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기 3
—"나모부다" 트레킹—
<나모부다>
나모부다를 가기 위해서는 카트만두에서 차를 대절해 타고 약 2시간 정도 가야한다. 아침 7시에 카트만두를 출발한 일행은 9시쯤 파나우티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 골목길을 통과하면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한다. 말이 게스트 하우스지 겉 모습만 보아서는 게스트 하우스인지 일반 가정집이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집이다.
채소 밭으로 보이는 텃밭에 탁자를 갖다 놓고 그위로 아침 식사를 갖다 주었다. 그 집에는 양과 닭이 있었는데, 새끼 양이 어미 젖무덤을 턱으로 야몰차게 툭툭 들이받으면서 젖을 빠는 것이 신기했다.
그 집에 딸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다 빼어난 미인이었다. 하기야 그집 뿐만 아니라 네팔 사람 대부분이 적어도 젊었을 때는 모두 다 미인처럼 보였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들의 어머니까지 합세하여 함께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어머니는 좀 못생긴 얼굴이었는데, 그런 얼굴로 어떻게 저런 예쁜 딸들을 낳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편 이 아이들이 나이를 먹으면 모두다 저 어머니처럼 박색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러시아 여인들이 젊었을 때는 모두 다 미인이지만 나이가 들면 뚱뚱하고 못생긴 아주머니로 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한 아이가 자기가 갖고 있는 두껍고 묵직한 핸드폰으로 기념 사진을 찍으려고 하였으나 고장이 나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얇은 핸드폰(스마트폰이 아닌 구식 핸드폰)을 포더니 부러움에 눈이 핸드폰에서 멀어지지가 않았다.
<도보 여행도>
나모 부다를 향해 트레킹을 시작한 것은 오전 10시경이다. 동네를 빠져 나가 개울가에 도착한다. 개울 옆 그네터에서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있다. 일행 중 한 명이 그네 솜씨를 자랑한다. 그 옆에는 화장터로 보이는 재가 많이 쌓인 곳이 있고, 사원과 공회당으로 보이는 공공 건물이 눈에 띈다. 개울에는 아낙네가 아이들과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빨래를 해서 다리 난간에 척척 걸어 말리는 것이 내 시선을 끈다.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더러 눈에 띠었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누런 들판을 걷는다. 하늘 높고 시원한 가을 하늘 아래 누런 들판에서 벼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 한국의 가을이다. 그러나 여기 네팔에서는 누런 들판은 들판이로되, 작렬하는 태양 아래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한 가닥 없다. 일년 내내 뜨거운 여름인 이곳에서 가을 걷이를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겠지만, 한국의 서늘한 기후에 황금 물결을 연상하는 나는, 왜 그런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아이들, 에라 모르겠다 꾀를 벗고 물 속에 뛰어드는 소년들, 나도 못 참겠다고 물 속에서 나오지 않는 검은 물소, 갈증을 이기지 못해 수도 꼭지의 물을 손으로 받아 마시는 아이, 모두가 이곳 네팔의 시골 풍경이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잠시 숨을 돌렸다. 고다마 싯다르타가 진리를 깨우친 그 보리수 나무는 아닐지언정, 그간 지나온 여정을 돌이켜보고 앞날을 생각해볼 여유를 가져다 주는 보리수 나무였다. 사실 지금까지 여행 중 하루 종일 걷는 트레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티벳에서 1박 2일간 산길을 걸은 경험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태까지 반나절 이상을 걷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지금부터 가야할 길은 가파른 산 길이다.
어려운 고비가 나타날 때마다, 내가 왜 이런 생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언젠가 편안한 삶은 곧 죽음이라는 방정식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고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그런 고난을 어떤 사람은 정말 "고난"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고행"으로 여기며, 어떤 사람은 인간이면 겪어야 할 "과정"으로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희열"로 느낄 뿐이다.
할머니들이 밭에서 일을 하거나 무거운 짐을 끈에 매달아 이마로 떠 밀고 가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불쑥 손을 내밀고 적선을 요구한다.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손가락의 반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데었든지, 아니면 무거운 물건에 짓눌렸으리라. 당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회복하기 힘들텐데, 저런 상태로 방치했다가는 필경 절단해야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였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꺼멓게 변해가는 손을 내밀면서 몇 푼 받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이 보였다. 죽지 않을 사람도 죽게 내 버려 두는 것이 가난한 나라의 삶이요, 죽을 사람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 숨만 깔딱이든 말든 간에 -- 하는 것이 부자 나라 사람들의 삶인가 보다.
나모부다가 있는 산 정상에 도착한 것은 거의 12시쯤 되었을 때였다. 힘은 들었지만 예상 밖으로 쉽게 올라온 트레킹이다. 그러나 일행 중 일부는 단지 정상을 50미터 남겨두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정상이 코 밑에 있어도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한 참 휴식을 취한 뒤 모두 나모부다에 도착하는 쾌거를 누렸다.
나모부다에서 바라보니 사방이 탁 티었다. 이곳에서는 멀리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고 하였으나, 연무(燃霧)로 인해 먼 산이 희미하게 보이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구별되지 않고 그저 우유빛으로 허옇게만 보였다. 산등성이에 점점이 박혀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 여기저기 보인다. 위로 눈을 돌려보면 모나부다 노란 지붕의 사찰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우리 나라 어딘가에서 봄직도 한 이 절에서 예배가 시작된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나모 부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 보니, 절 안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배를 볼 때 듣는 음악이 특이하다. 감성을 자극하는 조용한 음악이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등학교 밴드부원들의 시가행진 곡 같기도 하고, 영화에 나오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혼을 빼 놓는 음악 같기도 하다. 젊은 신자들은 알 수 없는 음악에 맞추어 주저리주저리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으며, 스님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리저리 거닐면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 같으면 정신이 혼란스러워 아무런 생각도 안 나겠지만, 그들은 그런 음악을 들으며 신비의 세계로 빠지는 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떤 믿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믿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설득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증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간절한 필요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칼 세이건>"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나모부다에서 내려오는 오솔길은 평범한 길이었다. 토박이 네팔인들의 삶이 그대로 보이는 마을을 지난다. 역시 뿌연 안개로 그 너머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은 보이지 않는다. 축제 기간이어서 사람들은 그네를 타기도 하고 아이들은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지붕에 고기를 말리는 집이 보이기도 하고, 옥수수대를 짤라 말리기도 한다. 지붕 위에까지 가득 태운 버스가 지나가기도 하고, 젊은 여자를 태운 오토바이가 지나가기도 한다. 할머니들이 풀단을 등에 지고 가기도 하고, 아이들이 알 수 없는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가기도 한다.
우리가 트레킹을 마치고 차를 타야할 지점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반, 그러나 아직 자동차가 도착하지 않았다. 가이드가 자동차 운전수와 핸드폰으로 통화하더니,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제 때에 올 수가 없다고 한다. 30분간을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불평한다고 해서 "그래 너 불평 잘 한다"라고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거기서 30분간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하기로 했다.
우선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버스 안뿐만 아니라 위에까지 가득 태우고 다니는 흥미로운 버스다. 저 버스를 한 번 타보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인데, 네팔을 떠날 때까지 저 버스를 타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버스와 버스가 충돌이라도 하는 날이면, 버스 위에 있는 사람들은 옥수수 알 떨어져 나가듯 땅바닥에 이리 딩굴 저리 딩굴 할 것이다. 정원 초과니 안전벨트를 맸느니 마느니가 저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들이라고 저렇게 타고가는 것의 위험성을 왜 모를까? 단지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뿐일 것이다. 죽으면 죽는 것이요, 말면 마는 것일 것이다. 저 세상에 천국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블랙 비유티(black beauty)라고 부른 한 소녀가 있었다. 검은 피부에 달걀 모양의 얼굴, 큰 눈에 우뚝 솟은 콧날, 어깨 너머로 물결치며 넘어간 머리, 목을 감고 어깨로 내려간 스카프, 팔뚝에 낀 천연색의 팔찌, 무엇보다도 백만불의 미소---도대체 연예인이나 모델을 스카웃하려는 자들은 네팔로 오지 않고 어디를 쏘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가 건네 주는 종이 위에 올려진 이상한 빨간 음식을 수줍게, 그렇지만 품위있게 먹고 있는 이름 모를 그 아가씨, 흙 속의 진주를 몰라주는 세상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30분이 지나서 시속 10키로로 달리는 우리 전세차가 왔다. 역시 갈 때도 시속 10키로로 카드만두를 향해 걸어가듯 움직였다. 이렇게 30분을 가서야 다른 차로 바꿔 타고 시속 80키로로 달렸다.
저녁 6시 30분, "한국 사랑"이라는 한국 음식점에 들렸다. 된장국에 삼겹살이 올라왔다. 모두들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국 음식에 눈치고 뭐고 사정 없이 먹기 시작했다. 얼마 시간이 지났을까, 옆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옆에 있는 맥주가 보이기 시작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일행 12명 중 2명은 그날 밤 한국으로 떠나야 했다. "떠날 때는 말 없이"라는 말이 있지만 떠날 때가 되니 모두 아쉬움의 작별 인사를 하느라 "떠날 때도 말이 많다." 하기야 19일간을 같이 여행했으니 정이 들대로 들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심정으로 멀리 손을 흔들어 이별을 했다. 남아 있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더욱 애달프리라.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어떤 형태든 떠나야할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이별은 단지 이별의 연습일 뿐이다.
(2012년 2월 3일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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