사람이냐?"라고 묻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중국 사람이 많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간 것이 아니기에 모든 사람이 한 곳에서 여관을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잡은 허름한 여관에는 무슨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마치 시골의 잔치집을 방불케 했다.
다음 날 아침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양을 잡는 사람을 목격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1)양의 몸이 눈처럼 희다는 사실, 2)양의 몸에서 나온 내장의 양(量)이 양(羊) 자체보다 더 많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양의 머리를 잘라 끓는 물에 휙 집어 던지고,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연신 씻겨내는 그의 직업적 무감각함을 목격하면서 슬슬 뒷걸음쳐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카트만두 중심가>
처음 방문한 곳이 두바 광장이다. 옛날에 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장소로 알려진 이곳은, 타멜에서 도보로 갈 수 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통해서 갈 수 있는데, 가면서 수십번은 물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마치 서울의 남대문 시장 같다. 각종 물건을 집채처럼 쟁여놓고 하나라도 더 팔려는 장사꾼의 외침이 귓가를 스쳐 멀리 메아리쳤다.
두바 광장의 중심부로 들어가면 전통식 네팔 건물이 늘어서 있다. 돌 계단 사방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거나 건물을 스케치 하는 사람들이 더러 보이지만, 대부분은 관광객 또는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날이 너무 더워서 이틀 전에 있었던 티벳 생각이 또 나는 것은 어쩔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을성 없는 인간 본성의 변덕스러움에 헛 웃음만 나온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광장 가운데에 있는 비둘기 떼다. 건물 지붕과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누워있는 검은 소의 등에까지 온통 비둘기 떼다.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바가지에 먹이를 가지고 와서 사방에 뿌리니, 그야말로 비둘기 소굴이라고 할만큼 온 천지가 비둘기 밭으로 변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한 아저씨가 비스켓 주머니를 들고 다니면서 길거리에 있는 소에게 비스켓을 주는 것이었다. 소는 날름날름 받아 먹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기도 했다. 소는 응당 산과 들에 있는 풀을 먹고 사는 동물이거늘, 비스켓을 먹고 사는 소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기야 인간도 옛날에는 곡식이나 채소만 먹다가 잔칫날이나 돼야 고기 한 점 먹어 보았으나 이제는 노상 고기에다, 피자, 햄버거, 치즈 등을 먹어대니, 아마도 소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인간 니들 웃기고 자빠졌네. 인간 니들 처음에는 초식 동물이다가 잡식으로 변하고, 이제 육식 동물로 변했어. 영양 과다에다 영양 불균형으로 너희들 종말이 멀지 않았어! 얼 빠지고 쓸개 빠진 것들."
오후에 찾아간 파슈파티나스! 인도의 갠지스 강에서나 볼 수 있으르리고 생각했던 화장 장면을 바로 눈 앞 10미터 아래에서 보게 되었다. 폭 약 10미터 정도의 강가에 화장터가 있었다. 여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저 먼데서 희미하게 이 장면을 목결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했지만, 예상 밖으로 바로 화장의식이 거행되는 바로 위에서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에 내 스스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강가에 사방 약 3미터 정도의 단이 놓여져 있고, 그 위로 몇 사람의 상여꾼에 의해 시체가 운반되어 왔다. 흰천을 아래에 깔고 노란 천으로 덮힌채 바로 이 화장터로 옮겨온 시체는, 한 쪽 손이 밖으로 들어나 있었고, 얼굴과 발의 윤관이 선명하게 보였다.
시체를 메고 들어온 몇 명의 상여꾼이 몇 바퀴 돌더니 시체를 단에 안치했다. 무슨 말을 몇 마디 하더니, 상주로 보이는 흰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이가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 동안 참았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는 와이셔츠를 벗어 버리더니 흐르는 눈물을 자기 팔뚝으로 대충 닦고는 또 엉엉 울기 시작했다. 불이 잘 붙지 않으니, 상여꾼 중의 한 명이 양초의 원료로 보이는 흰 반 죽을 시체 사방에 집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시체에 입혀져 있던 흰 옷을 벗겨 물 위에 휙 집어 던졌다.
상주는 상여꾼에 의해 밖으로 인도되어 나오고 흰 연기가 올라오며 푸석푸석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콩밭에 태양이 작열할 때 나오는 뚝뚝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체는 서서히 화염으로 휩싸여 갔다. 시체를 덮은 짚에서 나오는 연기가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퍼져 나가 강을 타고 흘러갔다.
어느 순간 시체의 팔뚝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시체가 살아 있다는 것인가? 연소와 시체의 물리적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겠지만, 나는 시체는 살아서 움직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뜨거움이라도 면해 보고자 하는 사자(死者)의 필사의 노력이리라. 살았을 때, 잘 살건 못 살건 고생 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리요. 그렇게 고생하다가 저렇게 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 아닌가? 죽어서 땅에 묻히건, 독수리의 밥이 되건, 불에 태워지건, 죽은 자는 그렇게 몸을 맡긴채 말없이, 인간의 손에 의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승과 저승의 문턱을 넘어 잿더미로 변해가고 있었다.
개울 맞은 편에서는 구경꾼이 앉아서 카메라를 들고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저 일상적인 일을 바라보는 양, 그렇게 반대쪽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강에서는 아이들 몇 명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시체를 덮었던 옷을 집어던진 바로 그 물이다. 타고 남은 재가 뿌려진 그 물이다. 그것이 그 아이들 물놀이와 무슨 상관이랴. 어제도 그랬고, 오늘 그렇고 내일도 또 그런 것일뿐, 아무 것도 이상할 것이 없고,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나서, 살다가 죽고, 그리고 이렇게 불태워지는 것은, 매일 경험하는 그들의 일상일뿐이다. 마치 우리가 아침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 잠을 자는 일이 그렇듯이 말이다.
<화장장 근처에 이상한 복장의 노인이 돌아다녔다.>
다리를 중심으로 강 상류에서도 화장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방에 원숭이 떼가 날 뛴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무슨 잔치가 벌어진 듯이 이리저리 분주하다. 새끼는 어미 등에 올라, 마치 오토바이를 탄 애인을 잡고 달리듯 바짝 달아 붙어 달린다.
상류에서 거행되 장례식은 높은 계급의 장례식이라고 한다. 살아서도 떵떵 거리며 살더니 죽어서도 브라만 계급의 의식은 품위를 유지하나 보다. 좀더 엄숙해 보인다. 의식도 좀더 신경 쓰인 듯 하다. 우선 발목을 강물에 씻기더니, 시체를 메고 몇 바퀴 돈다. 이어서 장례 집도자가 경전을 읽고, 짚에 물을 흠뻑 뿌려 시체 위에 올려 놓는다. 이것을 지켜보는 가족 여인들이 박수를 치면서 울어댄다. 나는 전에는 박수는 기분 좋을 때만 치는 줄 알았었다. 타지 않던 물에 젖은 짚은 이제 본격적으로 타닥타닥 타기 시작한다.
장례사의 옷과 몸에 묻은 붉은 물감이 석양에 비쳐 그 색이 더욱 또렷하다. 천당으로 보내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을 죽인 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살인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이 났다. 궁정동에서 박대통령을 살해하고 허겁지겁 방을 나서는 김재규가 저런 모습이었을까? 옆에서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빵" 하는 권총 소리와 더불어 공중으로 뿜어대는 핏줄기를 바라본 심수봉의 충격은 어떠했을까? 그 짧은 순간에 영화에서 보았던 모든 피 튀기는 죽음의 장면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맛도 없었다. 4층에 있는 나의 여관 방 베란다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맞은 편 초록 건물이 더욱 짙은 초록으로 보였다. 하늘에는 거대한 뭉게구름이 치솟고 있었다. 그 주위로 새 몇 마리가 이리 훨, 저리 훨 날고 있었다.
지붕에 앉아 내일을 걱정하는 새도 있었지만, 하늘을 훨훨 나는 새도 있었다. 그 옆에는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흰 달이 떠, 대지를 밝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 폭풍우 속에서도 맑은 물은 흐르고,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는 것이지. 저 달이 밝아오면 또 별이 빛날거야. 오늘 달밭을 먹지 않았나. 오늘 밤, 저 달을 바라보며 "달밭"을 먹으며 별밭을 생각하리.
내 벗이 몇인고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2012년 1월 26일)
네팔여행기 2
—"박타푸르"와 파탄의 "두바광장"—
<카트만두 지도: 박타푸르와 두바광장> *"두바광장"은 두 곳이 있는데, 타멜 근처의 두바광장은 전날 구경했고, 이날 구경한 곳은 파탄에 있는 두바광장이다.>
15세기에 세워졌다고 하는 이 곳 박타푸르는 타멜에서 동쪽으로 약 15키로 떨어진 작은 도시다. 그 후 전쟁을 통해서 훼손되었고, 특히 1934년 지진에 의해 크게 파손되었으나, 독일의 도움으로 많이 복구했다고 한다. 박타푸르는 수 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는 도시다. 실제로 그 동네에 주민이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어서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돌아 다닌다. 그 사이에 수 많은 가게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일종의 관광지처럼 보인다.
로운리 플래니트에 나와 있듯, 하루만 구경할 곳이 아니라, 적어도 1박 2일, 또는 며칠을 묵으면서 싱그러운 초목을 바라보고 땅을 밟으며,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바라 보아야할 그런 곳이다. 이곳에는 여관과 식당이 많이 있어서 숙식 문제는 걱절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우리가 진작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이곳 박타푸르에서 1박 하면서 여유롭게 구경했었을 것이다.
10월의 박타푸르는 한국의 한 여름처럼 더워서 수 많은 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며 다 구경하는 일이 힘들었다. 그래서 핵심이 되는 몇 군데만 구경하였는데, 한 참을 구경하다 보면 그 건물이 다 그건물인 듯하여, 오해려 흥미를 잃기 십상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광장이 있다하여 가보면 터만 있을 뿐, 지금은 도자기를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황금의 문이 있어서 그 문을 통과하여 지나가면, 힌두교인만 들어오게 하여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다.
건물에 부속으로 장식된 구조물을 잘 관찰하면 재미있는 장식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성적(性的인) 장식물이다. 로운리플래니트에 의하면 이런 성적인 예술은 분명히 티벳 불교와 힌두교와 연관이 있겠지만, 목적은 불분명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요소는 카트만두에 있는 여러 사찰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남녀의 성행위 장면을 조각하여 붙여 놓은 것이 신기하다. 성이라는 것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요,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것이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하니, 정말 성이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처음이자 끝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한국 고전에 관심이 있어서 춘향전을 다시 읽어 보았다. 춘향전도 성적 묘사는 지금 읽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 도령이 춘향이를 만나 사랑하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쳐 담쑥 안고
마침 축제 기간이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시가를 행진하고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구름처럼 물려 다녔다. 초록색 풀이 돋아난 3층 건물 식당에서는 식사를 하던 관광객들이 사진찍기에 바쁘고, 아침부터 몰려드는 관광객을 보고 식당 주인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늙고 병들면 어쩔 수 없나보다. 먹을 것도 없고,입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건물 아래서 아침부터 잠을 청해 자고 있었다. 반쯤 벗겨진 바지를 추켜 입을 힘도 없는 듯 그들은 맨 땅에서 그저 눈만 감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사람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복부에 자연스런 세수대야가 생긴 듯 했다. 아랫배가 얼마나 꺼져 들어갔는지, 그 안에 태평양의 물을 다 담아도 남을 만큼 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돌아다니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죄스럽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들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수바 라지 라마」라는 화가의 집을 찾아들어간 것은 울적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화방을 운영하고 있는 청년은 왜그런지 평온하고 인자하게 보였다. 청년이 인자하다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도,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그와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녹여주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몇 달이 걸린다고 말하면서 화판 위에 섬세하게 붓을 갖다대는 그를 보고 저런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옆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내가 아버지만큼 실력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를 존경심으로 바라보며 탱화 한 점 구입했다.
<고기를 햇볕에 말린다.>
어두운 그늘이 있으면 한편 밝은 면이 있는 법,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활기차게 걷거나 뛰어 노는 모습을 보니, 전에 보았던 노인들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다지도 예뻐 보일 줄이야. 마침 명절이라 그런지 전통복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모두 영화배우처럼 멋있어 보였다. 눈은 왜 그리도 시커멓고, 눈섭은 왜 그리 긴지, 한 참을 넋놓고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까마귀처럼 생긴 새가 쥐를 잡아 전깃줄 위에서 먹고 있다.>
「라자 아왈」이라는 여학생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학생은 영어를 잘 했고 한국말도 조금했다. 사실 네팔 사람들은 어른이건 아이건 모두 영어를 잘 한다. 아리랑 TV를 통해 한국말을 배웠다는 그녀는 여기저기를 소개해 주면서 한국말을 연습하려고 노력했다. 계속 안내를 받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여,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타일러도 그 아이는 계속 우리를 따라 다녔다.
어쩌다 결국 그녀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붉은색 2층 벽돌집이었다. 내부는 우리 나라 시골 농촌의 방과 비슷했는데, 낡은 TV가 놓여있고, 여러 가구가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려있고 방에 여러 물건들이 조금은 산만하게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녹차를 준비하니 마시고 가라고 했지만 폐가 될 것 같아 그냥 자리를 떴다. 그녀는 Facebook 주소를 주면서 나도 가입하라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녀의 Facebook을 방문하고 담벼락에 몇 글자 남겼다. 그 뒤로 너무 자주 연락이 와서 아예 Facebook을 탈퇴하고 말았다.
사실 Twitter나 Facebook에 가입한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이것과 담을 쌓고 지낸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따라 다니면서 그들의 의견을 읽고 싶지도 않고, 또한 그들이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나의 글을 읽으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어떤 이유로 나의 이메일 주소록에 적혀있는, 내가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의 글을 이메일로 보내고 있다. 그들이 내가 보낸 이메일을 오랫 동안 읽어보지 않으면 나의 이메일 주소록에서 그들의 명단을 삭제해 가고 있다.
<학생의 집>
오후에 찾아간 곳이 파탄에 있는 두바광장이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점심 때가 넘었다. 찾아 들어간 집의 음식이 다행이도 내 입맛과 맞아 떨어져 그런대로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그때 새삼스럽게 느낀 것이, 그 곳의 쌀의 길이가 왜 그리 길쭉한 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간듯한 길쭉한 쌀이 접시 위에 놓여있는데, 꿈틀 거리며 어디로 도망가는 듯 했다. 순간 수 많은 쌀 벌레가 내 몸으로 기어오르고 하늘로 날아 온 천지가 흰 눈이 오는 듯한 환각에 빠졌다. 갑자기 내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닌 듯 하여 고개를 저어 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고 차분히 식사를 했다.
우리 나라 절에 갔을 때, 사찰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그 절이 다 그절로 보여서 별로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넓고 넓은 광장에 사방에 늘어선 건물이 모두 비슷해 보였다.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도 다 비슷했고, 그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도 다 비슷해 보였다.
한 가지, 동네 수도에서 목욕을 하는 여인들이 신기하다면 신기했는데, 어떻게 그렇게도 교묘하게 감출 것은 감추면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지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마치 성인 나이트에서 무용수가 나와 옷을 훌훌 벗어던지다가 결국 마지막 남은 실오라기 하나를 집어 던질 때, 침을 꼴깍하면서 바라보는 그런 기분이랄까? 넋놓고 바라보는 나의 소매를 잡아 끄는 사람에 이끌려 그곳을 뜨게 되었다.
택시를 타고 두바 광장에서 타멜로 왔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택시비는 300루피가 나왔다. 마침 잔돈이 없어서 1000루피를 주고 거스름돈을 받고 내렸다. 그런데 호텔방에 와서 돈을 세어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1100루피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돈 5000원 짜리와 50000원 짜리가 색이 비슷하듯 그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택시 운전수가 착각하여 택시비를 못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돈을 더 내주었던 것이다.
나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공짜로 택시 타고 돈도 벌었다! 뽕도 따고 임도보고, 도랑치고 가제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여튼 기분이 왜 그리 좋은지, 옆에서 어떤 사람이 보았다면 아마 실성했다고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공짜의 즐거움이 이렇듯 대단하다는 것인가? 나는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리기리 날뛰었다. 마치 쌍무지개를 보고 들어와 벌건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버벅대는 꼬마마냥 흥분에 휩싸였다.
순간 30-40분 동안 공짜 차 태워주고 오히려 가진 돈을 날렸을 택시 운전수가 떠 올랐다. 우리 나라 같았으면 약 2만원 정도의 요금이 나왔을텐데,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5-6000원 요금이 나왔을 것이다. 그 돈을 받지도 못하고 자기 돈까지 날렸으니, 그의 속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분통하고 통탄하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내가 죄스러울 뿐만 아니라 내가 죽일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의 등을 쳐 먹는 놈, 너 같은 놈은 뒈져야 한다. 쓸개 빠진 놈, 남의 슬픔에 박수치는 놈, 네가 바로 놀부 심보 아니더냐? 아니, 너는 놀부도 아니고 쫄부도 아니고, 두부, 둔부다! 오장육부도 없는 놈이다!
또 한 참을 생각하니, 뭐 내가 그러라고 시켰나 뭐했나,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내가 왜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지 "또 다른 내"가 나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내 마음 속에는 "나"와 "또 다른 내"가 치열한 논리 싸움과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결국 "제 삼의 내"가 둘을 화해시켰다. 그것이 바로 시원한 한 잔의 맥주였다. 그 맥주 한 잔으로 모든 "나"는 이전의 "나"로 되돌아갔고, 한 여름 밤의 소동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트만두의 얼어죽을 "만두"처럼 그렇게 막을 내렸다.
(2012년 2월 2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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